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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 현장의 따뜻한 손길스크랩된 좋은글들 2025. 3. 28. 07:26일러스트=Midjourney·조선디자인랩
영남권 산불이 확산 일로에 있던 지난 23일 오후 경남 산청군 이재민 대피소는 100명에 가까운 자원봉사자로 붐볐다. 본인 마을이 반 넘게 탔는데도 ‘보다 급한 곳을 돕겠다’며 배식 봉사를 하는 60대 할머니, 주말도 반납하고 이웃 동네에서 달려왔다는 의용소방대원들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채 닦지도 않은 모습으로 부지런히 오가고 있었다. 이들에게 ‘왜 봉사에 나섰느냐’고 물어봤다. 답은 제각각이었지만 모두 ‘이웃’을 언급했다. “옆 동네가 불타고 사람까지 죽었는데요, 이웃이니 돕고 싶었어요.” “30년째 농촌에 사는데 이웃 어르신들 보면 제 부모 같아서 마음이 쓰입니다.”
서울에서만 나고 30년째 도시를 벗어난 삶을 살아보지 못한 기자에게 ‘이웃사촌’은 책에서만 보던 단어다. 사전적 정의로만 뜻풀이를 짐작할 뿐이었다. 그런데 산청 대피소에서 무슨 뜻인지 실감했다. ‘잔불이 다시 나는 것 같다’며 인터뷰 도중 연기가 피어오르는 뒷산으로 불을 끄겠다고 달려간 50대 아저씨, 분진을 뒤집어쓰고도 몇 시간이나 야외에 마련된 탁자에서 파와 무를 다듬고 있던 아주머니. 그저 하루아침에 집과 가재도구를 잃은 이재민을 돕겠다며 각자의 일상을 던져두고 재난 현장으로 달려온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사전에서만 본 ‘이웃사촌’의 화신(化身)이었다.
집과 일터를 잃고 멍한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100여 명의 이재민은 고개를 숙이며 연신 감사 인사를 했다. 한 할머니는 배식 자원봉사자 손을 한참 동안이나 부여잡고 눈물을 흘렸다. “내 땜에 고생인데, 쪼매만 묵을게.” 모든 것을 잃었다고 느꼈을 산불 이재민들을 위로한 건 이런 평범한 이웃들이었다.
자원봉사자들은 오히려 이재민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고 말했다. 신원을 밝히기를 사양한 한 자원봉사자는 “식사 잘하시고 잘 버텨주셔서 오히려 제가 고맙습니다”라고 했다. 눈이 마주친 이재민과 봉사자들은 서로에게 ‘파이팅’을 외쳤다.
정치가 세상을 바꾼다고들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치는 국민 삶을 얼마나 더 좋게 만들었을까. 역대 최악이라는 산불 상황에 대응하는 데 힘을 합쳐야 할 여야(與野)는 지금도 서로를 손가락질하면서 정쟁(政爭)을 되풀이하는 중이다. 산불이라는 국가 재난 상황에서도 상대 탓만 하며 입씨름만 벌이고 있다.
이웃 동네에 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산불 현장에 뛰어온 이런 범인(凡人)들 덕에 집을 잃고 가족을 여읜 이들이 매끼 식사를 거르지 않고, 몸을 뉘여 눈을 붙이고, 깨끗한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마음도 마을도 다 타버린 참혹한 현장에서 이재민들 마음을 달래준 건 떠들썩한 정치인의 입이 아니라 평범한 이웃이 건네는 조용한 손길이었다. 산청의 산과 마을은 검게 탔지만, 그 손길들은 한없이 눈부셨다.
2025년 3월 28일 조선일보 김병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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