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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참신앙스크랩된 좋은글들 2023. 6. 25. 15:29
안중근 의사를 떠올리면 먼저 일제 치하의 당시 한국 교회를 대표하던 어른들이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대해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그릇된 판단을 내림으로써 여러 가지 과오를 범한 데 대해, 나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연대적 책임감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일제 당시의 제도교회가올바르게 하느님의 백성을 인도했다고보기 힘든, 한국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친일적인 행위가 있었음을 한국 가톨릭교회를 대표하는 한 사람으로 마음 아파합니다. 이 모든 과오에 대해서 교회를 대표하는 한 사람으로서, 사과를 하라면 사과할 것이며 속죄를 해야 된다면 속죄로 해결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문제 해결이 만족스럽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 신비체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과거나 현재나 한폼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분의 지체인 지역교회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역사를 통해 그 과오를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그리고 싫든 좋든, 지고 온 과거의 짐을 청산하는 자리가 앞으로더 많이 주어져 우리 모두흔쾌히 참회할수 있는 시간이 있기를기대합니다.
안중근 의사의 실천 신앙.
우리가 안중근 의사의 삶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그리스도 신자로서 이땅의 복음화와 하느님 나라의 임하짐을 위해, 또한 우리 민족의 자존(自尊)과 국권수호를 위해 이웃사랑과 정의 실현, 동양의 평화, 나아가 세계 평화를 위해 자신의 전 존재를 자신의 목숨까지 아낌없이 바친 분이리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애국애족심과 하느님에 대한 믿음, 이웃에 대한 사랑때문이었습니다.
이분이 살았던 시대는 민족사에 있어서 격동의 시대였습니다. 나라의 운명은 외세 열강의 침략에 의해 풍전등화와 같았으며,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민중의 생존권마저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교회사적으로도 중요한시대였습니다.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로 점철되던 박해시대가 끝나고 신앙과 선교활동의 자유를 획득하던 시기였으며 지하에 숨어 있던 교회가 지상교회로 새롭게 건설되던 시대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분은 나라를 위해, 교회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바쳤습니다. 세례를받은직후부터 여러 지역을순회하면서 전도 강연을 하였는데, 정열적인 전교 활동과 논리정연한 교리 강론을 통해 다른 지역보다 늦게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황해도지역에 신앙의 불꽃이 일어나도록하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분이 부친(안태훈) 과 함께 개척한 청계동 공소는 황해도 내에서 두 번째의 본당으로 설정되었으며, 본당설정 후불과2년 만에 25개 공소에 1천4백여 명의 신자라는 경이적인 전교 성과를 가져왔습니다.
민족복음화에 불타는 열정과 단 한 명의 영혼이라도 하느님의 품으로 이끌겠다는 애덕정신은 독립전쟁 중에도 그대로 계속되었습니다.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동료들에게 교리를 설명하고 세례를 베풀었으며, 순국하기 직전에는 자신의 변호를 맡았던 일본인 변호사에게 가톨릭 신앙을 가질 것을 유언으로 남기기까지 하였습니다.
정의구현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투신하였습니다. 교리 강연을 할 때에는 인간의 존엄성을 가장 먼저 말씀할 정도로 인권과 사회정의에 대해 투철한 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또 부정부패와 불의에 대항하여 끝까지 투쟁했으며, 부당하게 인권을 침해당하는 억눌리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서는 수백 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뛰어 다니면서 그들의 권익을 되찾아 주고자 활동하였습니다.
이밖에 두 곳에 학교를 설립하여 민중을 교육하는 한편, 국채상환 운동과 식산진흥(殖産振興)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애국애족정신을 몸소 실천하였습니다. 이런 민권수호 활동과 애국계몽 운동은 물론 그리스도교적인 사랑과 정의에 바탕을 둔 것이었습니다.
평화의 실현을 위해서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의거 후, 심문 과정과 재판 과정을 통해 누누이 밝힌 바와 같이, 세계 열강들이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 제국주의적인 팽창을 시도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어떻게 하면 동양의 평화, 더 나아가 세계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모색하였습니다. 그러한 고민과 노력은 비록 완성되지는 못했지만, 옥중에서 집필한 『동양평화론』으로 남아 있습니다.
한편, 이분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의병 독립군 부대의 위치와 전력이 노출될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포로들을 무기까지 내주어 석방했으며, 여기에 반대하는 동료들에게 “우리가 싸우는 것은 우리 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해서이지, 결코 일본인을 모조리 죽이는 것은 아니다 라고 말했다 합니다.
또 자신의 마지막 유고( 遺稿)인 『동양평화론』을 탈고할 때까지는 사형 집행을 연기하겠다는 일본의 약속을 믿고 공소권마저 포기하였습니다. 인간에 대한 그분의 신뢰는 이처럼 참으로 숭고한 것이었습니다.
총알에 십자가 새기고
무엇보다도 이분의 삶은 크리스찬 생활의 모범이었습니다.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소명 실천에 투철 하였을 뿐 아니라 기도 생활과 수덕생활에도 철저했던 분이었습니다.
독립전쟁을 수행하면서도 히루도 빠짐없이 기도했고, 우리 나라와 민족의 존엄을 박탈한 적장 이등박문을 제거할 때에도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미움이 아니고 나라와 민족의 유린된 존엄성과 자유를 위한 의거로서 행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의거가 성공하도록 총알에 십자가를 새기고 기도할 정도로 삶 전체를 기도로 바친 분이었습니다
또 장남을 성직자로 키워 달라는 유언을 가족에게 남겼으며, 성직자들에게는 민족 복음화를 위한 배전의 노력을 당부했고, 일본 당국에 대해서는 기왕 자신을 처형코자 한다면 예수님이 수난하신 성 금요일에 처형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만큼 가톨릭 신앙은 이분의 인생관, 사회관,국가관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참으로 이분은 자신의 생애를 그리스도의 생애와 일치시키고자 하였던 분이었습니다. 흔히 우리는 신자들의 생활에서 신앙과 현실 생활의 괴리를 많이 보게 됩니다. 신자로서 주일날 성당에 나올 때나 사업가로서 또는 정치인으로서의 활동사이에서 조화를 찾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특히 정치하는 분들이 정치나 경제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인간 존엄성과 사회정의에 대한 가르침을 잘 알고 정치인으로서 실천에 옮기려고 노력한다면 좋은 성과를 많이 얻을 수 있을 터인데, 그런 인식을 가진 분을 보기가 대단히 힘듭니다.
안중근 의사는 애국계몽 운동과 국권회복 운동의 선구자였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투신했던 평신도사도직 활동의 모범자였습니다. 이분은 이 땅에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실현코자 했고, 그러한 뜻과 열정이 민족복음화를 위한 전교 활동과 민권수호 활동 애국계몽 운동과 국권회복 운동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이분의 활동에는 하느님 백성의 일원으로서의 투철한 신앙이 밑받침되고 있었음을 믿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는 그 동안 이분의 신앙이나 영성에 관해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신자들 사이에는 이분이 가톨릭 신자였다는 사실마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분을 올바르게 평가하지 못했던 것은 이분의 의거행위가 ?살인은 불가하다’는 가톨릭 교리와 상치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때문에 일부에서는 그의 신앙과 민족운동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인식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국내외 학계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의병 운동을 독립전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이등박문을 저격한 것은 독립전쟁의 한 전략이었던 것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분도 심문 과정과 재판 과정을 통해 분명하게 말씀한 바가 있습니다. 자신의 의거는 나라와 민족을 지켜야 할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란 군인의 신분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행한 투행위였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했던 것입니다.
분리될 수 없는 신앙심과 조국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에는 국제관계에는 자연법과 함께 불변의 가치를 지닌 보편적 윤리가 있고, 그것은 전쟁시에도 존중되어야 한다” 는 뜻의 말씀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주권을 존중하고 인간의 모든 기본권을 수호하는 것 등입니다. 따라서 이런 원리를 고의로 위반하는 행동과 그 행동을 종용하는 명령은 범죄행위가 아닐 수 없으며, 맹목적 복종이 이런 명령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변명이 될 수 없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이렇게 악랄한 행위 중에는 무엇보다도 먼저 “계획적으로 국민 전체가 국가나 소수의 이민족을 전멸하는 행위를 들어야 하며, 이것은 무서운 범죄행위로 철저히 규탄되어야 한다. 반대로 이런 범죄를 명령하는 사람들에게 드러나게 반항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의 용기는 찬사를 받을 만합니다."
이 대목은 특히 2차대전중 나치가 자행한 여러 나라의 침범, 다른 나라의 통폐합, 유태인 대학살을 특별히 염두에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독일 군인일지라도 총통인 히틀러의 명령에 저항했을 때의 그 용기는 찬사를 받을 만하다는 뜻입니다. 결코 군인이기 때문에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적으로도 충분히 뒷받침됩니다. 당시 우리 나라는 일본의 무력 침략 앞에 민족의 존엄을 상실하고 국권도 앓어 가고 있었습니다. 나라를 구하는 힘이 임금이나 정부에는 없었고 오히려 조정은 친일세력이 권력을 잡고 있으면서 나라를 팔아 넘길 위험 앞에 있었습니다. 이럴때에 나라를 지키는의무는 자연히 민족공동체 성원 모두에게 있는것입니다. 이 땅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목숨을 바쳐 이 의무를 다하여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에서 나라를 지키는 길로써 평화적 방법은 완전히 막혀 있었습니다. 1907년 헤이그에 밀사를 보내어 열강에게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려 했으나 실패하였습니다. 나라 안에서 실권을 잡고 있는 일제는 ‘신문지법, 보안법’들을 만들어 언론 출판에 대한 탄압을 가중시켰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억압하였습니다. 심지어 나라를 지키기 위한 대한제국 군대까지 해산시켰습니다.
이럴 때, 국민이 나라를 지키는 의무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해외로 나가서 군대를 조직하여 일제와 맞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간 길이 바로 이 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대한제국 말기에 일제
의 무력침략 앞에 풍전등화와 같았던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이 땅의 국민들이 자구책으로 한 모든 행위는 정당방위 의거 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맞서 싸우고 일제
침략의 괴수인 이등박문의 제거를 국권회복을 위한 전쟁 수행에 있어서 필요한 전술전략으로 보고 이를 감행한 것 역시 타당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신앙심과 조국애는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때문에 교회는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국가 보위를 위해 투신할 것을 권장하고 있고, 국가 방위를 위한 전투중에 발생한 살상행위에 대해서는 단죄하지 않고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조국애를 실천한 독립운동의 선구자입니다. 우리가 이분의 신앙과 삶을 살피고 추모하는 것도 그 삶이 숭고했으며, 그 신앙과 민족운동이 우리에게 큰 귀감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분이 가톨릭 신자였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만으로, 또한 의거가 가톨릭 신앙과 상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만으로 그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분이 갖고 있었던 불타는 신앙과 조국애를 본받기 위해,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친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김수환추기경의 명상록에서 보고 베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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