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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수대교 붕괴 30주기누나 소원 대신 이룬 이상엽씨
    스크랩된 좋은글들 2024. 10. 19. 06:56
    "성수대교에서 누나 잃었지만… 지옥에 살지 천국에 살지는 내 선택"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사고 때 잃은 누나 이승영씨의 소원을 대신 이뤄가고 있는 이상엽씨. 지난 14일 불이 켜진 성수대교 아래에 상엽씨가 누나의 유고시집 '연기는 하늘로'를 들고 서 있다. 사고 30년을 맞은 올해, 승영씨의 14가지 소원은 대부분 이뤄져 있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성수대교가 어이없이 무너져 내렸다. 21일 오전 7시 40분쯤 서울 성동구 성수동과 강남구 압구정동을 잇는 성수대교의 북단 5번째와 6번째 교각 사이 상판 50여m가 갑자기 내려앉으면서 다리를 지나던 서울5사8909 한성운수 16번 시내버스 등 차량 6대가 20여m 아래로 추락했다.”(조선일보 1994년 10월 22일 자 1면)

     

    스무 살이던 이승영씨는 그 16번 시내버스 안에서 목숨을 잃었다. 당시 서울교대 국어교육과 3학년. 강북의 초등학교로 교생 실습을 나간 지 닷새 만에 주검으로 돌아온 것이다. 참척(慘慽)의 슬픔 속에서 유품을 정리하던 어머니 김영순(74·당시 44세)씨는 승영씨가 남긴 일기장을 발견했다. ‘내가 일생 동안 하고 싶은 일’이라며 14가지 소원을 적어 놓았다.

    그래픽=송윤혜
     

    “100명 이상에게 전도한다. 장학금 제도를 만든다. 강원도에 이동 도서관을 만든다. 한 명 이상 입양한다. 단기 선교사로 떠난다. 시각장애인을 위해 뭔가를 한다….” 군인이던 남편과 사별한 지 11개월 만에 딸마저 황망하게 잃었지만, 승영씨의 일기장을 본 김씨는 단박에 그 시련을 받아들였다. 지난 14일 성수대교 남단에서 만난 아들 이상엽(48)씨는 “누나는 사랑 자체가 삶의 목적이 돼야 한다는 걸 일찍이 실천한 사람이었다”고 술회했다.

     

    어머니는 딸의 시신을 고려대 의대에 해부 실습용으로 기증했다. “죽으면 장기(臟器)를 남에게 주겠다”는 딸의 약속을 절반만큼이라도 들어주고 싶었다. 그 일을 시작으로 모자(母子)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승영씨 대신 일기장에 적힌 소원을 하나씩 이뤄 나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상엽씨는 결혼 후 누나의 뜻을 이어 두 아이를 입양했다. 오는 21일은 성수대교 붕괴 30주기. 승영씨의 소원은 대부분 현실이 돼 있었다.

    성수대교가 내려앉아 32명이 사망한 참사를 보도한 조선일보 1994년 10월 22일자 1면. 기사 제목은 "나라가 이 지경... 서울이 부끄럽다"였다.

    ◇보상금 전액 기부, 승영장학회 출범

    1994년은 한국 방문의 해였다. 김일성이 사망하고 기록적 폭염을 겪고 ‘지존파’가 검거된 그해에 한국 사회는 성수대교 붕괴를 목격했다. 우리가 믿던 세계가 무너졌다. 균열 등 여러 위험 신호를 무시하고 상판만 땜질했다가 벌어진 이 참담한 사고를 계기로 한강의 모든 다리 정밀 안전 검사를 했다.

    -사고 당시를 어떻게 기억하십니까.

    “저는 고3이었습니다. 카이스트 입시를 이틀 앞둔 날 아침에 그런 사고가 났다길래 학교에서 친구들끼리 ‘(책임자들을) 다 사형해야 한다’고 농담을 했지요. 그날 저녁 선생님이 저를 불렀고 누나의 사고 소식을 전했습니다.”

    당시 성수대교 붕괴로 32명이 사망했다. 사망자 대부분(29명)은 뒤집히며 추락한 16번 버스에서 나왔다. 등교하던 무학여고 학생 8명도 희생됐다.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40분쯤 무너진 성수대교의 모습. 구조 작업을 하고 있다. /조선일보DB
     

    -실감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카이스트 시험을 보러 갔고 낙방했습니다. 주변에서 ‘네가 상엽이구나’ 하며 탄식했고, 모두가 저희 가족을 위해 기도했어요. 너무 혼란스러워 일단 입시에만 집중했습니다.”

    다행히 그해 고려대 산업공학과에 합격했지만, 입학 후 방황이 시작됐다. “주변의 관심이 너무 부담스러웠습니다. 누나와 사이가 좋았거든요. 그렇게 착하고 의욕이 넘치던 사람을 한순간에 앗아가다니, 만사에 회의가 들었습니다.”

    -그 방황은 어떻게 끝났나요.

    “일단 교회부터 떠났어요. 믿을 이유가 없다는 핑계가 생긴 거죠. 절에도 가보고 대순진리회도 경험했습니다. 그러다 5월에 큰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한 달 만에 병원에서 제비가 포르르 날아가는 모습을 보며 기억이 돌아왔는데 그 순간 ‘사랑 그 자체가 목적이 돼야 한다’는 누나의 메시지가 와 닿았습니다.”

    -어머니는 어떠셨습니까.

    “1993년에 남편을, 1994년에는 딸을 잃고, 1995년엔 아들마저 잃을 뻔했지요. 누구는 ‘악귀가 들렸다’ ‘회개하라’고도 했어요. 무너지고 망가져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딸을 잃은 그때부터 ‘네 소원을 어미가 모두 이뤄주겠다’는 계획을 하고 계셨어요.”

    승영씨 가족은 사고 보상금으로 받은 2억5000만원을 모두 교회(남서울교회)에 기부해 ‘승영장학회’를 만들었다. 형편이 어려운 신학생들이 지원을 받았고, 장학생 중 한 명은 이어달리듯 인천 부평에 복지마을을 만들어 승영씨의 또 다른 소원을 이뤘다. 승영장학회는 강원 인제의 한 포병 연대에 이동 도서관 차량을 기증해 ‘이동 도서관을 만든다’는 소원도 실천했다. 남서울교회 오성섭 장로는 “한 해에 5~10명 정도 장학금을 지원했으니 승영장학생을 다 합치면 200명쯤 될 것”이라고 전했다.

    사고 직후 어머니는 승영씨가 초등학생 때 쓴 시(詩)를 묶어 출간했다. ‘신앙 소설을 쓴다’는 소원도 실현된 셈이다. 시집 제목이 된 시 ‘연기는 하늘로’에 승영씨는 이렇게 썼다. “새까만 굴뚝으로/ 지나왔으면서도/ 새하얀 너는 대체/ 무슨 요술을 썼지?/ 가만가만 굴뚝에서/ 나오자마자/ 사라져버리는 너는/ 참 좋겠다/ 바람의 날개 타고/ 저 먼 하늘나라/ 훨훨 올라가서/ 구경할 테니까….”

    이승영씨 유고시집의 제목이 된 시(詩) '연기는 하늘로'. /이상엽씨 제공
     

    -누나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우리 가족 중에 마음이 가장 단단하고 사랑이 가장 큰 사람. 판사가 되고 싶어 했는데 부모님 뜻에 따라 교대로 진학했습니다. 어머니는 ‘법대를 보내야 했다’고 후회하셨지요. 하필이면 교생 실습을 가다 사고를 당했으니까요.”

    -특별한 추억이 있습니까.

    “두 살 차이지만 일찌감치 서열 정리가 끝났어요. 저보다 똑똑했고 올바른 사람이었지요. 우산을 자주 놓고 다녀서 비오는 날이면 제가 누나 학교 앞으로 마중을 갔어요. 여고 앞에서 우산 들고 서 있기가 얼마나 쑥스럽던지.”

     

    ◇사랑을 나누는 걸 미루지 말자

    -사고로 가장 크게 바뀐 게 있다면.

    “사실 그 전에는 우리 가족의 성공과 행복이 우선이었습니다. 먼저 성공하고 나서 주변을 돌보자. 하지만 갑자기 누나마저 잃으면서 인생관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내일 어떻게 될지 한 치 앞도 모르는데 내 것을 챙기며 아등바등하기보다는 필요한 곳에 바로바로 사랑을 실천하는 식으로요.”

    -누나의 14가지 소원은 원래 알고 있었나요.

    “일기장을 보고야 알았죠. 제가 5학년 때 아버지가 남자아이를 입양하겠다고 데려왔는데, 어머니와 저는 주저했고 누나만 찬성했어요. 누나는 사랑을 나누는 걸 미루지 않는 삶을 이미 살고 있었던 거예요. 죽어서도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잖아요.”

    일기장에 적힌 ‘한 명 이상 입양한다’는 소원은 동생이, ‘단기 선교사로 떠난다’는 소원은 어머니가 실천했다. 상엽씨는 2009년생 셋째 아들(하윤), 2013년생 넷째 딸(하린)을 신생아 때 입양했다. “2005년생인 장녀 하빈, 2006년생인 장남 하준과 함께 ‘아들 둘, 딸 둘’ 황금 균형을 이뤘다고 생각해요.”

    -입양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텐데요.

    “저는 사실 막연하게 ‘나중에 은퇴해서 보육원을 운영하지 뭐’라고 생각했지요. 입양은 아내의 결정이었습니다. ‘버킷 리스트처럼 두지 말고 누나의 뜻이 진심으로 이어지는 게 더 중요하다’고 아내가 제게 가르침을 준 거예요. ”

    -네 아이를 키우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만.

    “10년간 똥 기저귀를 갈았어요(웃음). 여섯 식구가 복작복작합니다. 30평 집에 화장실이 하나뿐이라 아침마다 ‘빨리 나오라’고 문 두드리는 게 일상이지요.”

    이상엽씨 가족이 지난 2016년 중국 우루무치 여행에서 함께 찍은 사진. 왼쪽부터 상엽씨의 어머니 김영순씨, 둘째 하준, 상엽씨 아내 고서경씨, 첫째 하빈, 막내 하린, 셋째 하윤, 상엽씨. /이상엽씨 제공

    -공개 입양을 하셨나요.

    “처음엔 비밀로 하려고 했어요. 아내가 일부러 바깥 활동을 자제하다가 셋째 하윤이를 데리고 나타났는데 이상한 소문이 났습니다. 하윤이가 저랑 너무 닮았어요. ‘밖에서 낳아 온 자식 아니냐’는 말이 돌아서 어쩔 수 없이 입양을 공개했습니다(웃음).”

     

    -누나는 한 명 이상이라고 했는데, 넷째도 입양한 이유가 있나요.

    “16평짜리 집에 다섯 식구가 살고 있었는데 사실 힘들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넷째를 입양하라’는 음성(?)이 들렸어요. 저는 ‘그럼 기적을 보여달라’고 응답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났나요?

    “갑자기 회사에서 보직이 바뀌고 금전적 여력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16평 아파트를 월세로 돌리고 ‘몰빵(전액 투자)’한 주식은 상장폐지 위기까지 갔다가 기사회생해 5배나 올랐지요. 그 돈으로 일원동 30평 집(다가구 주택)을 샀어요. 6명이 살 만한 환경이 갖춰진 거예요.”

    -기도와 신앙이 매우 자본주의적이네요.

    “성공과 돈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관심이 많아요(웃음). 다만 제 시간과 돈을 이웃과 나누며 살아갈 줄도 알게 된 거예요.”

    서울교대 동아리방에 앉아 있는 고(故) 이승영씨. 사고 한 달 전쯤 찍은 사진이다. /이상엽씨 제공

    ◇자연스럽게 이뤄진 소원들

    상엽씨는 현재 우즈베키스탄과 연관된 여행사를 운영하면서 주식 투자로 생활한다. 가족은 여전히 30평 집에 산다. 더 호화로운 삶을 좇지는 않는다.

    -만난 적 없는 고모(승영씨)를 아이들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고모가 성수대교 사고 때 죽었고, 그 덕분에(그는 실제로 이 표현을 썼다) 우리 삶에 큰 전환이 있었다는 정도는 알아요. 어머니와 제가 하는 일을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없고요.”

    -형제가 많아 불만 같은 건 없나요.

    “터를 잡은 곳이 강남이다 보니 주변에 정말 돈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 부족함이 없는 아이가 많은 것 같아요. 하지만 저희 환경은 그렇지 않다는 걸 어릴 적부터 알아서 그러는지 욕심을 내진 않습니다.”

    -아이들이 착하네요.

    “아이가 많아지면 부모의 관심은 줄어들 수밖에 없어요. 사춘기를 겪어도 우리가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고요. 어느 한 아이에게 집중하지 않게 되는데 오히려 그게 좋다고 하더라고요. 친구들과 비교하면 더 많은 자유를 누리죠.”

    -어머니께 물려받은 건 없나요.

    “IMF 외환 위기 때 어머니가 ‘넓은 집은 필요 없다’면서 사당동 아파트를 정리해 오피스텔 5채를 샀고 그중 한 곳에서 둘이 살았습니다. 세를 받아 생활했는데 어머니가 2001~2002년에 오피스텔을 모두 정리해 연해주에 목사관을 짓는 데 기부하셨어요. 누나의 소원 하나가 또 이뤄진 겁니다.”

    -외아들인데 억울하지 않았나요.

    “저 결혼할 때 어머니가 보증금 4500만원짜리 옥탑방과 타시던 액센트 자동차 명의를 돌려주셨습니다. 지금은 집도 있고 가족 모두 사랑을 실천하고 있으니 부족한 것도 억울한 것도 없어요.”

    처음 연락이 닿았을 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그의 첫마디는 “벌써 그런가요?”였다. 30년 전 비극은 이 가족에게 더 이상 상처가 아니었다. “누나의 소원을 오랜만에 다시 꼽아보니 14가지가 얼추 다 이뤄져 있더라고요. 어머니와 제가 한 것도 있고, 우리 사회가 좋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이뤄진 것도 있습니다.”

    -어떤 소원이 자연스럽게 이뤄졌나요.

    “종교 방송을 만들겠다는 건 유튜브로 이미 많은 사람이 이뤄나가고 있습니다. 맹인(시각장애인)을 위해 뭔가를 하겠다는 소원은, 최근에 시각장애인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이 화장품에 점자 표기를 하는 법안을 냈더라고요. 자기 얼굴을 볼 수 없는 사람에게도 꾸미고 가꿀 권리를 보장해 줘야 한다는 게 너무 멋졌습니다.”

    -장애인 봉사에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어머니와 작은 오피스텔에서 살 때 답답해서 고속버스 터미널 등나무 벤치 같은 데 앉아 공부하곤 했습니다. IMF 시기였는데, 지방에서 온 고속버스에서 혼자 내리는 자폐 장애인이 많았어요. 내다 버린 거예요. 그때는 ‘정박아’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을 위해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밀알학교(장애인 특수학교인 밀알학교를 운영하는 남서울은혜교회는 지난 11일 인촌상을 받았다) 일을 돕게 됐어요. 이후 영화 ‘말아톤’도 나오고 인식이 개선되면서 중증 장애인도 많은 보호를 받고 있지요. 사회가 발전하고 성숙한 겁니다”

    성수대교에 오른 이상엽씨가 도도히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고 있다. 도보로 성수대교에 오르기는 처음이라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비는 누구에게나 내립니다”

    세월이 약이라고는 하지만, 30년 전 가족을 덮친 사고를 떠올리는 상엽씨 얼굴은 평온했다. 해가 지자 그는 환하게 불을 밝힌 성수대교를 배경으로 ‘셀카’도 찍었다. “마음이 지칠 때마다 성수대교를 찾아 스스로를 채찍질한다”던 어머니는 2008년에 해외 봉사·선교를 떠났다. “복 받은 인생이에요. 은퇴할 나이에 지금도 외국에서 활기차게 살고 계시니까요. 뜻을 두신 일이 결실을 보았고,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계속하시겠다고 합니다. 자식이 속을 썩이길 하나, 남편이 속을 썩이길 하나, 하하.”

    -저라면 못 견뎠을 것 같은데요.

    “불행은 불행이죠. 그런데, 비는 누구에게나 내립니다. 행운도 불행도 모두에게 공평하게 와요. 배우자를 잃는 일, 자녀를 앞세우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핼러윈 참사 같은 경우 얼마나 황당하겠어요. 하지만 살다 보면 누구에게든 닥칠 수 있는 일이에요. 어떻게 보면 별일 아니고요.”

    이날 성수대교에는 오가는 사람이 많았다. 걸어서 오르기는 그도 처음이라고 했다. 퇴근길 정장 차림으로 ‘따릉이’를 굴리는 사람, 강아지 목줄을 잡고 걷는 사람, 운동복을 입고 바퀴가 날렵한 자전거를 타는 사람 등 모두가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 다리를 건널 때마다 어떤 생각을 하나요?

    “전혀요. 의식하지 못하고 지날 때가 많아요.”

    -사고 당시 정부를 원망하진 않았나요.

    “어느 나라, 어느 사회에서든 불의의 사고는 발생합니다. 그럴 때마다 인재(人災)라고 하지만, 욕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고 부정부패 없는 사회가 어디 있나요. 부정부패 없어도 사고는 날 수 있고요. 국가나 누구를 원망한 적 없습니다.”

    -피해자 모임이 있나요.

    “제가 알기론 없어요. 있어도 참여하지 않았을 테고요.”

     

    대교 사고 이듬해에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습니다. 10년 전에는 세월호 사고, 재작년 이맘때는 핼러윈 참사가 있었지요.

    “미래는 모르는 거예요. 세월호도 그렇고 (피해자들이) 정치적으로 이용만 당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성수대교 때도 이원종 서울시장 등이 경질됐고 건설사는 파산했어요. 우리가 원한 건 아니지만 불행한 결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사고 발생 7년 후 대법원은 사고의 직접적 원인이 동아건설의 부실시공 때문이라고 판결했다. 동아그룹은 2001년 완전 해체됐다. 지금의 성수대교는 현대건설이 1997년 7월에 완공했다.

    -다른 사고 피해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사고가 정쟁화된다고 해도) 가족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화풀이나 복수 대상이 필요한 거예요. 누나는 우리가 그 사랑을 함께 이어가고 있기 때문에 아직 살아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제가 어려움에 처하면 누군가 저를 도울 겁니다. 천국을 살 것인가 지옥을 살 것인가는 각자의 선택이에요.”

    -또 다른 계획이 있나요.

    “누나는 인생을 길게 볼 수 있는 눈을 주고 갔어요. 제가 경험한 놀라운 일들을 소설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했습니다. 스스로 믿음이 강한 사람은 아니지만 제가 겪은 사랑의 순간들을 남겨 증인이 되고 싶어요.”

    승영씨가 일기장에 남긴 소원 ‘신앙 소설을 쓴다’는 이렇게 동생의 가슴에 단단한 씨앗을 남겼다. 이 또한 언젠가 이루어질 것이다. 하늘에서 누나가 보고 있을 것이다.

     

    2024년 10월 19일 조선일보 아무튼 주말 김경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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