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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사업을 흔히 성장산업이면서 설비산업이다. 전력수요가 경제성장과 더불어 해마다 10% 이상 증가했으므로 발전설비와 송전,변전, 배전설비도 그 수요성장에 맞추어 계속 확충해 나가야 하며, 이들 설비의 확충에는 막대한 투자재원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재원을 기업 이윤만으로 충당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워 외부차입은 불가피한 필수조건이다. 1990년대에도 늘어나는 전력수요에 대비하여 발전설비와 송변전 설비를 증설해야 했으나 이를 위한 국내자금 조달에는 한계가 있었다. 어쩔 수없이 해외에서 외화를 조달해야 했고, 유리한 조건의 차입이나 채권발행 을 위하여야 했다.
양키본드 발행
한전은 1980년대 들어 해외자금 조달을 위한 기업 설명회가 몇 차례 있었다. 일본에서 채권 사무라이본드를 발행하면서 한국전력이 100% 정부출자기업이란 점을 발행조건에 삽입함으로써 상당히 좋은 신용평가를 받아 유리한 조건으로 채권을 유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89년 정부방침에 따라 한국전력주식의 일부를 민간에게 매각함으로써 제 채권시장에서의 한국전력 신용도에 상당한 타격을 받게 되었다. 1993년에는 국내기업 최초로 뉴욕에서 미국의 양키본드를 발행하려 하자 사무라이본드의 발행조건 위약이 문제가 되었다. 이의 해결을 위해 자금담당 간부들이 일본에 흩어져 있는 채권자를 일일이 방문하여 설득 하고 채권자회의를 개최함으로써 계약 위반, 즉 디폴트 상태를 무사히 해소할 수 있었다. 1993년 7월에는 3억 달러의 양키본드를 쉽게 발행할 수 있었다.
한국전력 주식 뉴욕 證市 상장
1994년에는 정부가 국내 상장법인에 대해 해외증권시장 상장을 허용에 따라 한국전력도 이 방식을 검토하게 되었다. 그동안 주로 해외채 발행 위주로 어렵게 외화를 조달하던 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94년 10월 27일 한국전력 역사상 처음으로 뉴욕증권시장NYSE에 주식을 등록하고 그 첫 거래를 시작했다. 이에 앞서 약 3억 달러의 주식을 유상증자하여 미국시장에 상장하고자 정부 승인을 받고 9월 16일 이사회를 열어 증자안을 심의 의결했다. 이어서 崔大鎔 부사장이 뉴 욕에 미리 가서 발행 대리인 리만브러더스 회사와 증권발행조건과 상장 주식의 가격을 책정하는 회의를 했다. 10월 6일에는 이 회의시간에 맞추어 한국에서는 조찬 이사회를 개최하여 국제전화로 뉴욕의 협의내용을 전달받으면서 증시발행 가격을 정했다. 국내 증시가격 및 미국 증시의 종가질적 등을 감안, ADR(American Depositary Receipts) 한 구좌 당 21. 50달러로 정하고 그 자리에서 이사회의 승인도 얻었다.
그러나 발행조건을 결정한 후 실제로 뉴욕 證市증시에 상장되는 날 사이에 국내의 주식가격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성수대교 붕괴사고 등의 여 파로 시장의 투자열기도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또한 이 기간 중에 정부가 일반기업의 외국인 투자한도를 풀어주었는가 하면 2주 전 포항제철이 한국기업으로는 처음으로 뉴욕 증시에 주식을 상장했는데 그 가격이 수직 하락하고 있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국내외적 여건이 악재로 작용하여 한국전력의 주식 뉴욕증시 상장가격 결정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이종훈 사장은 증권시장 증시상장 전날 저녁에 경리처장과 실제 상장될 최초 거래가격을 결정해야 했다. 증시에 상장하기 전날까지 한국 증시의 5일 간 평균 주식가격에 5%의 프리미엄을 붙이는 것으로 하여 20 1/8달러에 결정하여 상장했다. 이는 한국에서 거래되는 0.5주에 해당되는 가격이다. 미국에서의 거래규모에 증시가격을 맞추기 위해 한국에서 거래되는 하나의 주식을 두 개의 DR로 나누어 상장하기 때문이다. 1994년 10월27일 드디어 한국전력 주식은 뉴욕시장에 KEP란 약호로 상장되었다.
글로벌 본드 발행
1994년 11월 전 세계시장을 대상으로 한 13억 5천만 달러 글로벌 본드 발행에 성공했다. 지난날 한국 금융신용이 낮을 때 차입한 금리가 높은 기존채무를 금리가 낮은 외화로 조달하여 조기상환 상환함으로써 기업의 이자부담을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글로벌 본드는 외국정부나 IBRD같은 신용등급이 최고인 기관만이 발행하던 본드이다. 기업체로서는 미국의 포드와 일본의 미쓰비시만이 발행에 성공한 사례가 있을 뿐이었다. 한국전력의 국제금융시장에서의 신용등급이 그만큼 좋기 때문에 기업체로서는 세계에서 3번째로 발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본드 발행에는 손봉업 본부장과 홍덕화 경리처장, 김준수 부장,손원길 과장 등 주요간부들의 아이디어와 노력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
백년 채권(百年 責卷) 발행
1996년도의 해외차입 규모는 약 8억 달러로 추정되고 있었다. 효율적 조달방안을 찾아 금융비용을 절감해야 경영효율도 그만큼 높일 수 있다. 국제금융시장에서의 자금조달방안 중 미국에서 발행하는 100년채(年債慣) 양키본드를 저금리로 마련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국제자금시장의 특성을 익혀가면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사내 합의를 도출하그l자 1996년 3월 14일 이의 발행에 대한 정책토론회를 개최했다. 국가와 회사의 신용이 아주 좋지 않으면 100년 후에 상환하는 이 양키본드를 발행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발행한 예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
1996년 3월 22일 이중훈 사장은 100年債 발행인수 서명을 위하여 월드트레이드 센터에 있는 솔로몬브러더스사를 방문하여 로버트 덴함 회장과 정중하면서도 간소한 서명식을 가졌다. 한국전력이 시도한 이번 채권 발행은 세계적으로 3번째인데다 규모면에서도 2억 달러나 되는 대규모여서 한국전력의 위상과 신용이 세계적으로 그만큼 크게 높아지게 되었다고 한다.
출처: 이종훈 전한전사장 지음: 한국은 어떻게 원자력 강국이 되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