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개혁하겠다는 대통령 “초당적 국민 합의 도출 바란다”
누가, 언제, 어떻게 설명은 없어… 일하는 사람도, 절박감도 안 보여
국민연금을 만든 건 전두환 정권이었다. 정작 대통령은 뜻이 없었다. 서상목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한국개발연구원(KDI) 부원장 시절 국민연금 안(案)을 대통령한테 보고했다가 ‘나라 망하게 하려느냐’는 질책만 듣고 물러섰다고 한다. 장기적으로 국민 모두에 이익이 된다 해도, 돈 받을 날은 요원한데 당장 자기 주머니에서 납부금을 떼가는 연금 제도가 정치적으로는 큰 모험일 수밖에 없었다.
관료들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건강보험이 본궤도에 오른 상황에서 복지국가로 가는 또 다른 한 축인 국민연금을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10여 년 전 국민연금 제도를 기안했다가 석유 파동 때문에 접어야 했던 김만제 당시 경제부총리가 구원투수로 나섰다. 1986년 유럽 순방 후 돌아오던 비행기 안에서 대통령에게 국민연금 안을 또 다시 내민 것이다. 취임 후 6년이 지나고서야 유럽 주요국을 순방하며 정통성을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들떠 있던 전 대통령은 “참 질긴 사람들”이라고 웃으며 결재했다.
적립금 910조원이 넘는 세계 유수의 연금은 이렇게 시작됐다. 처음 ‘세금 더 받아내려는 수작’ ‘결국 파산할 것’이라던 부정적 인식은 이제 ‘이 좋은 제도를 왜 반대했을까’로 바뀌었다. 정부 관료의 전문성과 치밀한 준비, 반드시 이뤄내겠다는 집념, 리더의 결단이 바탕에 있었다.
지금은 위기에 처한 국민연금을 구해내야 한다. 처음 입안 때 소득 대비 15%까지 올려야 한다고 봤던 보험료는 1998년 9%까지 오른 후 24년째 손도 못 대고 있다. 이대로 34년이 가면 기금이 소진되고, 70년이 지나면 누적 적자가 2경2650조원이 될 거라는 전망이 나오지만, 어떤 정치인, 관료도 인기 없는 일에 총대를 메지 않는다.
윤석열 정부는 교육·노동·연금을 3대 개혁 과제로 꺼내들었다. 그러나 교육 개혁은 아무 준비 없이 ‘만 5세 입학’을 던졌다가 사달이 났고, 노동 개혁은 전 정권이 망쳐놓은 원칙을 바로잡겠다는 당위 외에 별로 보이는 게 없다. 휴가를 다녀온 후 오직 국민만 보고 일하겠다며 심기일전을 다짐한 윤 대통령이 지난 19일 연금 개혁 보고를 받은 후 어떤 말을 할지 주목됐다.
윤 대통령은 이날 “(국회에서) 초당적·초정파적 국민 합의를 도출하기 바란다”고 했다. 국민은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치는 연금 문제에서 누가, 어떻게 합의하고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게 됐다. 권력투쟁으로 분란에 빠져 있는 여당이? 윤핵관이? 몸 던져 일할 것 같지 않은 장관들이? 목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는 식물 같은 대통령의 스태프들이? 국민연금 개혁안을 4가지나 만들어 국회에 던져버린 후 돌아보지도 않았던 문재인 정부 때와 뭐가 다를 것인지 모르겠다는 비판도 나온다. 절박감, 의지, 방법론이 대통령의 말에서도, 각료들의 말에서도 읽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여권에서는 여소야대에, 지지율 30%도 안 되는 정권이 뭘 할 수 있겠느냐는 푸념도 나온다. 그러나 지지율이 낮아서 일을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일을 못해 지지율이 낮은 것이라는 걸 모르지 않을 것이다. 국민연금 개혁안이 국회 특위에 상정된 후, 정부가 어떤 근거를 제시해 국민과 야당을 설득하고, 여당이 어떤 정치력을 보여주는지에서 이 정권 실력이 드러날 것이다. 국민만 보고 일하겠다고 한 대통령이 ‘정말 나를 바라보고 있구나’라고 느끼게 해주고, ‘정치적 안배 없이 일 잘하는 사람을 쓰겠다’며 기용한 사람들이 정말 몸 던져 일하는 모습을 국민들은 갈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