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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서 '낮아짐의 행복'을 배웠다스크랩된 좋은글들 2026. 3. 17. 07:06
시혜적 태도로 간 우간다, 內戰에 귀국 생각만 하다 낮은 곳으로
돈·지위·권력은 질시와 모함 동반… 나를 비워 우리를 채우는 삶일러스트=이철원
에티오피아 세인트폴 대학병원과 우간다 명문 마케레레 대학 사이의 의료 협력을 위해 3년 만에 우간다 땅을 밟았다. 캄팔라에서 재회한 민철씨는 40대 나이에 ICT 전문가라는 본업을 뒤로하고 현지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한 늦깎이 의대생이다. 내가 10년 전 우간다를 떠나며 남겨둔 낡은 차를 소중히 타고 있었다. 그가 운전하는 내 차를 타고 가며 들은 뜻밖의 이야기는 이번 여정의 가장 큰 선물이었다.
민철씨가 임상 실습 중에 만난 한 내과 의사의 사연. 그 의사는 마케레레 의대생 시절, 물라고 병원에서 실습하며 내가 환자들을 돌보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 시절의 좋은 기억 덕분에 내과 의사의 길을 택했고, 이제 스승의 지인인 민철씨의 실습을 돕고 있었다. 사실 내 기억 속엔 존재하지 않는 제자였다. 우간다에서 나로 인해 내과 의사가 된 사람이 늘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뿌듯해졌다. 아프리카에 첫발을 내디딘 때를 떠올리면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30여 년 전, 아프리카로 향하던 내 마음은 저 높은 곳에 있었다. 더 잘사는 나라에서 온 의사로서 척박한 땅에 뭔가 베풀어 주겠다는 시혜적 태도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런 오만한 마음으로는 그 땅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당시 우간다는 거듭된 내전으로 치안이 극도로 불안했다. 밤마다 창밖에서 들리는 총소리는 나를 깊은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도착 한 달 만에 비극적인 사건이 터졌다. 전날 내게 신발을 팔고 직접 신발 끈까지 매어준 다정한 한국 교민이 출근길에 총격을 당해 사망한 것이다. 차가운 수술실에서 그의 시신을 검안해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엔테베공항에 도착했을 때 마중 나온 대사관 운전기사마저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러자 내 눈에 비친 현지인들은 더 이상 환자가 아니었다. 언제 나를 해칠지 모르는 강도 아니면 거지로 보였다. 환자가 구름처럼 몰려왔지만 치료할 약제조차 없었다. 하루에도 수백 번 회의감이 밀려왔고, 머릿속엔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뿐이었다. 나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나를 바꾼 것은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는 삶’에 대한 성찰이었다. 나를 내려놓고 타인과 눈높이를 맞추는 삶의 자세를 배우면서 시선이 교정되기 시작했다. 높은 곳에서 무언가를 베풀고자 했을 때는 나도 괴로웠고, 인상을 쓰고 있는 외국인 의사를 대하는 현지인들도 고역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 낮아져 그들 중 하나가 되려 하자 그들의 아픔과 눈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이웃이 돼 고통을 나누자, 그들은 비로소 내 친구이자 제자가 되었다.
1992년부터 지금까지 아프리카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의사 유덕종 /유덕종 제공
세상의 가치는 늘 높아지는 것에 매몰돼 있다. 사람들은 더 좋은 집, 더 높은 지위, 더 많은 권력을 움켜쥐려 한다. 그러나 높아지려는 삶은 필연적으로 과도한 경쟁과 질시, 모함을 동반한다. 성공하면 교만에 빠지고 실패하면 열등감에 괴로워하며 주변 사람들까지 피로하게 만든다. 반면 낮은 곳에 마음을 두는 삶은 여유가 있다.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기에 공포에서 해방된다. 남의 시선에 낭비되던 에너지가 오롯이 내 내면과 주변 사람들의 필요를 향하게 된다. 낮아짐이 주는 첫 번째 축복은 이 ‘자유’에 있다.
또한 낮아지는 삶은 ‘나’를 비워 ‘우리’를 채우는 삶이다. 내 고집과 권위를 내려놓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상대방의 진실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내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타인에게 유익을 주겠다는 마음은 결코 적을 만들지 않는다. 그리고 그 유익은 결국 나에게 다시 돌아온다. 우간다에서 만난 제자가 내 작은 성실함에 감동해 훌륭한 의사가 됐고, 이제 내가 치료할 수 없는 환자들까지 돌보는 것처럼 말이다. 나 역시 그 선순환의 수혜자가 된 셈이다.
마음을 비우는 것은 물잔을 비우는 것과 같다. 마음을 비워야 비로소 새로운 기쁨이 들어올 자리가 생긴다. 아프리카에서 보낸 30여 년 세월이 풍요로웠던 이유는 명확하다. 세속적인 비교의 잣대를 던져버리고, ‘지금 내 앞에 있는 한 사람’의 영혼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마음을 비우면 삶은 투명해지고, 그 투명함 속에서 본질적인 기쁨을 만나게 된다.
‘낮아짐의 행복’을 알게 된 데 감사한다. 하지만 스스로 묻는다. 나는 지금 얼마나 낮아져 있는가? 진정한 낮아짐은 단순히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내 생각을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는 내면의 실력을 갖추는 일이다. 이런 면에서 나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부족함투성이지만, 아프리카에서의 시간들이 제자들과 이웃들에게 작은 울림이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과분한 보상을 받았다. 행복은 수직적 상승에 있지 않고, 수평적 넓어짐과 낮아짐에 있는 것 같다. 오늘 하루, 한 계단 올라가기보다 한 뼘 더 낮아지고 싶다. 낮은 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자유와 살아있음의 기쁨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다.
☞의사 유덕종
1992년 ‘정부 파견 의사’ 1기로 선발돼 우간다로 갔다. 계약을 연장하며 아프리카에 남았고 지금은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의료 봉사를 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길러낸 의사만 4000명. 아산상, JW성천상 등을 받았다. 현지에선 아디스아바바를 줄여 아디스라 부르는데 ‘아디스 레터’는 그곳에서 띄우는 편지다.
2026년 3월 17일 조선일보 유덕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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