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 외국 도움 절실한 나라로 전락
美주도 세계, 안보·경제·백신 한 묶음
냉엄한 국제정치 현실에 눈감은 文
이제 安美經中 줄타기 외교는 없다
꼰대라고 해도 할 수 없다. C레이션을 아십니까? ‘라테(우리 어릴 때)’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C레이션이나 PX식품을 맛보는 날은 입이 호강하는 날이었다. 밀가루 범벅이 아닌 진짜 소시지, 처음 맛보는 땅콩버터, 노란 가루 탄 물이 아닌 진짜 오렌지 주스…. C레이션이란 게 고작 미군의 전투식량이었지만, 이런 걸 먹어볼 수 있는 사람도 기회도 많지 않았다.
그땐 그랬다. 좋은 건 다 미제(美製)였던 시절. 다른 나라, 특히 미국의 원조와 협력 없이는 국가를 경영해 나갈 수 없는 나라 대한민국이었다. 불현듯 이렇게 꿀꿀한 기억이 소환된 건 이스라엘에서 남는 코로나19 ‘아재(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 1000만 회분을 들여오자는 야당의 제안을 접한 뒤였다. 우리가 어쩌다 다시 외국의 잉여물자를 구하는 처지가 됐나.
야당만 그런 게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국민의힘 제안에 앞서 러시아 스푸트니크V 백신의 도입 가능성을 점검해보라고 지시했다. 얼마나 다급하면 2등(AZ)도 아닌 3등 백신 도입을 검토했을까. ‘백신 확보는 충분하다’고 아무리 떠들어도 꼴찌 수준의 국민 접종률, 툭하면 중단되는 접종의 차질, 무엇보다 명확히 밝히지 않는 도입과 접종 일정 탓에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근 수십 년간 이렇게 외국의 도움을 절실하게 바란 적이 있었을까.
그래도 국민들이 꾸준히 참아내는 건 공포 때문이다.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격리 공포는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과 회사에 폐를 끼칠 거란 공포도 그에 못지않게 크다. 사생활까지 탈탈 털릴 거란 공포는 보너스다. 하지만 참는 데도 한도가 있다. 백신 기근은 언젠가는 해소되겠지만, 이런 개고생을 시켜놓고 그때 가서 또 야당과 언론이 호들갑을 떨었다는 둥 남 탓을 하지는 말길 바란다.
그런데 요즘 돌아가는 이치를 보니, 백신 문제를 백신만으로 풀 수 없는 세상이 됐다. 백신 종주국 미국의 우선 공급순위는 캐나다 멕시코 같은 인접국 다음에 대중(對中) 안보협력체인 쿼드(Quad·미국 일본 호주 인도) 회원국이다. 명색이 동맹인 한국은 우선 공급 대상이 아니다.
벌써 미국은 미중 패권 경쟁의 전선을 기술패권 전쟁으로 확대했다. 백악관이 직접 글로벌 반도체 패권 장악을 위한 전략회의를 주재해 우방을 ‘반도체 동맹’으로 묶으려 한다. 이런 동맹 네트워크 안에 확실히 편입된 나라부터 백신을 공급하겠다는 거다. 안보와 경제, 백신이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묶음이 된 셈이다.
따라서 이제 한국 정부 일각에서 내세웠던 ‘안미경중(安美經中·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은 없다. 안보와 경제를 분리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대중국 경제의존도가 높은 한국으로선 난감한 일이나, 일극(一極) 슈퍼파워 미국이 그렇게 세계의 판을 짠 이상 따르지 않을 방도가 없다. 다시 말하지만, 이제 미중(美中) 사이 줄타기 외교나 ‘전략적 모호성’은 물 건너갔다.
애석하게도 이렇게 냉엄한 국제정치의 현실을 모르는 분이 우리의 국가 지도자다. 아니, 알면서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은 아닌가. 그러니 “(국제사회가) 국경 봉쇄와 백신 수출 통제, 사재기 등으로 각자도생에 나서고 있다”며 미국을 우회 비판하는 발언까지 한다. 백신이 없으면 받아올 생각을 해야지, 때린다고 백신이 나오나. 운동권 대학생이면 몰라도 나라의 리더가 입에 올릴 말은 아니다.
문 대통령은 또 판문점선언 3주년을 맞아서는 “판문점선언은 누구도 훼손할 수 없는 평화의 이정표”라고 했다.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판문점선언, 그것도 핵·미사일 무력 증강과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등으로 가장 크게 망가뜨린 사람이 김정은인 터에 누구도 훼손할 수 없다니…. 대통령의 정신세계가 놀랍다. 누구든 희망에 집착하면 현실을 못 본다.
문재인 정권 4년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대한민국 70년 번영 엔진을 걷어차는 일의 연속. 그 엔진이 무언지는 자명하다. 바로 한미동맹과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다. 고작 5년짜리 정권이 이를 걷어차는 건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역사에 대한 반역에 가깝다.
그런 반역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귀결될지도 분명하다. 북한에 대한 굴종, 중국에 대한 신(新)조공국가화, 중남미 3류국가로의 추락이다. 문 정권 4년, ‘한 번도 경험 못한 나라’는 이미 충분히 목도했다. 내년 3월 ‘두 번 경험해선 안 될 나라’가 우리 앞에 펼쳐지는 건 막아야 한다.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