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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유인 김동길
    스크랩된 좋은글들 2022. 10. 6. 08:05
     

    김동길 교수는 서양문화사 강의를 연세대 강의실이 아니라 강당에서 했다. 2000명이 넘는 수강생을 수용할 강의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출석부가 77쪽에 달했다. 출석 체크가 불가능했다. 그래도 결석자는 적었다. 청강생이 더 많이 들어와 강당 정원을 초과할 때가 많았다. 그의 강의는 힘이 있었고 유머가 넘쳤다. 김 교수를 흉내 낸 최병서의 개그보다 그의 강의가 더 웃겼다. 엄청난 인기였다.

    ▶글과 말에서 동시에 달인은 드물다. 김 교수는 드문 사람이었다. 타고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20여 년 동안 매일 아침 6시 미국 한인 방송을 통해 강연을 했다. 방송국 사정 때문에 갑자기 결방 소식을 들은 날에도 카메라 앞에서 그냥 강연했다고 한다. 글도 200자 원고지 석 장씩 매일 썼다. 김 교수는 “혼수상태가 될 때까지 글을 쓰겠다”고 했다. 실제로 병석에 들기 직전인 지난 설날까지 글을 올렸다.

     

    ▶그는 강골이었다. 대학 때 도봉산으로 단체 친목회를 갔다가 깡패들을 만났다. 가진 것을 내놓으라고 협박당했다. 김 교수 혼자 다 때려눕혔다. 당시 유일한 여학생이던 고(故) 심치선 교수의 생전 증언이다. 그런 분이 하루 한 끼만 드셨다. 자택에서 식사를 함께 해보고 의문이 풀렸다. 그릇 크기가 대단했고 양도 상당했다. 비상한 기억력도 유명했다. 시 300수를 외웠다고 한다. 몇 편 암송을 부탁한 적이 있다. 시마자키 도손, 윤선도,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 3편을 순식간에 암송했다. 김 교수는 “키를 눌렀는데 시가 안 나온다? 그때가 인생 끝나는 때”라고 했다.

     

    ▶손윗누이인 고 김옥길 선생처럼 그도 사람을 좋아했다. 대문을 열어 놓고 살았고 종종 자택에서 냉면 모임을 했다. 많은 식객이 신세를 졌다. 그 가운데 부하까지 몰고 와 냉면을 가장 많이 먹고 간 사람은 5공 때 김 교수를 핍박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었다. 50여 명이 100그릇 넘게 먹고 빈대떡까지 싸갔다고 한다. 노년엔 여든 넘은 지인들과 함께 100세 클럽을 만들었다. 멤버였던 백선엽 장군과 김병기 화백이 백 살을 넘기고 세상을 떴다. 김형석 교수와 김창묵 선생은 여전히 건재하다.

     

    ▶11년 전 생일, 김 교수는 세브란스병원 의료원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가 죽으면 장례식, 추모식은 일체 생략하고 내 시신은 의과 대학생들의 교육에 쓰여지기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누가 뭐래도 이 결심은 흔들리지 않는다”며 도장까지 찍었다. 그는 일생 자유민주주의를 전파하면서 살았다. 가는 길도 자유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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