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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이라고 부르면 친일파라는 황당한 기준
    스크랩된 좋은글들 2024. 8. 15. 07:14
     
     

    광복회는 “일본 주장대로 식민 지배 합법화를 꾀하는 지식인이나 단체’를 ‘뉴라이트’로 규정하면서 ‘뉴라이트 판별법’ 9가지를 제시했다. ‘뉴라이트’를 ‘친일파’로 몰아가기 위한 것이다. 9가지가 모두 문제가 있어 보이지만 특히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이라고 한다’는 판별 기준은 황당하기까지 한다. 이 주장대로라면 ‘이승만 건국 대통령’을 주장하거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친일파’가 되는 셈이다.

     

    광복회와 이종찬 회장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을 건국 시점으로 보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이기도 하다. 건국 시점을 1919년으로 보든, 1948년으로 보든 ‘건국 대통령 이승만’이라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보면 친일파라는 딱지를 붙이기 앞서 이승만이 아니면 도대체 누가 ‘건국 대통령’인지 답부터 내놔야 한다.

     

    광복회는 임시정부를 폄훼하면 뉴라이트라고 주장하는데, 그 대표적 세력은 다름 아닌 북한이다. 북은 김일성 중심의 독립운동을 주장하기 위해 임정에 대해 ‘사대주의적 매국배족행위’라고 역사책에서 규정했다. 일부에서 제기하는 ‘친일파 이승만’ 주장도 왜곡이다. 이들은 대한민국 초대 내각에 친일파를 대거 등용했다고 주장하지만, 부통령 이시영, 국무총리 이범석, 농림장관 조봉암 등 대부분이 항일·독립운동가였다.

     

    이 대통령은 뼛속부터 반일(反日)이었다. 2차 대전의 마무리를 위해 미국 등 연합국과 일본이 체결한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일본이 반환해야 할 땅에 독도가 누락되자 이승만은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라인으로 불리는 ‘평화선’을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그때 ‘평화선’ 선포와 의용수비대 독도 파견이 없었으면 울릉도에서 50해리 정도 떨어진 ‘독도’의 실효적 지배는 불가능했다. 한미 동맹의 기초를 닦은 이 대통령이지만 1954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일 관계 정상화를 요구하자 회담장에서 퇴장해버렸다.

     

    광복회가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임명을 이유로 정부를 ‘친일’로 몰아가고 여기에 더불어민주당과 야당들이 ‘친일 몰이’에 나서면서 정부의 79주년 광복절 기념식에 광복회와 야당들이 불참하기로 했다. 대한민국을 부정하려는 세력의 ‘이승만=친일파’ 주장에 광복회가 왜 동조하고 나섰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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