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사가 1910년 10월 26일 할빈역에서 이등박문을 저격하여 살해하고 다음해 3월 26일 여순감옥소에서 순국하셨다. 안중근의사는 한국독립운동의 영원한 상징 안중근은 처음에는 계몽운동을 펼치다가 1907년 국외로 망명하고 의병을 일으켜 항일주쟁을 전개하였으며 1909년 한국침략의 원융이자 동양평화의 파괴자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하면서 민족과 인류이 구원앞에 자신을 산화시켜간 의사이다.
1897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안중근은 문명 개화론자인 아버지 안태훈의 영향아래 어린시절을 황해도 신천의 청계동 사골마을에서 학문을 수학하고 무술 연마에 힘을 기울이며 성장했다. 1894년 동학 농민 전쟁 때에는 동학군의 공격으로부터 청계동을 지키는데 선봉으로 활약했으며, 1897년 프랑스 빌렘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천주교에 입문했다. 전도활동을 벌이던 무렵 그는 한국인의 지식계발을 위해 대학 설립을 계획하기도 했다.
러일전쟁이 끝날 무렵 안중근은 아버지 안태훈과 상의하여 중국 산동이나 상하이로 가족을 옮겨놓고 항일투쟁을 전개하겠다는 게획을 세웠으나, 국내에서 계몽운동을 펼치기로 계획을 바꿨다. 1906년 봄, 진남포에서 삼흥핚교와 동의학교를 통해 민족 교육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07년 광무황제의 강제 퇴위, 군대해산등 나라가 위기를 맞자 국외망명을 단행하였다. 북간도를 거쳐 연해주로 망명한 그는 각마을을 돌며 의병모집을 위해 힘을 쏟아 의볍부대를 창설했다. 그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국내진입 작전을 전개하여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의병활동을 지속하기 어려운 환경속에서 1909년초 단지동맹을 맺고 의병재기의 의지를 다져나갔다. 그런던 중 이토히로부미가 하얼빈을 찾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1909녀 10월 26일, 의거를 결행하니 안중근의사의 하얼빈의거가 그것이다. 안중근의거는 이토히로부미와의개인적 원한이 아니라 한국독립, 동양평화를 위해 거행한 의거였다. 또한 안중근은 해외망명이래 만주, 연해주일대에서 끊임없이 구국운동을 전개하면서 독립운동의 철학을 정립할수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동양평화론’ 이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동서양을 떠나 국가와 민족간의 전쟁과 분쟁의 원인을 제거하자는 것으로 인종주의 에 매몰되거나 세계평화사상과 대치되는 것이 아니었다. 안중근은 한국의 의사만이 아닌 동양과 세계의 의사였다.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외롭게 동양평화를 지켜내고자 했던 안중근의사는 시대를 앞서간 서각지이자 진정한 평화주의 자였다.
우리는 안중근의사가 실천했던 하늘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했던 3애정신을 본받아 국건한 안보태새, 경제적을 풍요로움과 서로 서로 사랑하는 평화정신을 계승해야할것이라 생각해본다.
2022년 3월 26일
안중근의사 약전
大韓國人安重根義士는우리 민족의 위대한 영웅이시며 민족정기의 표상이시다
安重根義士가후대에 남긴 위국헌신의 정신과 불멸의 평화사상은 천추에 빛날 것이다
1879.09.02. 황해도해주에서 부친 안태훈과 모친 조성녀(마리아)의3남 1 녀 중 장남으로 으로출생
1884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으로 이주, 조부의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말 타기 와 사냥을 즐김
1894 황해도 지역 동학군에 대항, 16세의 나이로 부친을 도와 선봉장으로 활동
김아려와 결혼, 슬하어12남 1 녀를 둠
1897 천주교에 입교, 빌램(홍석구)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서양문화와 신지식을 익힘
1898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대학설립을 구상하여 뭐델주교에게 건의
1905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항일독립운동 기지 마련을 위해 중국 상하이 방문
1906 진남포로 이주, 삼흥학교를 설립하고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교육 구국운동 전개
1907 국채보상운동에 참여,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으로 활동
1908 연해주에서 발간되는「해조신문」어1 r인심결합론」 발표
동의회(총장 : 최재형) 평의원으로 참가, 대한의군을 지휘하여 국내 진공작 전 전개
1909.02. 연해주 연추에서 동지 11 인과「단지동맹」을 결성, 왼쪽 무명지를 잘라 그 선혈로 〈大韓獨立〉이라 쓰고 일제에 대한 결사항전 맹세
1909.10.26. 만주 하얼빈 역두에서 효팩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여, 한민 족의 義氣를 세계만방에 딸침
1909.11.03. 일제 관동도독부 뤼순감옥에 수감
1909.11.06. "안응칠 소회"작성
1909.12.13. 자서전 「안응칠역사」 집필 (1910.3.15 탈고)
1910.02.07. 공판시작, 재판과정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15개 죄목을 밝히고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한 의거였음을 당당히 주장하면서 치열한 법정투쟁
전개
1910.02.14. 일제 관동도독부 법원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음
1910.02.~03. "동양평화론"저술, 安義士의義氣와삶의 자세를 보여주는 유묵 200여 점 남김
1910.03.26. 뤼순감옥에서 만31세의 나이로 순국
1962.03.01. 건국흔장대한민국장 추서
최후의 유언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힐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옮겨 묻어다오.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국권회복을 위해 힘을쓸 것이다.너희들은 고국으로 돌아가거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의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하고 합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당부해다오 대한 독립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을 부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