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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 를 생각하며낙서장 2024. 2. 4. 20:11
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은 하나밖에 없는 자기의 생명을 바치는 것이다. 나라를 위하여 지식과 기술을 바치는 일은 쉬운 일이다. 돈을 바치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천상천하에 오직 하나밖에 없고 오직 한번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을 나라에 바치는 일은 가장 어려운 일이다.
목숨을 바치는 것은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다. 나는 조국(祖國)을 위하여 목숨을 던진 사람 앞에서는 무
조건 고개가 숙여진다. 그것은 살신성인의 고귀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안(安)의사는 황해도의 뼈대 있는 집안 부친 안태훈과 모친 조마리아사이에서 태어나 어려서 한학(漢學)을 열심히 배우고 17세에 천주교에 입교하여 영세를 받았다. 안의사의 뜻은 구국제민 (救國濟民)에 있었고, 국권회복(國權回復)에 있었다.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둥불처럼 꺼져가는 비운을 바라보며 안중근은 고민하고 비분강개했다.
안의사는 교육을 일으키고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나라의 힘을 기르는 근본이라고 믿고 안중근(安重根) 의사는 1906년 막대한 가재를 모두 팔아 진남포(鎭南浦)에 두 학교를 건립했다. 하나는 삼흥(三興)학교요, 또 하나는 돈의(軟義)학교다 ‘삼홍(三興)’은 세 가지를 일으키자는것인데 첫째는 홍국(興國) 즉 나라를 일으키자는 것이요, 둘째는 홍민(興民) 즉 민족을 일으키자는 것이요, 셋째 는 홍사(興士) 즉 선비를 일으키자는 것이다
돈의 (敎義)J는 의(義)에 두럽고, 돈독하다는 뜻이다. 두 학교의 이름에 깊은 뜻이 담겨 있다. 그는 구국(救國)의 큰 뜻을 펴기 위하여 학교를 친지에게 맡기고, 북간도(北間道)로 갔다. 그는 의병(義兵)운동에 투신하여 일본군과 용감하게 싸웠다.
1909년 열두 동지를 규합하여 단지동맹(斷指同盟)을 맺었다. 안의사는 약지(藥指)의 마지막 마디를 잘라 붉은 선혈(蘇血)로 태극기에 「大韓獨立」의 네 글자를 썼다.
1909년 10월 26일 아침 10시. 하얼빈 역두에서 동양 평화(東洋平和)의 파과자요 나라의 원수인 이또(伊藤)에게 붉은 의탄(義彈)을 던졌다.
안의사의 모친 조마리아여사는 아들의 사형선고 소식을 듣고 옳은 일을 하고 받는 것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大義)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孝道)라고 했다. 과연 안중근 의사 어머니답다.
일본의 아사히(朝日)신문은 「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고 안의사의 어머니를 예찬했다고 한다. 안의사는 어머니가 손수 지어 보내신 하얀 명주 수의(壽衣)를 입고 하늘나라로 갔다.
교육자요, 문장가요, 또 뛰어난 서예가(書藝家)였던 안의사는 여순 감옥에 있는 동안 2월에서 3월 16일까지 안의사의 고결한 인격에 감동을 받은 많은 일본인에게 정성껏 글씨를 써주었다.
약 200점의 유묵을 남겼으며 이중에 알려진 것은 60여점이 되고 26점은 국가 보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 이다. 이(利)를 보면 의(義)를 생각하고 나라가 위태로운 것을 보면 목숨을 바치어라. 〈논어〉 헌문편(憲問篇)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이것이 지사(志士)의 늠름한 기상(氣像)이요, 선비의 용감한 정신이다.
안의사는 이것을 폼소 실천했다. 남산 안의사 기념관 앞에 우뚝 서 있는,화강석에 큰 글자로 아로새긴 이 글씨는 천추만대에 빛나는 안의사의 위대한 애국혼(愛國塊)의 상징이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 민족의 정기(正氣)를 높이 세우신 이며 대장부(大文夫)의 한국혼(韓國塊)을 세계에 떨치신 열사(烈士)로서 . 우리가 영원히 기억할 의인이라 생각한다.
2024년 2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