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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정이 걷어찬 ‘담대한 구상’, 대통령실은 “두고 보라”스크랩된 좋은글들 2022. 9. 2. 06:44
윤석열 정부가 대북 정책에 붙인 이름은 ‘담대한 구상’이다. 윤 대통령이 취임식에서 예고한 이 정책은 석 달 뒤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윤곽이 드러났다. 북한이 실질적 비핵화에 나설 경우 단계별로 북한의 경제와 민생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언뜻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인 ‘비핵·개방·3000′을 연상시켰지만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경협 방안 외에) 정치·군사 부문의 협력 로드맵도 준비했다”며 훨씬 과감하고 포괄적인 제안임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북한의 호응을 고대한다”고 했다.
광복절 이틀 뒤 북한은 서해상으로 대남 타격용 순항미사일 2발을 시험 발사했다. 나흘 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은 ‘허망한 꿈을 꾸지 말라’는 제목의 담화를 내고 담대한 구상을 “어리석음의 극치”라고 비난했다. 특히 “우리의 국체(國體)인 핵을 경제 협력 같은 물건짝과 바꿔보겠다는 발상을 보니 정말 천진스럽다”며 “윤석열 그 인간 자체가 싫다” “절대로 상대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담화는 노동신문 8월 19일 자 1면에 실렸다. 2500만 북한 주민 전체가 지켜보는 가운데 수령의 혈육이자 대남 사업 총책인 김여정이 윤 대통령에 대한 혐오감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담대한 구상을 걷어찬 모양새다. 언론과 전문가들은 담대한 구상에 대해 “추진 동력을 상실했다”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평가를 쏟아냈다. 담대한 구상은 김여정 말대로 ‘허망한 꿈’일까.
◇尹 “대담한 대북 정책 담았으면”
담대한 구상이란 개념은 윤 대통령이 참모들과 취임사를 준비하던 지난 5월 초 등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선 캠프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선 다루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사정에 밝은 여권 소식통은 1일 “윤 대통령이 ‘취임사에 대담한 대북 정책을 담았으면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며 “취임식 땐 일단 ‘담대한 계획’이란 표현을 썼고, 이후 국가안보실을 중심으로 구체화·정책화 단계를 밟으면서 ‘담대한 구상’으로 최종 정리했다”고 했다.
정부 관계자는 “김성한 안보실장과 김태효 1차장이 대담한 구상의 개념과 큰 얼개를 만들었고, 구체적 경제·군사·정치적 조치를 선별·배치해 시나리오화하는 작업은 1차장 산하의 통일비서관실이 외교부·통일부 등의 협조를 받아 완성했다”며 “8·15가 시한으로 정해져 ‘90일 전투’를 하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담대한 구상을 발표하며 ▲대규모 식량 공급 프로그램 ▲발전과 송·배전 인프라 지원 ▲국제 교역을 위한 항만과 공항의 현대화 ▲농업 생산성 제고를 위한 기술 지원 프로그램 ▲병원과 의료 인프라의 현대화 ▲국제투자·금융 지원을 예로 들었다. 윤석열 정부가 취임 전부터 줄곧 북한 비핵화보다 남북 대화·경협에 치중한 문재인 정부를 강도 높게 비판하며 한미 연합훈련의 정상화, 안보리 제재의 철저한 이행 등 대북 압박을 중시해 온 점을 감안하면 파격적이었다.
◇비핵·개방·3000의 복사판?
하지만 김여정은 담화에서 “(담대한 구상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10여 년 전 리명박 역도가 내들었다가 동족 대결의 산물로 버림받은 비핵·개방·3000의 복사판에 불과하다”고 했다. 대다수 전문가들도 “두 정책이 유사한 건 사실”이란 의견이다. ‘북이 핵을 포기하고 개방의 길을 택하면 국제사회와 함께 5대 분야에 걸친 포괄적 지원을 통해 10년 내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을 3000달러가 되도록 돕는다’는 개념이 담대한 구상과 닮은 게 사실이다.
대통령실은 이 같은 평가에 대해 적극 반박하고 있다. 김태효 1차장은 “(비핵화) 초기 협상 과정부터 경제 지원 조치를 적극 강구한다는 점에서 과감한 제안”이라고 했다. 비핵·개방·3000의 경협 프로젝트가 북한의 비핵화 결단을 전제로 한 것과 달리, 담대한 구상의 경제 지원은 비핵화 합의 도출을 위해 만나는 것만으로도 개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실은 또 담대한 구상이 경협 프로젝트와 함께 군사·정치적 로드맵을 포괄하는 종합적 계획임을 강조하고 있다. 윤 대통령도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미·북 관계 정상화를 위한 외교적 지원, 재래식 무기 체계의 군축 논의를 그 예로 들었다. 정부 당국자는 “군축의 경우 비핵화 완료 후에나 논의할 수 있다는 게 기존 입장이었다”며 “이를 비핵화 협상 초기로 앞당긴 것은 의미가 작지 않다”고 했다.
◇野 “北 움직일 한방이 없다”
그럼에도 일각에선 담대한 구상을 공개 제안한 윤석열 정부의 진정성에 의문을 나타내고 있다. 남북 관계 개선에 진심이라기보다는 대북 강경 이미지 세탁 차원 아니냐는 것이다. 야권 관계자는 “간판만 그럴듯하고 핵을 국체로 여기는 북을 움직일 한 방이 없다”며 “‘전향적인 제안을 북이 걷어찼다’고 국내외에 선전하기 위해 만든 정책 아니냐”고 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청와대 국정기획상황실장을 지낸 더불어민주당 윤건영 의원도 “북한을 협상장으로 견인해 낼 방도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야권에선 대통령실이 “북한 당국과 계획 수립 과정에서 논의한 건 없다”고 밝힌 것도 진정성 부족의 근거로 들고 있다. 과거 진보 정부 시절엔 중요한 대북 제안에 앞서 북과의 직간접 물밑 접촉을 통해 사전 교감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전 교감은 고사하고 윤석열 정부는 북이 거세게 반발하는 한미 연합 ‘을지 자유의 방패’ 훈련 하루 전날 담대한 구상을 제안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8월) 16일부터 한미 연합훈련을 시작하면서 (바로 전날) 이런 걸 제안하는 것은 모순된 행동”이라고 했다.
◇대통령실 “北, 워싱턴 가려면 서울부터 들려야 할 것”
여권 핵심 관계자는 “담대한 구상은 단순한 레토릭이 아니다”며 진정성 논란을 일축했다. 협상 보안상 밝히지 못할 뿐이지 전향적인 군사·정치 조치들을 다수 마련했다는 것이다. 다만 정부는 담대한 구상의 수용을 공개적으로 촉구할 뿐 별도의 물밑 접촉 등을 제안할 계획은 현재로선 없다고 한다. 이 관계자는 “대통령이 공개 제안한 마당에 추가로 북쪽에 ‘설명해줄 테니 만나자’고 하는 건 받아달라고 구걸하는 것밖에 안 된다”며 “김여정의 막말은 아쉽지만 지금은 북을 자극할 필요 없이 담담하게 기다릴 때”라고 했다.
대통령실이 조바심을 내지 않는 것은 미국과의 조율 결과가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안보부서 관계자는 “담대한 구상의 실행력을 높이기 위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국무부 고위 당국자들과 긴밀히 교감했다”며 “북한은 미국과의 직거래를 원하겠지만 미국의 대답은 정해져 있다. ‘워싱턴에 오려면 서울을 찍고 오라’는 것”이라고 했다.
북한은 2011년 7월과 9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남북 비핵화 회담에 응한 적이 있다. 리용호 당시 외무성 부상이 위성락 당시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을 만났다. ‘핵 문제는 조·미 간의 문제’라던 북의 기존 입장을 감안하면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전직 고위 외교관은 “당시 이명박 정부와 오바마 행정부의 북핵 공조가 긴밀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며 “북이 남북 비핵화 회담에 응한 것은 ‘워싱턴에 오려면 서울을 거쳐 오라’는 미국의 단호한 입장 때문이었다”고 했다.
[대북 원칙 훼손 논란도..대통령실 “3D는 계속 유지”]
‘담대한 구상’과 ‘비핵·개방·3000′의 차별점을 부각하려는 대통령실의 노력은 역설적으로 안보를 중시하는 보수층의 불안을 자극한 측면이 있다. 대통령실 관계자가 대북 식량 지원의 대가로 현금 대신 북한에 풍부한 지하자원을 받아오는 ‘한반도 자원·식량 교환 프로그램’(R-FEP)을 소개하며 “필요에 따라서는 유엔 제재 결의에 대한 부분적인 면제도 국제사회와 협의할 계획”이라고 밝힌 것이 대표적이다.
제재는 일단 완화 또는 면제되면 원상 복구가 매우 어렵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중·러가 기존 대북 제재의 완화·해제를 줄기차게 주장하며 추가 제재에 결사 반대하는 지금 같은 상황에선 더더욱 그렇다. 북한이 비핵화 협상에 응하는 척하다가 제재 면제만 받아내고 협상을 깨버리는 상황이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 전직 통일부 고위 관리는 “대북 경협의 대가로 전용(轉用) 위험이 큰 현금 대신 현물을 준다는 아이디어는 평가할 만하다”면서도 “북이 가짜 비핵화 의지로 국제사회를 기만하는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윤석열 정부의 대북 정책은 억제(Deterrence), 단념(Dissuasion), 대화(Dialogue)라는 3개 기둥이 떠받치고 있다”며 “이 가운데 구체성이 떨어지는 ‘대화’ 부분을 보강하기 위해 제안한 것이 담대한 구상”이라고 했다. 미국 확장 억제(핵우산)의 실행력을 높이는 동시에 한국 자체의 3축 체계(킬체인, 한국형 미사일 방어, 대량 응징 보복)를 강화해 북한의 핵 공격 시도를 ‘억제’하고, 안보리 제재의 철저한 이행을 통해 북한의 핵을 ‘단념’시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가운데 담대한 구상을 통해 ‘대화’의 문을 열어둔 것이라는 설명이다.
조선일보 2022년 9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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