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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켓은 김정은이 쏘고 욕은 우리 쪽이 먹고
    스크랩된 좋은글들 2023. 6. 8. 09:19

    얼마 전 김정은이 로켓을 발사했을 때 서울에 경계 경보가 울렸다. 경보가 왜 울렸는지, 어떻게 하라는 건지 설명이 없어 놀란 사람들이 화를 냈다. 더구나 새벽 시간이었으니 화가 더 났을 것이다. 그런데 카카오톡 등에 당국에 대한 비난이 빗발쳤다는 얘기를 듣고 로켓 도발을 한 것은 김정은인데 욕먹는 것은 김정은이 아니라 경보를 발령한 우리 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보 내용이 허술했다고 해도 나중에 북 로켓 때문이란 것을 알게 됐다면 원인 제공자인 김정은에 대한 비판이 먼저일 텐데 경보 발령에 대한 비난이 이를 압도했다.

     

    김정은은 멀리 있고 우리 당국은 눈앞에 있다. 김정은 도발은 늘 하는 익숙한 것이고 우리 당국 실수는 사람을 놀라게 해서 화를 돋운다. 그래서 그러려니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다. 도발은 북한이 했는데 비난은 우리 쪽으로 하는 일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2010년 천안함이 북한에 폭침당하자 우리 사회 다수는 북한 비판이 아니라 우리 정부 비난에 열을 올렸다. 지금은 상상이 안 되지만 폭침 직후인 그해 4월 여론조사에서 ‘북한 도발’이라는 정부 발표를 믿지 않는다는 사람이 무려 60%에 달했다. 천안함 침몰이 북한 아닌 우리 정부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사건 초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고 해도 그런 일을 벌일 곳이 북한 말고 어디 있는가. 우리 군인이 46명이나 죽고 이들을 구조하는 과정에서 다시 10명이 사망하는 비극 앞에서 드러난 우리 자화상이었다. 당시 지식인들 중에는 “손에 장을 지진다고 해도 북한 소행이란 걸 안 믿는다”는 풍조가 만연했다. 또 다른 의미에서 우리는 정말 놀라운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지금 여론조사를 하면 북한 소행이라고 답하는 국민이 더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히 믿지 않는 사람도 꽤 있을 것이다. 며칠 전 민주당 혁신위원장으로 임명됐던 사람이 그중 한 명이다. 심지어 이 사람은 천안함이 ‘자폭’했다고 했다. 천안함 장병 누군가 배에 폭탄을 심어 터뜨렸다는 것인데 이 황당한 주장에 우리 국민 상당수가 동조할 수 있다고 본다. 대장동 사건이 ‘윤석열 게이트’라는 국민이 40%에 달하는 지경이다. ‘(자폭은) 아니겠지만, 그랬으면 좋겠다’라고 바라는 사람도 많을지 모른다. 이 사람을 추천했다는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도 그런 생각일 것으로 본다.

     

    민주당 수석대변인이 천안함 함장을 향해 “부하를 다 죽여놓고 무슨 낯짝으로…”라고 비난한 것도 다르지 않다. 천안함 장병을 죽인 것은 북한인데 우리 해군 함장이 죽였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에서 침몰한 해군 함정은 수백 척에 달한다. 그 침몰된 배의 함장에게 ‘네가 부하를 다 죽였다’고 비난했다는 얘기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오직 한국에서만 이런 주장이 나온다. 함장이 배와 함께 침몰해 죽지 않았다는 비난도 한다. 과거 군국 일본 해군 일부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영화를 많이 본 탓인지 함장이 배와 함께 죽는 게 관행인 것으로 오해하는 것 같다. 미국 해군에서 탈출할 수 있는데도 일부러 탈출하지 않은 함장은 없는 것으로 안다.

     

    더 올라가보면 6·25 남침은 북한이 했는데 원인 제공을 한국이 했다는 주장이 ‘수정주의 학설’이라면서 한 때 국내에서 인기를 끌기도 했다. 지금도 운동권들은 꼬리를 머리로 만든 이 본말전도의 이론을 신봉하고 있다. 이런 식이면 침략을 당한 모든 나라가 원인 제공을 했다고 만들 수 있다. 이들은 핵 위협을 하는 것은 북한인데도, 사드를 배치한 우리 정부를 비난한다. 중국 경호원들에게 우리 사진 기자가 집단 폭행을 당해 실명 위기를 겪었는데, 우리 기자가 잘못한 것이라고 한다. 이제는 침략은 러시아가 했는데 원인 제공을 우크라이나가 했다고 한다. 코로나는 중국에서 번졌는데 미국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민주당 혁신위원장이란 사람이 이런 주장을 거의 빼놓지 않고 다 했다. 그는 그런 생각을 가진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일 뿐이다.

    이런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다수가 될 수 없고 돼서도 안 되지만 부지불식간에 이들의 사고방식이 꽤 퍼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북핵 위협 때문에 2016년 반입한 사드에 대해서도 거의 40% 여론이 반대했다. 어쩌자는 것인가.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고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흐려지는 일은 북한 관련 문제에선 거의 예외 없이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이번 북한 로켓 발사 때 ‘북 로켓 발사 때문’이라고 경계 경보에서 밝혔어도 “정부가 불안을 조성해 안보 장사를 한다”는 비난이 상당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실제 인터넷 여론 상당수가 이런 투였다고 한다.

     

    글로벌 기업에서 한국에 발령을 내면 ‘생명 수당’을 준다. 치안 불안이 아닌 전쟁 위험 때문에 생명 수당을 주는 대상국은 한국 대만 등 극소수라고 한다. 우리에겐 이상하지만 세계는 한국이 처한 지정학을 그렇게 본다. 우리의 현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보는 것이 더 정확할 수 있다. 다른 일은 몰라도 안보 문제만큼은 본말과 선후, 경중을 생각했으면 한다.

    2023년 6월 8일  조선일보 양상훈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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