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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산책도 하고 안중근의사 기념관도 돌아보고낙서장 2022. 3. 16. 17:31
이제 봄날씨인듯 제법 따뜻한 봄기운을 느낀다. 남산은 어떨가 하는 호기심에 산책을 하려고 간단한 등산차림으로 남산을 찾아 걸으려했다. 국립극장앞에서 동대입구역에서 하차하여 님산입구 국립극장입구를 지나 남산 북측 산책로를 따라 안중근 의사 기념관까지 걸어갔다. 기념관을 관람하였다. 안중근의사에 대해 간략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독립운동의 영원한 상징 안중근은 처음에는 계몽운동을 펼치다가 1907년 국외로 망명하고 의병을 일으켜 항일주쟁을 전개하였으며 1909년 한국침략의 원융이자 동양평화의 파괴자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하면서 민족과 인류이 구원앞에 자신을 산화시켜간 의사이다.
1897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안중근은 문명 개화론자인 아버지 안태훈의 영향아래 어린시절을 황해도 신천의 청계동 사골마을에서 학문을 수학하고 무술 연마에 힘을 기울이며 성장했다. 1894년 동학 농민 전쟁 때에는 동학군의 공격으로부터 청계동을 지키는데 선봉으로 활약했으며, 1897년 프랑스 빌렘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천주교에 입문했다. 전도활동을 벌이던 무렵 그는 한국인의 지식계발을 위해 대학 설립을 계획하기도 했다.
러일전쟁이 끝날 무렵 안중근은 아버지 안태훈과 상의하여 중국 산동이나 상하이로 가족을 옮겨놓고 항일투쟁을 전개하겠다는 게획을 세웠으나, 국내에서 계몽운동을 펼치기로 계획을 바꿨다. 1906년 봄, 진남포에서 삼흥핚교와 동의학교를 통해 민족 교육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07년 광무황제의 강제 퇴위, 군대해산등 나라가 위기를 맞자 국외망명을 단행하였다. 북간도를 거쳐 연해주로 망명한 그는 각마을을 돌며 의병모집을 위해 힘을 쏟아 의볍부대를 창설했다. 그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국내진입 작전을 전개하여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의병활동을 지속하기 어려운 환경속에서 1909년초 단지동맹을 맺고 의병재기의 의지를 다져나갔다. 그런던 중 이토히로부미가 하얼빈을 찾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1909녀 10월 26일, 의거를 결행하니 안중근의사의 하얼빈의거가 그것이다. 안중근의거는 이토히로부미와의개인적 원한이 아니라 한국독립, 동양평화를 위해 거행한 의거였다. 또한 안중근은 해외망명이래 만주, 연해주일대에서 끊임없이 구국운동을 전개하면서 독립운동의 철학을 정립할수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동양평화론’ 이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동서양을 떠나 국가와 민족간의 전쟁과 분쟁의 원인을 제거하자는 것으로 인종주의 에 매몰되거나 세계평화사상과 대치되는 것이 아니었다. 안중근은 한국의 의사만이 아닌 동양과 세계의 의사였다.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외롭게 동양평화를 지켜내고자 했던 안중근의사는 시대를 앞서간 서각지이자 진정한 평화주의 자였다.
안중근 기념관을 나와 팔각정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한양 도성길을 따라 국립극장쪽으로 내려와 동대입구역까지 걸어와서 집으로 돌아왔다.
2022년 3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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