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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의 시기리아 소개사진및 여행 2019. 2. 26. 22:30
스리랑카의 시기리아 소개
스리랑카를 찾는 수많은 외국 관광객에게 “무엇을 보려고 스리랑카에 오셨나요? 하고 물으면 90%이상이 시기리아를 보기 위해서왔지요” 라고 대답한다고한다. 시기리아는 그 만큼 경이롭고 신비로운 곳이라서 세계 10대 혹은 8대 불가사의에 단골로 선정되곤 한다.
시기리아는 ‘사자의 언덕’ 혹은 ‘사자의 목구멍’ 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먼저 ‘사자의 언덕’ 은 인도어에서 전래된 말로 ‘싱하는 사자, 기리아는 언덕의 합성어이다. ‘사자의 목구멍’ 은 스리랑카 싱할라어에서 유래된 말로 사자를 뜻히는 ‘싱하와 목구멍을 뜻하는 ‘기리’의 합성어이다.
서기 5세기(436년) 스리랑카는 타밀족의 침략으로 수도 아누라다푸라는 힘락 되고 만다. 이후 무려 27년간이나 타밀민족의 지배를 받으며 싱할라 왕조는 붕괴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혼란기에 ‘다투세나’ 라는 위인이 나타나 타밀 세력을 밀어내고 아누라다푸라를 수복시킨다.
그는 왕으로 등극하여 싱할라 왕조를 계승하였는데 그에겐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고 한다. 첫째 부인은 왕이 되기 전의 부인으로 그저 평범한 신분의 여인이었고, 다른 부인은 왕이 된 후 결혼한 왕족 출신의 부인이었다. 두 부인 사이에 각기 한명씩의 아들이 있었는데 평범한 부인으로 부터는 ‘카사파’ 왕자를 얻었고 왕족 부인으로부터는 ‘목갈라냐’ 왕자를 얻었다. 이복형재로 태어난 이들은 서로 성격이 확연히 달라 형 카사파는 호전적이며 성격이 급했고 동생 목갈라냐는 논리적이고 차분했다.
세월이 흘러 다투세나 왕이 늙어감에 따라 왕위 계승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런데 싱할라 전통으로는 당연히 장자인 카샤파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순리지만 다투세나 왕의 마음에는 둘째 목갈라냐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늘 천한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것에 대해 열등의식을 갖고 있던 카사파 왕지는 이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자 흥분을 감추지를 못하고 급히 지지 세력을 규합하여 쿠데티를 감행하였다.
그는 먼저 부왕인 아버지를 죽이려고 왕궁을 급습하여 왕을 지키는 호위 군사를 제압한 후 왕을 찾아내었다. 그리고는 칼을 들이대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왕이시여, 이제 왕위를 제게 물려주시고 부왕이 갖고 계신 전 재산을 저에게 주시지요" 그러자 부왕은 “넌 어찌 나의 이들로서 이런 패륜을 저지를 수있느냐? 왕의 자리는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비를 베풀수 있는 자에게 돌아가는 자리니라. 아울러 내가 가진 재산이라고는 이 나라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 저 저수지뿐이니라’
부왕의 말을 들은 카사파는 더욱 흥분하여 결국 아버지를 죽이는 패륜을 저질렀다. 그는 동생 목갈라냐를 죽이러 갔지만 이복동생은 이미 왕궁을 빠져나가 바다를 건너 남인도로 탈출해버렸다. 이러한 쿠데타로 옥좌에 오른 카사파는 이후 심각한 정신 분열에 시달리기 시작하였다. 불안하여 잠을 제대로 잘 수도 없었고 음식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이렇게 되자 그는 그 누구도 믿으려 하지 않으면서 점차 사람을 만나는 것도 피하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상황을 탈피하고자 고민 끝에 그 누구도 침범 할 수 없는 철옹성 왕궁을 건설하려 마음먹고 부하들을 시켜 이러한 조건을 가진 요새를 찾으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던 중 오랜 세월 승려들의 수행 장소로 쓰고 있던 바위 요새를 찾아내었다.
정글 한가운데 377m나 우뚝 솟아있는 이 바위요새는 마치 사자가 웅크리고 있는 모습으로 만약 산 위에 성을 세운다면 그 누구도 침범하지 못 할 것이라 생각하여 서기483년 축성을 시작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수행 중이던 승려들을 모두 쫓아내고 성 밖으로는 악어를 키우는 해자를 만들고 안으로는 ‘물의 정원’을 조성하였다. 또 바위산 곳곳에 돌 기뢰를 설치하여 외부 침입을 대비한 ‘돌의 정원’ 과 ‘테라스 정원’ 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정상으로 오르는 길목에는 스핑크스 같이 생긴 사자상를 조성하고 그 목구멍으로 사람이 다니는 통로를 만들었다. 예술가이며 정신 이상자이기도 했던 카샤파 왕은 바위산 정싱에 수영장 연회장을 갖춘 화려한 궁전을 완성하였다.
카샤파가 시기리아로 천도한지 어느덧 14년이 흐른 497년, 철옹성에서 안전하게 영원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던 그에게도 종말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남인도로 도망간 이복 동생 목갈랴나는 타밀로부터 원군을 지원받아 형이 다스리는 스리랑카로 진격해 오고 있었다.
동생은 장기전을 대비해 시기리아 성으로 들어가는 모든 급수를 차단했다. 물이 고갈되어 더 이상 견딜 수 없던 카시파는 남은 군대를 정비하고 성에서 내려와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였다. 코끼리를 타고 전투를 벌였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카샤파가 타고 있던 코끼리 발목이 바위틈에 끼게 되면서 키시피기 앞으로 고꾸라지며 땅위로 떨어졌다. 그렇게 되자 카샤파는 목갈랴냐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파란만장한 비극적인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 후 동생 목갈랴나는 아누라다푸라로 수도를 다시 옮기고 시기리아를 승려들의 수행 장소로 돌려주었다.
그후 역사 속에서 사라졌던 시기리아는 1898년 영국군장교이자 고고학자에 의해 발견되면서 1,400년 만에 세싱에 모습을 드러냈다. 시기리아는 현재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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