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광복절 행사에 참석한 이승만. 오른쪽으로 김구, 미·소 공동위원회 소련 수석대표 스티코프 중장, 안재홍./조선일보 DB
강연이나 출판물에서 A라는 나라의 현대사를 설명할 때, 미국의 조종을 받아 집권한 꼭두각시 정치인이 등장하면 종종 이런 해설이 나온다. “그는 한마디로 A국(國)의 이승만이었다.” 고대사 전공의 한국사학자로부터 사석에서 이런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이승만 같은 미국의 앞잡이는 다시 나와선 안 된다.”
많은 사람의 인식과는 달리 이것은 실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평가가 아니다. 해방 정국에서 반탁(反託)을 견지했던 이승만은 한반도의 임시정부를 논의한 미소(美蘇) 공동위원회로부터 철저하게 배척당했다. 미 군정이 지지한 세력은 반공주의자인 이승만이 아니라 중도파였고, 이승만은 미 군정의 정책에 사사건건 반대하며 골치를 썩였다. 당초 한반도에 별반 관심이 없던 미국을 6·25 전쟁을 계기로 끌여들여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주도한 사람도 이승만이었다.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은 남북의 분단을 확고히 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좌파 세력에게 이승만은 분단의 원흉이 된다. 1980년대 이후 그들이 쓴 숱한 역사 교과서와 교양서는 이런 인식이 확산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이승만은 이미 해방 직후부터 남한에 단독정부를 세워 집권하려 했던 분단 획책자’라고 주장하는데, 그 근거가 1946년 6월 3일의 ‘정읍 선언’이었다. 광복 1년도 채 되지 않아 “남방(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자”고 한 것이 분단을 의도한 ‘빼박’ 증거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이것은 역사의 전후 맥락을 살피지 않은 대표적인 단장취의(斷章取義)격 해석이다. 지난 23일 우남네트워크 주최 학술세미나에서 박명수 서울신대 명예교수는 소련 측 자료 등을 인용해 “이승만은 1945년 말 자신과 김구·조만식·김일성이 참여하는 남북 지도자 회담을 열어 통일 정부를 건설하려 했으나 김일성의 반대로 실패했다”고 했다.
김일성의 입장에선 이 회담에 참여할 필요가 없었는데, 이미 1945년 9월 지중해 진출에 실패한 소련의 스탈린은 만주 장악을 위해 ‘북한에 정권을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946년 2월 38선 이북에 수립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화폐와 군대를 갖춘 사실상의 정부였다. 정읍 선언 4개월 전의 일이었다.
김일성에게 권력이 집중된 북한 정권이 들어선 지 한 달 뒤, 소련은 미국과 미소 공동위원회를 열었다. 북한에 세운 소련의 위성 공산국가를 남한까지 연장(延長)함으로써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려는 의도였다. 누구보다 국제 정세에 밝았던 이승만은 무주공산의 혼란에 빠져 있던 남한에 임시정부를 세운 뒤 국제사회와 연대해 통일 민주정부를 수립한다는 차선책을 택했다. 결국 이것이 대한민국 수립의 기틀이 됐다. 77년이 흐른 지금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 속에서 번영하고 있다. 이승만의 선택이 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