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정부가 임명한 균형발전위원장 정권 바뀌었는데도 사퇴 거부 美, 대통령이 임명한 정무직은 새 정부 출범과 동시에 임기 만료
전 정권에서 임명된 정치권 출신 공공기관장들이 물러나지 않아 새 정부의 국정 운영에 부담을 주는 이른바 ‘알박기 인사’ 실태를 고발한 본지 기사(6월 9일 자)가 나간 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참여했던 한 교수로부터 연락이 왔다. “더 황당한 사례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제보한 사례는 대통령 자문기구인 국가균형발전위원회(균발위)였다. 명칭 그대로 국가균형발전을 위한 주요 정책을 대통령에게 자문하는 기구다. 위원장은 관련 법률에 따라 임기가 정해져있지만, 자신을 임명한 대통령이 퇴임하면 함께 물러나는 것이 그동안의 관행이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 때 임명된 김사열 위원장은 내년 8월까지인 임기를 채우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경북대 교수 출신인 김 위원장은 2018년 대구 교육감 선거에 진보 후보로 출마했다가 떨어진 적이 있고, 지난해에는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한 이낙연 전 대표의 후원회장을 지냈다. 제보한 교수는 “누가 봐도 윤석열 정부의 국정 철학과는 맞지 않는 인물인데 물러나지 않고 버티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다.
김 위원장의 버티기로 발생하는 피해는 고스란히 새 정부 몫이 됐다. 새 정부는 국가균형발전론의 원조(元祖)격으로 노무현 정부에서 행정수도 이전을 주도했던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에게 균발위를 맡길 예정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현 위원장의 사퇴 거부로 기존 균발위 조직과 예산을 활용할 수 없게 됐다. 결국 기존 균발위는 그대로 둔 채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이게 무슨 낭비인가.
물론 22개나 되는 대통령 자문위원회가 모두 같은 상황은 아니다. 탈(脫)원전에 앞장섰던 탄소중립위원회 윤순진 위원장은 대선이 끝난 뒤 “차기 대통령이 위원장을 임명하는 것이 적절하다”며 사의를 표명했다. 하지만 본인이 자발적으로 물러나지 않을 경우 대통령이 자문위원장을 교체할 수 없다는 것이 현 제도의 맹점이다.
우리나라처럼 대통령제를 운영하는 미국은 정권 교체 때 알박기 인사를 예방하는 제도적 장치를 운영하고 있다. 미국에선 ‘버로잉(burrowing·땅굴 파기)’이라 부르는 알박기 인사를 막기 위해 대선이 있는 4년마다 상원과 하원이 번갈아 ‘미국 정부 정책 및 지원 직책(The United States Government Policy and Supporting Positions)’이란 보고서를 낸다. 표지가 자두색이어서 플럼북(Plum Book)이란 별칭이 붙은 이 보고서에는 대통령 임기가 끝나면 옷을 벗어야 하는 ‘어공(political appointee·정무직 공무원)’ 자리와 연봉 등이 망라돼있다. 2020년 대선 때 작성된 플럼북에는 어공 자리가 7935개였다.
미국에서도 정권과 운명을 같이하는 정무직이 정년 보장을 받는 ‘늘공(직업 공무원·career civil servant)’으로 신분을 전환할 수 있는 길은 열려 있다. 하지만 연방인사관리처(OPM)의 엄격한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게다가 OPM은 이렇게 신분 전환한 공무원 명단을 매년 의회에 보고한다. 대선이 있는 해에는 정권 말 알박기가 심해질 것을 우려해 분기별로 보고서를 낸다.
역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됐던 알박기 인사 논란은 앞으로 더 증폭될 가능성이 높다. 전 정권 때 임명됐던 공공기관장들에게 사표를 강요한 혐의로 김은경 전 장관이 징역 2년의 실형을 받은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 이후 누구도 물갈이를 위해 총대를 메고 나서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야가 입장이 바뀔 때마다 상대방을 손가락질하는 내로남불 코미디를 반복할 것이 아니라 미국처럼 제도적 예방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2022년 6월 17일 조선일보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