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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 할빈의거 109주년기념식행사모음 2018. 10. 26. 21:49
오늘은 안중근의사님이 1909년 10월 26일 할빈역에서 이등박문을 처단한 한지 109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를 맞이하여 서울남산에 있는 안중근 의사기념관에서는 안중근의사 할빈의거 기념식을 거행했습니다. 그곳에 참석하여 보니 김구기념관, 보훈처장, 광복회장, 국회의원들도 참석하였고 일본인교수들도 참석하였습니다. 아침부터 비가 왔지만 그래도 많은 참석자들로 붐볐다. 저는 안중근 아카데미를 수료하고 안중근의사 홍보대사위촉을 받긴했지만 대사역활을 제대로 하지못해 미안한 마음이다. 조금유식하다는 사람도 안중근하면 생각나는것이 이등박문 저격했다는것외에는 아는것이 없는것 같다. 안중근의사는 장군이시고 교육가시고 사상가라는 것을 온국민이 알아야하겠다. 이를 알리는것이 나의 안중근의사 홍보대사의 적은 책무라는 생각도 해본다.
2018년 10월 26일
安重根 義士님의 약전봉독은 다음과 같이 하셨습니다.
- 1879년 9월2일 황해도 해주부 광석동에서 부친 안태훈과 모친 조성녀(마 리아)의 3남1녀 중 장남으로출생하시다.
- 청소년 시절은 신천군 청계동 조부의 서당에서 한학교육을 받아 깊은 학문 을 이루시고 무예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이시다.
- 1894년 황해도 지역 동학군에 대항 16세의 나이로 부친을 도와 선봉장으 로 용맹을 떨치시다. 이 때, 김홍섭의 따님 김아려와 결혼 슬하에 장녀 현생 (1902) 장남 분도 (1905), 차남 준생 (1907) 등 2남 1녀를 두시다.
- 1897년 빌렘(홍석구) 신부의 세례로 천주교에 입문하시고 서구 문명의 신지식을 익히시다.
- 1905년 을사늑약의 소식을 접하신 안중근 일가는 진남포로 이주하시다.
- 청년 안중근은 인재양성의 시급성을 깨달아 삼흥학교를 설립하고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육영사업에헌신하시다.
- 1907년 항일투쟁을 위하여 러시아로 망명 의군활동을 시작하시다.
- 1908년 러시아에서 발간되는「해조신문J(대동공보)에 인심을 결합하여 국권을 회복하자며「인심결합론」을 발표하시다. 또한, 대한의군을 지휘하여 여러 차례 국내 진공작전을 결행하시다.
- 1909년 2월 러시아 연추에서 동지 11인과「단지 동맹」을 결성하시고<大 . 韓. 獨. 立.>의 네 글자를 피로 쓰시다.
- 1909년 10월 19일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하시어, 10월 20일 이토의 만주 시찰 계획을 확인하시다. 10월 26일 오전 7시경 하얼빈 역에서 이토를 기다리시다. 오전 9시30분, 조선 침탈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 이토를 하얼빈 역두에서 처단하는 위업을 이루시고 러시아 헌병의 체포에 응하시다. 당일 저녁 일본영사관에서 심문을 받으시다.
11월 3일 일제 관동도독부 뤼순감옥에 수감되시다.
11월 6일「안응칠 소회」를 작성하시어 일본관헌에게 넘기시다.
12월 13일 일경의 요구로 자서전『안응칠 역사˩ 집필을 시작하시다.
- 1910년 뤼순감속에서 주변 일인들의 간청으로 친히 이 백 여점의 묵필을 쓰시다.
- 1910년 2월 14일 일제 관동도독부 법원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으시다. 재판시 대한국 의군 참모총장으로서 이토의 15항목에 이르는 죄목을 만천하에 낱낱이 밝히시다. 선고 사흘 후,2월 17일 「동양평화론」저술을 시작하시다. 3월 15일 자서전『안응칠 역사』를 탈고하시다.
- 1910년 3월 26일 뤼순감독에서 만30세의 나이로 순국하시다.
대한국인 안중근 의사는 나라를 위하여 몸 바치는 숭고한 애국정신과 불멸의 동양평화사상을 우리들에게 남기셨다. 민족정기의 화신이며 장군이시며 교육가이며 사상가이신 안중근 의사의 업적은 우리 한민족에게 아시아인에게 전 세계인에게 사랑받고 영원히 빛날 것이다. 이에, 대한민국 정부는 안중근 의사의 업적을 기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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