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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전 대통령에게 길을 묻다.낙서장 2016. 6. 16. 19:00
박정희전 대통령에게 길을 묻다.
내년이면 박정희 전 대통령이 탄생 100주년이 된다. 박정희 전대통령은 1917년 11월 14일 경상북도 구미에서 태어났다.
요새처럼 우리주변이 어렵고 정치적으로도 어려울 때면 해결책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이럴 때 해결책을 마련해보고자 박정희 대통령이라면 지금 어떻게 대체할까 박정희에게 길을 묻는다 라는 학술세미나를 서울시청옆 프레스센터에서 개최한다기에 그곳을 다녀왔다.
공교롭게 어제 신당동 박정희가옥에서 찾아오는 방문객에게 전시해설봉사를 2시에 마치고 서둘러 그곳에 도착하니 이미 30분정도가 지났다. 강연 출연자들이 파워포인트로 설명하는 것을 카메라로 일부를 촬영하여 메모했다. 집에 돌아와 그 내요을 보고 두서없이 정리한 것이다.
박정희를 연구하고 출연한 연사들은 박정희가 정치가냐 혁명가냐 대해서는 구테타를 이르켰지만 역사적으로 평가해볼 때 혁명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했다.
혁명가는 기존의 사회 체제를 거부하고 법이나 사회제도 경제조직 따위를 급하게 바꾸기 위해 활동하는 사람인반면에 정치가는 나라를 다스리고 국민의 의견을 조정하여 사회를 유지 보존시키는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이다.
또한 정치가는 민의를 존중 그로로부터 파생되는 지지(투표의 승리)를 토대로 통치의 정당성을 인정받음에 반하여 혁명가는 혁명을 통해 급격하게 바꾼 법이나 사회제도 경제조직을 통해 얻어진 결과를 가지고 평가를 받기에 박정희는 혁명가로 봐야한다고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그의 저서 대중경제론에서 경제정책을 국내시장을 무대로 하고 대기업이 아니라 농업과 중소기업을 우선발전시켜 농민과 서민 자영자에게 혜택을 돌아가게 하자는 대중경제론을 주장했지만 박정희는 수출주도형으로 경제를 발전시켜야한다고 했다.
박정희 전대통령은 대부분의 신생독립국가들이 수입대체산업으로 대외의존도를 높이는 정책을 수립추진했지만 박정희는 제1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수립과정에서 수입대체산업건설를 포기하고 수출 주도형공업화로 전략을 수정했다.
구테타와 혁명에 대한 견해에 대해서는 군인이 무력을 동원하여 정당한 선거를 통해 선출된 합법적 정부를 무너트리고 헌정질서를 파괴하든가 군인들이 권력에 사로잡혀 권력을 찬탈했다면 구테타라고 생각하며 초법적 수단을 통해 정권을 장악했다하더라도 그후 경제부흥을 일으켜 국민을 절대빈곤에서 해결시켰다면 혁명이라 할수있다고 했다. 혁명당시 대부분 정치인, 지식인,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신이라 부리짖을 때 박정희에게 살기위한 밥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신성물로 생각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성과를 보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세정개혁을 했다. 그는 세무의 부조리는 국민의 재산권을 침해할 뿐만 아니라 정부에 대한 불신 이라 생각하여 견금여석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 박대통령이 이낙선 국세창장에게 써주었던 글도 그러한 의지가 보여진다.
그당시 정치인, 학생들이 강력하게 반대하던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추진했다. 그리하여 일본정부는 한국정부에 경제협력자금명분으로 무상 3억달라,유상 2억달라와 공공차관합의를 이루어냈다. 그 청구권자금으로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소양강 다목적땜의 건설자금, 원자제 도입과 각급학교의 실험실자재구입에 사용했다. 실제로 대일청구권 자금 8억원을 확보하여 포항제철건설에 무상3억달라중 3080달라(10.8%)와 무상 2억달라중 8,868만달라(44.3%)를 투입했고 경부고속도로건설과 소양강 땜건설에 소요되는 2161만 3000달라 전액 청구권자금으로 충당했다.
새마을 운동을 전개하여 그는 스스로 돕는자를 우선지원한다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새마을 지도자들과 대화에서 농어촌을 근대화하기 위하여는 가장 급한 것이 전기 공급이라면서 전기도 의욕적으로 일하는데 주면 전기가설에 소요되는 예산의 몇배의 효과를 볼수가 있지만 그렇지않은곳에 전기를 공급하여준다면 전기불밑에서 화토를 하거나 놀음, 쓸때없는짓을 하여 한다며 말했다. 그결과 농어촌에 전기공급을 위한 전화사업은 64년 10%였던 것을 68년에는 농어촌 전화사업을 성공리에 마쳤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구테타는 학자들은 1923년 케말 파샤의 구테타, 1952년 낫세르의 구테타, 1961년 박정희 구테타 등 3개를 언급한다. 이중 케말파샤와 낫세르의 구테타는 왕정정부, 공화정에는 성공했지만 산업화에는 실패했으나 박정희 구테타는 국가 개조, 산업화성공차원에서 볼 때 역사상 가장 성공한 구테타이다.
니콜라 크리스토프는 박정희 정권은 민주화운동억압은 했지만 경제발전을 통해 한국다원주의근간이 되는 중산층을 창출함으로서 한ㄱ국민주주의에 크게 기여했다고 했으며 예일대학교의 폴케네디 교수는 세계에서 최빈국 나라중 하나였던 한국이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을 시작으로 불과 20년만에 세계적인 무역국가로 된 것이 경이롭다고 평했다.
2016년 6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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