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받았던 높은 지지는 한편으로 굉장히 두려운 일입니다. 그냥 어깨가 많이 무거워졌다는 정도의 두려움이 아니라 정말 등골이 서늘해지는, 등에서 식은땀이 나는, 그런 두려움이라 생각합니다. … 높은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면 기대는 금세 실망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2018년 6·13지방선거에서 집권당 압승 뒤 문재인 대통령 발언은 감동이었다. 대선 2라운드처럼 치러진 선거에서 대승을 했는데도 등에서 식은땀이 난다고 했다. 그러고는 너무나 겸손한 모습으로 수석·보좌관들에게 세 가지를 주문했다. 유능함과 도덕성, 그리고 국민들과 별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는 태도.
그 자리에 있던 민정수석 조국, ‘흑석선생’ 청와대 대변인 김의겸이 ‘나는 빼고’라고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유능하지도, 도덕적이지도 못하면서 내로남불의 태도만 유별났던 집권세력은 2020년 4·15총선에서 또 압승을 거뒀다. 다음 날 문 대통령의 입장문은 2018년과 딴판이었다. “국민을 믿고 담대하게 나아가겠습니다.”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뒤 제21대 국회의원선거에 비례대표로 출마했으나 흑석동 부동산 투기 논란에 휩싸이며 사퇴한 김의겸 현 열린민주당 국회의원. 같은 당 김진애 전 의원이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를 선언하며 의원직을 사퇴하면서 그 자리를 승계받았다.
● 부동산정책-윤석열 논란 전부터 지지층 균열
대깨문의 극성맞은 지지에 취한 그들은 몰랐을 것이다. 180석의 바닥민심을 들여다보면 지지층 균열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2020총선 득표율은 의석수와 비례하지 않았다. 선거구당 1석만 뽑는 소선거구제여서 압승이 가능했지 더불어민주당(49.9%)과 국민의힘(당시 미래통합당 41.4%) 득표율 격차는 9%포인트에 불과했다. 득표수로 보면 제1당(1430만여 표)과 제2당(1186만여 표)의 격차가 244만1623표다. 대선과 비하면 300만 표 이상 표가 사라진 거다.
2018지방선거 때 630만 표라는 1, 2위당 격차는 ‘진보성향+중도성향+대통령 탄핵으로 돌아선 보수성향 이탈층’ 덕분이다. 이 중 중도층과 보수성향 이탈층이 2020년 총선에서 떨어져 나오기 시작했다고 정한울 한국리서치 전문위원은 분석했다. 부동산정책과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놓고 집권세력이 추태를 보이기 전부터 이미 여권 지지층은 깨지고 있었다는 얘기다(‘대깨문 탈출은 지능순’이라는 살벌한 농담도 있긴 하다).
● “문 대통령 탈당하라” 주장도 나올 것
4·7보궐선거에서 국민의힘 오세훈 서울시장, 박형준 부산시장이 압도적 격차로 당선됐다. 집권세력의 패배요인을 꼽자면 101가지로도 모자란다. 국민의힘이 잘해서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되, 집권세력에선 “180석을 가지고도 제대로 개혁을 못 해서 졌다”는 친문 강경파와 “중도층을 못 잡아서 졌다”는 나머지파가 격하게 맞붙고 있다.
4.7 보궐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에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한 오세훈 서울시장과 박형준 부산시장.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층은 이미 충분히 결집해 1번을 찍었다. 총선 때 1번을 찍었던 중도층이 떨어져 나왔다는 이 분명한 현상이 그들에게는 안 보인다는 게 기이할 따름이다. 이것도 모르는지 모르는 척하는지, 문 대통령이 대깨문만 믿고 담대하게 계속 갈 경우 민주당은 초조할 수밖에 없다. 지지율 32%의 문 대통령은 영락없는 레임덕에 들어섰지만 21대 국회는 3년이나 남아 있어서다.
8일 민주당은 지도부 총사퇴에 비상대책위원회 돌입이라는 대안을 내놨다. 그러나 대깨문 눈치나 보는 친문 비대위가 들어선다면 지금까지와 달라질 게 없다. 당명에서 ‘더불어’를 떼내고 정통 민주당으로 돌아갈 경우엔 차원이 달라진다. 2022년 대선을 위해 “문 대통령 탈당하라” 요구할 가능성도 크다. 문 대통령과 민주당의 이해관계는 다르기 때문이다.
● 文은 변하지 않는다… 이 길이 전부니까
문 대통령은 8일 “국민의 질책을 엄중히 받아들인다”고 밝히긴 했다. 그러나 부동산투기가 의심스러운 LH 직원들 잡아넣는 것 말고 문 정권이 성과를 낼 수 있는 건 없다. 안 들여온 해외 백신을 가짜로 만들어 코로나 극복을 할 수도 없고, 4년간 망친 경제를 별안간 살릴 수도 없다. 북한 김정은이나 중국공산당 총서기 시진핑이 문 대통령을 덥석 만나줘 한반도를 국뽕의 도가니로 만들면 또 모른다. 이 정권의 실력을 빤히 아는 그들이 문 대통령 좋으라고 나서줄 것 같지도 않다.
8일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이 4.7 보궐선거 결과에 대해 “국민의 질책을 엄중히 받아들인다”고 밝힌 문재인 대통령의 입장을 전한 뒤 고개를 숙이고 있다.
국정기조를 바꿀 리도 없다. 아는 건 이 길이 전부여서다. 문 대통령이 국가적 문제 해결에 관심이 있는지도 알 수 없다. 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퇴임 뒤 평안한 노후 보장이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검수완박(검찰수사권 완전박탈)이 시급하다. 국민의힘의 약을 올려 정쟁에 빠져들게 만들어서 나쁠 것도 없다. 국민의 정신만 괴롭히다 2022년 대선에서 민주당이 승리하면 문 대통령으로선 다행이다. 안 돼도 나쁠 것도 없다. 고분고분한 김진욱을 공수처장으로 앉혀놓은 이유다. 이렇게 되면 더불어민주당이든, 그냥 민주당이든 2024년 총선에서 또 이번 같은 대패를 당할 공산이 크다.
● 민주당이 대한민국 중심정당 되는 길
문 대통령+문파와 민주당의 운명이 반드시 같이 가야 할 이유는 없다. 문 대통령은 5년 단임이지만 민주당은 앞으로 천년만년을 가야 할, 국민의 세금으로 움직이는 대한민국 정당이기 때문이다.
민주당 지도부는 4.7 보궐선거 참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선거 다음날인 8일 총사퇴했다.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대표 직무대행(가운데)이 국회에서 기자들에게 사퇴 방침을 밝히고 있다.
민주당이 대깨문의 볼모 신세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는 기실 답이 나와 있다. 2018년 지방선거 대승 뒤 민주당의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은 ‘지속가능한 중심정당을 위하여’라는 보고서를 내놨다. 1.5당 체제로 장기집권하는 일본 자민당처럼, 민주당도 고정 지지층과 부동층의 압도적 지지뿐 아니라 경쟁정당 지지층의 상당한 지지를 받는 ‘중심정당’으로 전환하고 있다는 거다.
5년 대통령 임기, 10년 정권교체 주기를 넘어 30년 주기의 시대교체 정당으로 굳히려면 민주당이 ‘북핵문제 해결과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문 정권 어젠다에 골몰해선 안 된다고 보고서는 강조했다. 저출산·고령화, 일자리 같은 생활인의 절박한 민생문제 해결을 위해 협치를 해야 한다고 절절하게 지적했었다. 과거 열린우리당처럼 대통령과 더불어 운명을 함께 하는 정당은 정말이지, 다시 보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