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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국가지도력의 뿌리 그의 군인정신낙서장 2017. 2. 8. 17:34
박정희 국가지도력의 뿌리 그의 군인정신
박정희가 어린 시절 병정노리를 즐겨하는 것을 보고 그의 어머니는 아무래도 군인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 시절, 춘원 이광수가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이순신“을 이야기를 탐독했다. 그의 형 박상희가 그당시 조선일보 구미 지국장을 하면서 동아일보신문을 같이 취급하고 있었다. 어느날 형의 방에 갔다가 나포레온 전기를 발견하고 그 책에 흥미를 얻어 수시로 빌려다 읽곤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에 들어가서도 기계체조에 소질이 있어 그 학교에 교련선생아리까와로부터 남달리 사랑을 받았다고한다. 이리까와 대좌는 대령급 현역 군인으로 대구사범학교 교련선생으로 파견되어 있었다.
만주 신경군관학교
광활한 땅 만주 대륙. 박정희에게 그곳은 언제나 가슴 설레는 동경의 땅이었다. 그는 일제 강압적 식민지 정책의 숨 막히는 압박감을 느낄 때마다 만주를 떠올렸다. 허루빨리 조선을 벗어나 드넓은 개척의 땅으로 가 군인으로서 남아다운 기개를 마음껏 펼쳐보고 싶었다. 어릴 적부터 품어온 ‘군인으로 출세하고 싶다’는 꿈이 어우러져 그를 가슴 벅차게 했고끊임없이 만주행을 갈망하도록 부추겼다.
그 무렵 박정희는 암흑기로 치닫기만 하는 조선의 상황, 자신의 꿈을 얽매는 원치 않는 결혼, 일본 교사들과의 잦은 충돌로 인한 불투명한 앞날 등 삼중고를 겪고 있었다. 그야말로 박정희의 하루하루는 참담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이런 그 앞에 새로운 빛이 내리기 시작했다. 대구사범학교 동기인 백일성으로부터 학창시절 교련주임인 아리카와의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그는 박정희를 무척 아꼈던 교사였는데 만주 관동군으로 전출, 대좌로 진급해 일본 육군 관동군 부대 총지휘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친구가 알려준 주소로 아리카와에게 자신의 의지를 밝히는 편지를 썼다. 지금 문경공립 보통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지만 사실 오래전부터 군인이 되고 싶었으며, 나이가 많아 일본육군사관학교에는 들어갈 수 없으므로 가능하다면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해 군인의 길을 걷고자 한다는 내용이었다. 만주 신경군관학교는 1937년 중일전쟁으로 대륙 침략을 본격화한 일본 육군은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장교 양성을 위해 1939년 만주국에 4년제 정식 사관학교를 설립했다. 정식 명칭은 ‘만주국 육군군관학교’로, 흔히 ‘신경군관학교’라고도 불렸다. 아리카와로부터의 답장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군인으로 출세하겠다는 야망을 접을수는 없었다. 그는 군인이 될 수 있는 길을 차근차근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현실적인 몇 가지 걸림돌부터 해결해야 했다. 무엇보다 스무 살을 넘긴 나이가 가장 큰 문제였다. 사관학교에서 후보생을 뽑을 때 나이 제한을 열아홉 살로 두고 있는데, 박정희는 3년이나 늦은 상태였다. 호적 나이를 고쳐볼까도 생각했으나 이는 나중에 큰 탈을 불러올 수도 있었다. 그는 마침내 혈서를 선택했다. 그것만이 자신의 열망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백지를 한 장 펴고 면도칼로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베어 단숨에 ‘진충보국(盡忠報國) 멸사봉공(滅私奉公)’을 써내려갔다. 박정희가 혈서를 동봉한 ‘군관지원 편지’를 만주국 치안부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幕課)로 띄운 지 보름 뒤인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에 그의 이야기가 실렸다. 이것이 계기가되어 아리카와에게서 편지가 왔다. 그와 같은 결의라면 자기를 찾아 만주로 오라는 희소식이었다.
역사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만주에 박정희는 운명의 첫발을 내디였다. 1940년 4월 4일, 드디어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예과 제2기생으로 입교한 것이다. 일본인 240명, 만주계로 통칭되는 중국인 · 몽골인 · 조선인 240명 모두 480명이 제271생으로 입교했다.
만주군관학교 교과과정은 일본어 · 중국어 · 수학 · 물리 · 화학 · 지리 · 역사 · 전사학(戰史學) 같은 교양 기본 과목과 측도 · 승마술 · 유도 · 보병전술 · 작전요무령 (作戰要務令) . 진중근무 같은 군사 과목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의 교과과정을 거의 그대로 옮겨온 것이었다. 오전에는 주로 학과수업, 오후에는 전술훈련을 했다. 조선인이라는 핸드캡고 이미 사범학교를 졸업후 교사생활을 했기에 나이로도 차이가 있는 그로서는 어려운 핸드캪을 극복해야만 했다. 박정희는 측도와 독도법(讀圖法)을 집중적으로 익혔다. 얼마나 상세히 익혔는지 등고선까지 들어간 지도를 즉석에서 그려 설명할 수 있을 정도였다. 목검을 들고 사다리를 재빠르게 오르거나 외나무다리를 띔박질로 통과하는 장애물 극복 훈련에서도 그와 견줄상대가 없었고, 대구사범학교 시절 연마한 기본 실력이 있는 만큼 검도도 단연 뛰어났다. 박정희는 승마술 시간이 되면 신바람이 났다. 생도들에게 배정되는 말들은 등판에 살이 .현서 기마용으로는 등급이 떨어지는 말이었다. 그러나 상상 속에서 수백 번 말을 몰았을 만큼 말타기를 꿈꾸던 박정희에게 그런 것쯤은 문제 되지 않았다. 그는 말을 타고 드넓은 만주벌판을 달리면서 자신의 모습을 백마를 타고 전장을 누비던 나폴레옹의 모습과 비교해 보곤 했다.
오성(五省)과 계훈(戒訓)을 가슴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반성의 시간이 있었다. 실내를 조금 어둡게 한 다음, 차려 자세로 눈을 감고 5성(五省)을 입속으로 중얼중얼 외웠다. “나는 오늘 하루 지성(至誠)에 어긋남이 없었는가? 언행(言行)에 부끄러운 점은 없었는가? 기력(氣力)이 모자라지 않았는가? 노력(努力)에 아쉬운 점은 없었는가? 부정(不正)에 손대지 않았는가?" 五省 일본군의 계훈(戒訓)이었다. 그러나 내용 자체는 나무랄데 없는 교훈이어서 그것을 강요하는 학교 쪽 의도야 어떻든 박정희는 자기 생활의 이로운 채찍으로 삼았다. 특히 ‘지성에 어긋남이 없었는가라는 성찰의 말과 ‘노력에 아쉬운 점은 없었는가’라는 구절은 박정희가 평생 삶의 본보기로 삼았을 만큼 가슴 깊숙이 새긴 인생의 금언이요, 경구였다.
황야의 늑대, 천황의 여우
인간은 삶의 터전이 지닌 특성을 어느 정도 닮게 마련이다. 도시에서는 영리함을, 농토를 가꾸는 생활에서는 성실함을, 초원의 드넓은 환경에서는 활달함을 배운다· 1930-40년대의 만주는 질풍노도의 시기였던 만큼 격변하는 그곳에서 호흡한 사람들은 과감한 행동파가 되었다. 만주군관학교 조선인 생도들은 무섭게 소용돌이치는 물결 속에서 결속력과 친화력을 바탕으로 행동력과 정치지향적인 면을 골고루 갖추어갔다. 단정하고 사색적인 면이 강했던 박정희는 만주 대륙 한복판에서, 가슴 한쪽에서는 끝없이 희망을 키우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까마득한 절망감에 빠지기도 했다. 일본이 이 드넓고 아득한 대지 곳곳에 그 검은손을 뻗치고 있음을 깨닫자 약세를 면치 못하는 조국의 현실에 마냥 가슴이 무너져내렸다. 그러나 그는 우리 민족에게도 반드시 한 번쯤은 좋은 기회가 찾아오리라 믿었다. 사실 일제가 만주군관학교를 세운 목적은 대륙 식민지 경영을 보장할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괴뢰정권 만주국의 체제 안정은 곁딸린 목적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중국인과 조선인 군관생도들에 대한 일본의 교육은 절반의 성공에 지나지 않았다. 중국인 · 조선인 할 것 없이 만주계 군관생도들은 고분고분 따라가는 척하면서 그들의 군사지식을 열심히 터득해 언젠가 일본에 맞설 때 써먹으려는 뜻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생각도 이와 같았다. 그는 틈틈이 도서실을 찾아 역사서적들을 비롯해 신문이며 시사잡지를 즐겨 읽었다. 독서야말로 힘들고 뺏한 생도 생활에서 정신적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소중한 피난처였다.
박정희는 국내에 있을 때부터 동경하던 만주 대륙과 그의 만주행을 부추긴 주요 인물들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었다. 군인이 되기 위한 길에 성공적으로 발을 딛고 올라선 이상, 만주라는 노다지 광맥에서 더 보람찬 성취를 캐내고 싶었다. 이것저것 읽어가는 동안, 그의 가슴에 강렬하게 다가오는 두 거인이 있었다. 관동군의 이시하라 간지(石原菀爾)와 만철의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였다. ‘황야의 늑대’로 불리는 이시하라 간지. 뛰어난 책략으로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의 실세 중국 군벌들을 쳐부순 뒤,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꼭두각시로 내세워 신생 만주국을 건설, 강력한 관동군을 손아귀에 틀어쥐고 휘두르며 만주 대륙을 자기 뜻대로 주무 르는 걸물. 그의 발자취와 일화들을 알면 알수록 박정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가 취한 군사정책이나 일본의 대륙진출정책에 대한 모략과 책략의 잘잘못과는 별개로 웅대한 대륙을 하나의 국가로 만들어가는 거대한 작업을 도모하고 실행할 만큼 그 ‘인간 그릇’이 크다는 점에는 부러움과 경외심까지 일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쇼와(昭和) 천황의 여우’라 불리는 기시 노부스케. 그는 중요산업통제법을 입안, 통과시키고 실시함으로써 혁신관료 우두머리로 입지를 굳히고, 군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이런 경력을 바탕으로 그는 1936년 만주가 ‘미래와 기회의 신천지’로 떠오르자 상공성(商工省) 공무국장을 사퇴하고 만주로 달려가 만주국 국무원 실업부 차장을 맡으면서 만주국 산업행정을 실질적으로 총괄하고 만주산업개발 5개년계획을 명분으로 한 ‘경제군 사화’를 추진했다. 그의 가장 큰 공적은 급성장한 신흥재벌 닛산(日塵)을 만주로 끌어들인 것이다. 박정희는 황야의 늑대와 천황의 여우, 두 인물을 합친 그림에 자신의 모습을 겹쳐보았다. 아직은 아득 하지만, 먼 훗날 어떤 운명의 기회가 자신에게 찾아오리라는 그림을 그려보자 가슴이 마구 뛰었다.
국가와 경제 그리고 국가책략
‘군사와 경제야말로 국가를 떠받치는 핵심 기둥이다. 어느 한쪽도 허약해선 안 된다. 그러면 균형을 잃어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 우리 조선인도 저마다 자신을 부지런히 갈고닦아서 크나큰 꿈을 오롯이 담아낼 그릇을 만들어 그 속에 국가 확장 건설을 위한 지혜를 가득 담아야 한다.’ 이런 생각으로 박정희는 이시하라 간지와 기시 노부스케의 책략을 철저히 연구했다. 이는 나중에 박정희가 추진한 국가재건과 총력안보의 ‘돌격화 근대화’로 그 결실을 맺게 된다. 그는 만주국과 마찬가지로 여러번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계획으로 한국의 산업구조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물론 수출주도형 산업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해 노동집약적 산업을 발전시킨 점이 만주국과는 다르지만, 이것도 군수산업을 목표로 한 중화학공업화를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으며, 자주국방을 위한 중화학공업화라는 점에서 만주국과 같다. 또한 강대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박정희의 강력한 지도력, 소수의 경제전문가의 의사결정과 자원배분 권한 독점, 수출시장 확보와 기술력이나 외국자본 도입을 목적으로 한 대외관계 구축, 중화학공업회를 향한 적극적인 재정지출, 나아가 국민동원을 위한 새마을운동 등 많은 비슷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박정희가 이룬 ‘한강의 기적’ 그리고 ‘한국적 민주주의’에는 만주제국의 유산이 흘러넘치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졸업과 동시에 일본육군사관학교 유학생으로 뽑혔다. 만주군관학교 2기 예과 졸업생 중 성적이 뛰어난 70명이 일본육사에 특전입학하게 된 것이다. 일본육사 3·4학년 본과과정을 마치고 나면 바로 관동군으로 복귀해 만주에서 근무하는 조건이었다. 만주군관학교는 예과에 지나지 않아 본과를 이수해야 장교로 임관될 수 있었다. 일본육사는 그즈음 젊은이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던 데다 군인으로 성공하고 싶은 박정희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5개월 동안 사관후보생으로 일선부대에 배속되어 하사관과 사병생활을 체험하도록 되어 있는 이른바 ‘다이쓰키(隊付) 교육’을 마치고 일본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기위해 일본으로 갔다.
일본육군사관학교
1942년 10월, 박정희는 다이쓰키 교육을 훌륭히 마치고 일본으 로 건너갔다. 박정희가 속한 만주군관학교 예과 졸업생도들은 일본육사 본과 3학년에 편입됐다. 육시는 이들을 본국 육사예과 출신들과 한데 섞지 않고 ‘유학생대(留學生隊)’로 구분해 관리하며, 강의실과 기숙사도 따로 배정했다. 하지만 교육내용이나 대우 및 후생은 본국 예과 졸업생도들과 다르지 않았다. 신분 자격도 정규 육사 제57기로 같았다.
사관생도들의 일과는 아침 6시부터 시작되었다. 기상나팔 소리에 깨어 연병장에 모인 생도들은 먼저 신사참배부터 했다. 사관학교에서 2킬로미터쯤 떨어진 신사까지 달려가 군인칙유(軍人刺諭)를 큰소리로 외쳤다. “군인은 충절을 본분으로 삼는다. 군인은 예의를 숭상한다. 군인은 무용(武勇)을 숭상한다. 군인은 신의를 지킨다. 군인은 질소(質素)를 본지(本旨)로 삼는다."
긴 교육칙어(敎育刺語)까지도 외워야 했다. 나라에 충성, 부모에 효도, 형제 우애, 부부 사랑, 친구 간의 믿음을 돈독히 하라’는 것이 교육칙어의 근본정신이었다. 신라 화랑도의 ‘세속오계(世俗五戒)’나 ‘삼강오륜’을 뼈대로 삼으면서 일본 근대정신에 크게 영향을 준 퇴계 이황의 ‘경(敬)철학’ 사상을 기본으로 한 것이 분명했다. 군인칙유나 교육칙어가 지향하는 기본 목표는 모두 ‘천황의 충성스러운 백성’으로 거듭나는 것이어서, 이미 뚜렷한 민족가치관을 지난 박정희로서는 거부감이 일었다. 그러나 칙유나 칙어에 담긴 본질인 동양정신, 퇴계 경사상 도덕 관념 자체는 얼마든지 수긍하고 따르며 배울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부하의 목숨을 책임지는 군대 지휘관을 길러내는 사관학교이기에 생활지도와 교육은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엄격했다.
사관학교의 모든 수업은 정신수양을 바탕으로 했다. 박정희를 비롯한 사관생도들은 평소 숭고한 정신을 지니도록 엄격히 자신을 갈고닦아야 했다. 사관생도들은 일상생활 하나하나에서 철저히 자신의 욕망과 욕심을 누르는 법을 익혔다.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정신이 육체를 지배할 수 있도록 참고 견디는 수행을 했다. “위기에 처할수록 군사들은 오로지 지휘관만 바라본다. 따라서 지휘관은 홀로 빠져나갈 수 없고 빠져나가서도 안 된다. 귀관들은 어떠한 난관이나 불운도 이겨낼 수 있도록 역경에 굴하지 않는 냉철한 정신을 길러두어라"
박정희는 이러한 가르침이 자연스레 몸에 배도록 늘 자신을 채찍질해 나갔다. 그는 누구보다도 고매한 덕을 갖추고 싶다는 이상을 품었다. 훈육부의 정신교육은 장교로서 덕성을 키우고 부하들 을 이끄는 능력을 기르는 내용에서 시작해, 궁극적으로는 무사정신과 아울러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인 사상을 이룩하는 경지에 까지 이르렀다.
박정희의 청렴, 용기, 겸손, 명예, 자기통제
나폴레옹 전기를 탐독했던 것처럼, 박정희는 이선근 박사(1950년 2월 국방부 정훈국장이 되었다가 1952년 준장으로 예편,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교수로 복직했고, 1954년 문교부장관, 1956년 동아대학교 교수, 1957년 성균관대학교 총장, 한국사립대학연합회 회장 등을 지냈다)가 권하는 퇴계와 아우렐리우스 “자성록”,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가 쓴 《무사도》 같은 사상 · 역사책들을 즐겨 읽었다. 평생 그의 명제 인 ‘진정한 애국정신이란 무엇인가?’를 두고 탐구하고 분석함에 더욱 박차를 가하며 그 핵심에 다가갔다. 청렴 · 용기 · 겸손 · 명예 · 자기통제 등, 박정희는 그 가르침을 되새기고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며 몸과 마음을 굳세게 다져갔다. 1944년 4월 20일 일본육군사관학교 제57기생으로 졸업했다.
엄격한 규율, 힘에 벅찬 수업, 태평양전쟁이 끝나갈 무렵 발악적 쥐어 짜기식 교육은 박정희의 몸과 마음을 모두 지치게 했지만, 일본육사에서 배운 것들은 그의 정신적 뿌리에 거름이 되었다. 박정희는 지휘관으로서의 ‘비법’을 배우려 힘썼다. 바로 ‘통솔은 통어(統御)와 지휘로 나누어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통솔’이란 ‘집단을 규합해 이끄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통어 (마음으로부터 복종하게 하는 것) 와 지휘(엄격한 명령으로 행동하게 하는 것)’ 두 요소가 반드시 필요하다. 부하를 통어하려면 힘이 아닌 덕으로 대해야 하고, 그래야만 부하가 지휘관을 참된 지도자로 따른다. 박정희는 부하들이 절대복종의 마음으로 상관의 의도를 알아차려 상황 변화에 대응하고 스스로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이끄는 지도력을 키우려 애썼다. 한번 마음먹으면 쉽게 흔들리거나 굽힘이 없어야 반드시 성공한다는 것도 새삼 느꼈다.
지휘관은 ‘신독(慣獨) 을 지켜야 한다. 신독이란 ‘홀로 있을 때 몸가짐을 삼간다’는 뜻이다. 박정희는 남이 보지 않고 듣지 않는 곳에 서도 자신을 다스리면서 높은 인간성을 몸에 익히기 위해, 곧 신독을 다하기 위해 늘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는 꿈을 이루고자 결단을 내려 만주로 떠난 것처럼, 앞으로의 삶에서 만나게 될 여러 갈래 갈림 길에서 최선의 결단을 내리고 후회 없이 당당해지기로 마음먹었다. 군 지휘관이기 전에 삶을 지탱하고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또 실패를 두려워하기보다는 자신의 이상을 굳게 믿기로 했다.
이때에 박정희가 느낀 감회의 핵심은 고단한 학업을 마쳤다는 기쁨만이 아니었다.
알껍데기를 깨고 세상에 나왔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하늘로 날아올라야 한다는 기대와 부담감이 몰려들었다. ‘육사 교육의 기본 정신은 가장 군인답게 죽는 방법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조선인이다. 일본 군인으로서 죽을 수는 없다. 내가 지향해야 할 목표는 저 산 너머 하늘에 잇닿는 더 높은 정상에 있다. 박정희는 대륙적 기상을 품고 스스로를 유능한 지휘관으로 단련해 나갔다. 한민족의 원류 만주 대륙과 사관학교는 지휘관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를 키운 요람이었다.
박정희는 가난에 시달리던 한국을 명실상부한 세계적 신흥산업국가로 탈바꿈시킨 그의 신념은 ‘한강의 기적’ ‘세계의 기적’을 이루어냈다. 오늘날 세계가 바라보는 대한민국의 성공과 위상은 피터 드러커가 단언했듯 ‘박정희’ 없이는 절대 이야기할수 없으리라. 이것이 그의 군인정신에서 나온것이라 믿는다.
2017년 2월 8일
추신: 금년이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되는 해입니다. 몇일전 박정희 기념사업단에서 탄생100주년기념행사로 행사 시민강좌가 서울시청옆 프례스센타에있었습니다. 그곳에 가서 강의도 듣고, 그곳에서 구한 자료를 기초로 해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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