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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님의 포도밭 임금계산
    낙서장 2024. 12. 29. 20:58

     

    큰 포도밭을 가진 한 부자가 있었다. 그는 아침 일찍 일거리를 구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 자기 포도밭에서 일하라고 말했다. 넉넉한 품삯인 5만원을 주기로 약속했다.

     

    9시쯤 길가로 나갔다가 일거리를 찾지 못해 애쓰는 몇 사람을 보고, 당신들도 내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고 말했다. 12시와 오후 3시 에도 같은 일거리를 주었다. 그러다가 늦은 시간에 길가로 나섰다가 그때까지 일거리를 찾지 못해 애쓰는 사람을 보았다. 빈손으로 돌아가면 그의 가족들이 얼마나 실망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당신도 내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고 말했다.

     

    1시간쯤 지났다. 주인은 품삯을 지불하기 위해 포도밭으로 갔다. 종을 시켜 가장 늦게 온 사람에게 5만 원을 주고, 3, 12시에 온 사람 순서로 품삯을 주는 것이었다. 모두에게 5만 원씩을 주었다. 아침 일찍부터 왔던 일꾼은 1시간 내지 3시간씩 일한 사람도 5만 원을 받으니, 나는 훨씬 많이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그런데 주인은 그에게도 5만원을 주는 것이 아닌가! 그는 항의했다. 1시간 일한 사람과 종일 더위에 애를 쓴 사람이 똑 같이 받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인은, "나와의 약속이 5만원으로 되어 있었고, 또 그 돈이면 충분한 품삯이 아니냐?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그들의 어려움을 돕기 위해 사랑을 베푼 것이다. 그들이 적은 돈을 갖고 돌아가면 그 가족들은 어떻게 되겠느냐? 내가 한 일에 잘못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 사람이 처음보다 앞서는 일은 있을 수 있는 법이다."라고 말했다.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예수의 비유 중 하나이다.

     

    영국이 산업혁명 후 노사분규 등으로 혼란을 겪고 있을 때, 존 러스킨이 이 성경을 읽었다. 그리고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라는 저서를 남겼다. 후일에 인도의 간디가 그 책을 통해 사회경제의 새로운 방향을 암시받고 감명을 느낀 일이 있었다.

     

    지금과 같이 경제·사회적 시련기를 겪고 있는 우리들로서도 이 예수의 교훈을 통해 어떤 신앙적 지시를 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이 이야기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부정하려는 뜻으로는 볼 수없다. 본래, 예수는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을 수 있는 급진적 사회 개혁을 원한 분은 아니었다. 카이사르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여 하나님의 뜻이 카이사르의 것을 지배, 좌우할 수 있는 역사가 전개되면 서서히 역사는 정당하고 바른 궤도로 옮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도덕적 가치의 오류나 신앙적 평가를 잘못 가르치는 일이나, 인격적 파멸을 촉구하는 정신적 죄악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예수는 용서할 수 없는 책망을 가했던 것이다. 예수께서 자본주의적 경제 체제가 아닌 다른 체제 속에 살았다고 해도 어떤 급진적인 개혁을 강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찾아야 하며 누려야 할 정신적 가치와 의의를 소유하게 되면 경제, 정치 등의 피상적 문제들은 서서히 피해 없이 진행될 것이라는 생각이 예수의 뜻이었던 것 같다.

     

    그러면 예수의 교훈은 무엇을 뜻하는가. 사람은 누구나 열심히 일을 해야 하고, 또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어야 한다. 기독교는 일을 사랑하는 신앙을 가르쳐왔다. 게으름은 악이며 모든 범죄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안식일 개념도 그렇다. 6일간은 즐겁게 정성을 다해 일하고, 하루는 기쁜 안식을 취하라는 것이 구 약 때부터의 교훈이다.

     

    인간은 즐기고 싶은 본능적 심정을 갖고 있다. 즐긴다는 것은 논다는 것과 통한다. 그래서 어떻게 편하게 놀면서 일생을 보낼 수 있을까 하는 잘못된 인생관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 선조들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일을 사랑하고 열심히 일할 때 건강해지며, 유능해지고 성공과 영광을 누릴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일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는 근로정신을 소중히 여기는 종교이기 때문에 그 뜻을 올바로 받아들인 사회는 경제적 발전을 조속히 이루었다. 구태여 막스 베버 같은 학자의 의견을 빌릴 필요가 없다.

     

    나는 평양 부근 농촌에서 자랐다. 우리 마을에는 일찍부터 장로교회가 있었다. 그래서 교육과 근로정신이 어렸을 때부터 강조되어 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서울 근교의 시골에 비해 교육과 경제 수준이 2~3배는 높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마을에는 사립 초등학교가 있었고, 채소·과일·벼농사의 개선 등은 지금의 서울 주변과 큰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포도밭 주인이 다섯 차례에 걸쳐 일꾼을 밭으로 보냈다는 사실은, 사람은 일을 할 수 있고 또 일을 해야 경제적 기본 조건을 갖출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주고 있다.

     

    우리는 둥근 삼각형을 생각할 수 없듯이 게으른 그리스도인은 상상할 수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겠다. 일은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이며, 또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축복의 조건인 것이다. 만일 교회 생활에 붙잡혀 일을 못했다든지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교회 봉사에 치우쳐 마땅히 받아야 할 성적을 얻지 못하는 사례가 생긴다면, 교회는 근면과 생산적인 일의 존귀성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일을 사랑하는 일 자체가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의 조건인 것이다.

     

    물론 가난한 사람들은 돈과 수입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다고 해서 돈과 수입이 안정된 사람은 놀아도 된다는 생각은 용납될 수 없다. 오히려 그 사람들은 일이 귀하기 때문에 일을 할 수 있어야 하고, 돈을 쓰면서라도 필요한 일을 할 수 있을 때 진정 값있는 삶을 살게 된다.

     

    기독교의 기업이나 경제 윤리는 간단하다.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히 노력해서 경제적 부를 쌓으라. 그러나 그것은 너와 네 가정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과 사회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다'라는 이론이다. 그렇게 일하는 개인과 기업이 될 수 있을 때, 우리는 가난한 사람과 게으른 사람이 없는 행복한 사회를 만들게 된다. 그래서 예수는 보수에 대한 관념보다도 일에의 의무를 강조 한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다음에 있다. 오후 5시에 와서 일한 사람은 1시간밖에는 일하지 않았다. 12시에 온 사람은 6시간을 일했다. 아침 일찍 제 시간부터 일한 사람은 10시간이 걸린 셈이다. 그런데 주인은 똑같은 보수를 준 것이다. 처음부터 일한 사람이 불공평을 얘기할 수가 있다. 같은 보수를 받고 10배에 가까운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인의 생각과 판단에는 잘못이 없었다. 하루 품삯이 5만 원 정도면 자타가 인정하는 충분한 보수였고, 또 그렇게 약속을 했고 그 약속을 이행했기 때문이다.

     

    늦게 온 사람들에게는 주인이 자비를 베푼 것뿐이다. 그들도 많은 가족이 있고, 적당한 돈을 가지고 들어가지 못하면 온 가족이 굶 주림과 슬픔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또 그들도 조건이 허락되었다 면 아침 이른 시간부터 포도밭에서 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잘못 은 그들 개인보다도 사회적 여건에 있었던 것이다.

     

    왜 예수는 이런 경제관을 가르쳐주었는가. 두 가지 기본 원리와 질서 때문이다. 일을 한 사람은 누구나 그 가족들과 함께 식생활에 부족함이 없는 여건을 이룰 수 있어야 하며, 사회는 그러한 경제 질서를 확립해야 한다.

     

    이 가르침은 개인 소유를 목적으로 삼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수정과 개선을 뜻한다.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시비가 아니라, 개인의 소유 체제가 기여 체제로 바뀌어야 하며, 가난한 사람을 제쳐두 고 나만이 많은 재산을 소유하며 또 그 재력을 즐길 수 있다는 생각 은 개혁되어야 한다. 우리는 개인의 소유를 목표로 삼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 때문에 공산주의가 강세를 얻게 되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족히 짐작할 수가 있다.

     

    그래서 영국을 비롯하여 공산 세계와 대치하고 있는 사회들은 경제적 보수의 균등한 혜택을 위한 복지 제도를 택하고 있으며, 자본주의 사회들도 개인의 소유 체제를 사회적 기여 체제로 개편 해가고 있다. 다시 말하면 가난한 국민이 없고, 경제적 혜택이 고르게 베풀어질 수 있어야 경제의 발전도 속히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현대 경제의 원칙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원리는 무엇을 뜻하는가. 경제 사회에 있어서도 정의의 질서 위에 사랑의 질서가 수립되어야 한다는 원칙인 것이다. 흔히 법률·정치·경제에서는 공정의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 있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그 공정성은 실현되어야 하면서도 인간적 박애정신과 어려운 사람을 도우려고 하는 봉사정신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또 그 뜻이 이루어지는 사회 질서의 육성이 기독교의 의무이며 사명이기도 하다.

     

    오히려 예수의 비유에서는 마지막에 온 사람에게 먼저 노임을 지불했으며, 그것이 주인의 뜻이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가난하고 헐벗은 이웃을 먼저 생각하고 우선적으로 돕는 정책을 수립하는 것이 옳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것은 경제 정책이나 국가 경제를 운영하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 순서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수십 년 전에 150억 이상을 들여 국회의사당을 신축했다. 그 당시 그 돈은 대단히 큰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국회의원도 병원이나 학교를 먼저 지어주고, 기다렸다가 국회의사당을 짓자고 요청한 사람이 없었다. 그 속에는 많은 그리스도인과 불교신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런 사고방식 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그런 의식구조를 고치지 못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것 같다. 하물며 국민들의 가난은 외면한 채 예배당 짓기에 열중하는 교회 지도자가 있다면 더 깊이 반성해야 할 문제이다.

     

    우리는 경제 문제가 개인이나 사회생활의 전부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경제 문제가 잘못되면 다른 모든 문제가 병들게 된다. 그래서 기독교는 직접 사회경제 문제를 해결 짓기 위해 뛰어들지는 않아도 그 선한 해결과 성장을 위해서 언제나 새로운 방향과 이상 을 제시해주어야 한다.

     

    특히 고아원이나 양로원 같은 사회사업에 열중하면서 사회경제 전체의 진로나 국민경제의 기본적인 방향을 그르치는 과오를 범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개인은 이웃을 돕고 교회는 사회를 이 끌어가는 책임을 감당치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여러 가지 경제 문제들을 생각해보면서 우리는 예수의 이 짧은 교훈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며 요청하는가를 깊이 유념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사회에 돈을 주기 위해 있는 것은 아니나, 선한 경제적 질서와 교훈은 반드시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2024년 12월 29일 

    김형석 교수님의 수필집 '어울리지않은 계산'  읽었던 글입니다.

     

     

    마태복음 20장에 있는 이야기 입니다.

    예수님은 한 비유로 큰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는 한 남자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시장에 가서 일꾼들을 고용하여 각 남자에게 하루 일에 한 데나리우스를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조금 후 같은 그는 또 한 남자가 할 일이 없이 한가하게 서 있는 한 무리를 보았습니다. "가서 내 포도밭에서 일하세요."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기뻐한 남자들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남자는 해가 저물고 날이 거의 끝날 때까지 세 번 더 많은 일꾼을 고용했습니다. 그날 저녁, 그 남자는 하인에게 일꾼들을 불러 임금을 지급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가장 늦게 일을 시작한 사람들에게 먼저 임금을 지급하고, 각 사람에게 한 데나리우스씩를 지급하라"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른 아침부터 더위 속에서 고생하던 일꾼들은 하루가 끝날 때쯤 일을 시작한 일꾼들보다 더 많은 돈을 받아야 한다고 투덜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더 오래 일했으니 더 많은 돈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라고 그들은 불평했습니다. "아니요," 그 남자가 말했습니다. "저는 여러분 각자에게 한 데나리우스를 주겠다고 제안했고, 여러분도 이에 동의하셨습니다. 제 생각에는 모두 평등합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에서는 하나님께 늦게 오는 사람들도 항상 하나님과 함께 해주신 사람들 만큼 사랑받고 소중히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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