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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 뺑뺑이, 현 정부의 대책은 적절한가스크랩된 좋은글들 2026. 5. 9. 08:05일러스트=유현호

작년 10월 14일 오후 8시 22분, 횡단보도를 건너던 60대 여성 A씨가 1t 화물차에 치여 크게 다쳤다. 제때 치료를 받았다면 살 수 있었을 테지만, 경남과 부산 등 25곳에서 환자를 받지 않는 바람에 A씨는 다음 날 새벽 4시쯤,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른바 ‘응급실 뺑뺑이’에 의한 사망. 이 사건이 특별히 화제가 되지 않았던 건 비슷한 일이 워낙 많이 벌어지기 때문. 119 구급대원이 병상이 남아있는 응급실을 찾느라 수십 차례 전화를 하는 건 이제 흔한 광경이다. 의료천국이라는 대한민국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을까?
이에 답하기 전에, 다음 질문을 먼저 해보자. 응급실 뺑뺑이가 다반사로 일어나는 2024년의 대한민국 의사 수는 14만, 인구 1000명당 의사 수는 2.7명이다. 그렇다면 인구 1000명당 의사 수가 2.0명에도 미치지 못했던 2010년 이전에는 응급실 뺑뺑이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지 않았을까? 하지만 인터넷을 뒤져보면 응급실에 못 가서 사망했다는 기사를 과거에는 찾기 힘들다. 왜 그럴까? 응급실 뺑뺑이에 대한 언론의 경각심이 크지 않아서 보도를 안 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당시 응급실 문턱이 지금처럼 높지 않았다는 게 더 정확한 이유일 것이다. 1990년대엔 보호자가 몸이 아픈 환자를 데리고 무작정 응급실에 들어가 의사 진료를 기다리곤 했으니 말이다. 물론 큰 병원 응급실은 늘 미어터졌고 그 안에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하는 사례도 있었겠지만, 응급실에 오는 것을 병원이 막는 일은 적어도 그때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1995년 이후 응급의학과가 생기면서 응급실 환경은 훨씬 나아졌다.
응급실 뺑뺑이가 시작된 건 다음 세 가지 사건 때문이었다. 첫 번째는 의료사고 때 의사가 과실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지 못하면 민형사상 책임을 지게 하는 법원의 판결. 예컨대 2000년 7월 대법원은 심장수술 후유증으로 B군이 숨진 게 “의사 과실 외에 다른 원인이 있을 수 없다”며 병원과 수술의사에게 8300만원을 지급하라는 원심을 확정했다. 환자 사망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수술은 잘됐으나 환자가 죽는 경우도 생기는 의료 현장에서 자기 과실이 없다는 것을 의사가 입증하는 게 가능할까? 하지만 이런 유의 판결은 그 뒤 급격히 늘어났고, 환자 측 승소율도 덩달아 높아짐에 따라 일단 소송하고 보자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된다. 어려운 환자를 받았다가 사망하면 유죄, 설령 무죄가 나와도 몇 년에 걸친 법정싸움을 해야 하게 된 것. 이는 곧 필수과의 기피로 이어졌다.
두 번째는 의사가 여력이 없어서 의무기록지에 경과를 쓰지 못했다고 돈을 물어내게 한 판결이다. 2019년 4월 C씨가 호흡곤란으로 대학병원 응급실에 갔다. 도착하자마자 그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자 의료진은 기관 삽관 후 인공호흡을 유도했지만, 곧 심정지가 발생했다. 의료진의 심폐소생술 덕에 환자는 다시 살아났지만, 그 후 C씨는 저산소성 뇌손상으로 반혼수 상태에 빠졌다. 여기에 의사의 잘못이 있을까. 그런데 법원은 담당 의사가 응급실 접수 이후 15분가량의 진료기록이 없다는 것을 들어 ‘신체기록 관찰에 대한 주의의무 위반’이라며 5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의사들로 하여금 ‘시간적 여유가 없으면 급한 환자는 받지 말자’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세 번째는 해당 과의 전문의가 아닌데 진료를 봤다고 돈을 물어내게 한 판결이다. 2015년 생후 5일 된 신생아가 ‘장 이상회전과 꼬임’ 진단을 받고 응급실에 갔다. 지체하면 장이 괴사하고 사망에 이를 수 있는 응급질환. 그런데 해당 병원에는 소아외과 전문의가 휴가 중이었다. 당직 중이던 외과 교수가 응급수술을 했지만, 해당 질환에 대한 경험부족으로 인해 그 아이는 장의 상당 부분을 잘라내고 발달지연 등 후유장애를 갖게 됐다. 보호자는 15억원의 소송을 냈는데, 1심은 ‘외과의사가 즉시 수술 안 했으면 더 나빠졌을 것’이라며 병원 편을 들어줬지만, 2023년 10월 항소심은 ‘소아외과 전문의가 아닌 당직의사에게 수술을 맡겼다’며 병원 측에 10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로써 병원은 응급실에 배후진료과 전문의가 없으면 환자를 받지 않게 됐다.
그러니까 응급실 뺑뺑이는 지난 십수 년 동안 위 세 가지 일들이 누적돼 빚어진 결과물. 실패로 끝난 지난 정부의 의대 증원은 애초부터 응급실 뺑뺑이의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지적이 많았다. 현 정부가 내놓은, 광역응급의료상황실에서 이송 병원을 결정하는 것도 문제는 있다. 환자를 응급실에 데려만 놓는 게 치료의 끝은 아니니 말이다. 예컨대 영국은 인구 1000명당 의사 수 3.2명에 의대 정원도 우리보다 3배나 많고, 공공의료가 무상으로 제공되므로 원하면 누구나 응급실에 갈 수 있다. 문제는 진료를 받기까지 기다리다 사망하는 환자가 한 해 1만4000명에 달할 정도라는 것. 우리가 영국처럼 했다간 수많은 소송으로 병원이 파산할 테니 그것도 문제다. 미국은 어떨까. 의료보험이 민영화된 탓에 응급실은 한산한 편. 가기만 하면 바로 치료받을 수 있다는 건 좋다. 하지만 간단한 치료만 해도 많게는 수천만원의 진료비가 나오는지라 많은 이들이 제때 응급실에 가지 못하고 병을 키울 수 있다. 가뜩이나 건보 민영화에 예민한 우리나라에선 거론도 하면 안 되는 시스템. 일본을 보자. 이곳은 2차 병원에서 중증으로 판단될 경우 3차 병원 응급실로 이송되는 단계적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가장 그럴듯해 보이지만, ‘빅5’ 선호도가 높은 우리나라에선 적용이 어려운 시스템이다.
현 정부에 고한다. 응급실 시스템이 완벽한 나라는 없다. 즉흥적인 대책으로 응급의료를 더 망가뜨리지 말고, 의료계와 머리를 맞대고 장기적인 대책을 논의하시라. 여기서 더 망가지면, 우리 의료가 더 갈 곳이 없으니까.
2026년 5월 9일 조선일보 서민 단국대 기생충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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