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성 못 알아본다” 정부 연구기관부터 블라인드 채용 폐지. 과학계 요구 반영, 文정부에서 만든 채용방식 바꾸기로
3년전 보안이 생명 ‘한국원자력硏’ 中국적자 뽑아 뒤늦게 불합격 처리
윤석열 대통령은 28일 “최근 몇 년 동안 우수 연구자 확보를 가로막았던 공공기관 블라인드 채용은 연구기관에 대해 우선적으로 전면 폐지하겠다”고 말했다. 국가 성장의 동력이 되는 과학기술 분야만큼은 채용을 자유롭게 해 우수 인재를 영입할 수 있게 하겠다는 취지다. 문재인 정부에서 도입된 블라인드 채용이 연구기관에서 폐지되면 다른 공공기관으로도 확대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연구기관 블라인드 채용 폐지 후 공공기관별 특성이나 상황을 보면서 논의할 것”이라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28일 오전 용산 대통령실에서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제1회 전원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윤 대통령은 이날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전원회의에서 민간 위원들에게 “정부 출연 연구기관의 발전 전략과 함께 (블라인드 채용 폐지를) 고민해달라”며 “과학기술 발전을 가로막는 어떤 규제도 정치적 이유로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말했다. 공공기관 블라인드 채용은 2017년 6월 문재인 전 대통령이 채용 공정성과 투명성을 높이겠다며 공공 부문에 전면 도입을 지시하면서 시행됐다. 하지만 정부 산하 연구기관이 획일적으로 지원자들의 출신 학교와 추천서도 받지 못하게 하면서 ‘깜깜이 심사’ ‘연구 경쟁력 하락’ 등의 지적을 받아 왔다.
대통령실 이재명 부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전임 정부에서 공공기관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하며 국책 연구기관까지 일괄 적용했다”며 “그러다 보니 연구자 배경을 파악하지 못해 여러 부작용이 생겼다”고 했다. 2019년에는 극도의 보안이 요구되는 한국원자력연구원에서 블라인드 채용 방침을 따랐다가 중국 국적자를 선발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원자력연구원은 뒤늦게 이 사실을 확인하고 중국 국적자를 불합격 처리했다. 다른 연구기관에선 연구 경력을 과대·허위 기재한 사례가 적발되기도 했다. 현재 블라인드 채용 규정에 따라 지원자들이 연구 실적에서 출신 학교뿐 아니라, 논문 내용에 궁금한 점이 있을 때 물어보는 ‘교신 저자’의 이름까지 삭제해서 제출하고 있다.
과학계에서는 “해외 연구기관에선 출신 학교보다 추천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는 추천서도 받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왔다. 미국 아르곤국립연구소나 캐나다 국립연구회, 독일 프라운호퍼연구회, 일본 이화학연구소 등 해외 우수 연구기관들은 채용 시 연구자의 출신 학교와 추천인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또 카이스트나 광주과학기술원(GIST) 등도 공공기관에 해당돼 교수 채용 시 출신 학교 등 일부 정보를 가린 채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연구기관에 대한 블라인드 채용 폐지는 윤 대통령 당선인 시절부터 제기됐다. 대통령직인수위는 지난 4월 학계 정부 출연 연구기관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하고 채용 개선안 등을 논의했다.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도 지난 5월 후보자 신분 당시 “과학기술 연구기관은 인재 채용 시 해당 분야 성과와 잠재력을 정확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지만, 블라인드 채용 제도에선 이를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고 했다.
윤 대통령이 이날 공공 연구기관 블라인드 채용 폐지 방침을 밝히면서 관련 후속 조치들이 이어질 전망이다. 여권에선 “정부 산하 연구기관에 대한 블라인드 정책 변화는 일종의 신호탄으로 다른 공공기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다른 공공기관 확대는 연구기관 폐지 후 기관별 특성이나 상황을 보면서 논의할 수 있는 내용 같다”고 답했다. 우선 문재인 정부에서 만들어진 고용노동부의 ‘공공기관 블라인드 채용 가이드라인’과 기획재정부의 ‘공공기관 혁신에 관한 지침’ 개정 작업이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이와 별도로 기재부와 과기부는 지난 8월 연구·개발 기관에 한해 연구 인력의 정보 수집 범위를 주무 부처의 장에게 위임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공공기관 관리체계 개편방안’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