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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탐방: 혜빈 양씨 그는 누구인가 ?종교문화 2025. 5. 13. 21:36
혜빈 양씨는 1455년 조선4대 세종의 후궁으로 현감 양경과 부인 이씨의 외동딸로 태여나 궁에 입궐하게 됩니다.
그녀는 내명부 소속의 궁녀로 병약한 세자 문종을 보살피던 중 세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받고 종1품 귀인에 봉해지고 이로 인해 당시 돌아가신 아버지 양경은 의정부 좌찬성에 추종됩니다.
그녀는 세종에게 신뢰를 받았으며 세명의 왕자(한남군, 수춘군, 영품군)를 낳고 정1품 빈에 오르게됩니다.
이후 문종의 비이자 단종과 경혜 공주의 어머니인 현덕왕후(당시는 세자빈)가 단종을 낳자마자 3일만에 세상을 떠나게 되자 세종과 소현 왕후는 혜빈 양씨에게 단종과 경혜 공주의 양육을 맡겼다.
당시 영풍군을 키우던 그녀는 기꺼이 이들의 양육을 도맡아 유모가 되어 주었으며 특히 갓난아기때부터 돌보던 단종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단종 역시 늘 혜빈의 품에서 자랐기에 아주 친밀했고 그녀와 그녀의 아들인 한남군,수춘군 영품군은 죽을 때까지 단종을 지지하게 되었다.
세종이 떠나자 빈양씨는 관례에 따라 또 다른 후궁인 신빈 김씨와 함께 비구니가 되어 궁을 떠났으나 새롭게 왕위에 오른 문종이 재위 2년만에 승하하게 되고 12살의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게되자 그를 보필하기위해 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1453년 10월 10일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이 궝권을 장악하면서 문종의 후궁이었던 홍귀인을 정1품빈(숙빈 홍씨)으로 삼아 궁궐 일을 보도록 함으로서 혜빈 양씨는 더 이상 단종을 보필할명분이 없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녀와 수양대군과는 매우 풀편한 사이가 되었다.
1455년(세조1년)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의 압박에 못이겨 임금자리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게 되면서 드디어 수양대군(세조)이 보위에 오르게 되었다. 왕위에 오른 세조는 단종을 보호하는 혜빈 양씨을 가만이 둘수 없었고 결국 혜빈 양씨와 그의 아들인 한남군 영품군이 역모를 도모했다며 청풍으로 귀양을 보냈다. 이때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과 세종의 서(영빈강씨) 장자인 화의군 역시 같은 이유로 변방으로 유배를 보냈다.
그리고 세조는 혜빈양씨의 재산을 모두 몰수하여 함길도 절제사인 양정에게 하사합니다. 그후 대신들은 유배 간 혜빈양씨의 죄를 물어 법대로 처리하라고 상소하였으나 세조는 혜빈양씨를죽이지 말아달라는 상왕 단종의 부탁으로 대신들의 청을 윤허하지 않았으나 대신들은 거듭하여 혜빈 양씨의 처벌을 요구하여 결국 1455년11월 그녀는 교수형으로 세상을 떠나게되었다.
그녀의 장남인 한님군은 혜빈 양씨와 함께 역모를 꾀했다는 죄로 유배 후 병사하였으며 둘째인 수춘군은 양씨가 역모죄를 받기전에 금성대군 집에서 병을 치료하다 요절하였다. 그리고 셋째인 영풍군도 역모죄로 유배되었다가 세조가 보낸 이들에 의해 피살됩니다.
왕실계보인 종친촉에서 삭제되면서 그의 후손들은 힘겨운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나 1534년(중종 29년)에 혜빈의 증손자인 호천군이 대궐 앞에서 중종에게 상소하고 이를 받아들이면서 혜빈양씨와 아들들은 다시 왕실계보에 속하게 되고 명종대에 이르러 관작이회복되었다. 또한 250년이 지난 숙종때에 단종이 복위되면서 다시금 혜빈양씨와 그의 아들 영풍군의 관작 및 봉호를 회복하라는 명을 내리면서 그녀의 모든 후손들이 왕족 가문의 지위를 되찾게 됩니다. 이때 숙종은 혜빈양씨의 묘를 봉분하도록 하였으나 원래 묘자리를 찾지못해 이루지못했다. 또한 혜빈양씨에게 문혜라는 시호를내리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 1781년(정조 15년)헤빈 양씨와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시호가 같은문제가 발생하자 정조는 혜빈 양씨에게 민정이란 시호를 새로 내리고 그녀의 장남 한남군 후손에게 신주(민정빈 양씨)를 새로 만들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때 정조는 유문을 만들어 내리게 됩니다. “ 슬프다 오직 양씨는 옛적의 유모와 같다“
칭송은 주빈처럼 드러나고 공은 한모보다 고매한대 병자정축년을 맞이하여 화가 후궁에 미치었다. 두아들과 같이 죽었으니 6신들과 같이 돌아 갔구나 시대는 달라도 방모와 같고 여자로서 굳세고 인자하였다. 두견새는 엣 누각에서 우는데 봄은 신단에 다시 찾아왔구나 의는 천추에 일어나 예로서 제현과 강신의 잔을 드린다. 생각건대 6궁에서 제일 높았는데 어찌제사를 똑같이 한단 말인가 지난 일을 감힘라하지니 슬픈 감회가 지극히 깊고 깊구나 이를 거행하여 이름을 바꾸어 민정(愍貞)이라한다.“
1750년 (영조 26)한남군에 이어 후손들에 의하여 한나무나우가 건립되면서 혜빈양씨와 한남군의 위패가 모셔졌고 1900년 광무 4년 수춘군 파종회에서는 그녀를 기리기 위해 고양시 원당동 단(헤빈양씨단소)를 축조하고 신도비를 세웠다.
옳고그름을 외면하고 오직 자기이해 관계에 따라 흔들리는 현실을 생각하니 충절의 혜빈양씨를 새롭게 바라봅니다.
2025년 5월 14일
혜빈양씨(惠嬪楊氏) 신단안내도
휼륭한 조상이 이 있는 것을 알면서 이 세상에 드러내지않음은 자손으로서 조상에 대한 죄인이요, 그 조상의 사적은 물론 이요 묘소까지 만들지 못하고 울한에 쌓인 가슴을 어루만지며 수백년을 내려온 자손들이 있다면 그얼마나 가련한 일이 겠는가!!!
우리 수춘근은 그러한 자손으로서 혜빈 양씨의 한 많은 생애를 소개하면 혜빈 양씨는 세종대왕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입궁하시어 혜빈으로 봉해졌으며 시호는 민정빈이요, 본관은 청주 양씨로 의정부 좌천성 경(景)의 따님이고, 황희정승이 고모부이다.
혜빈께서는 왕자 세분을 두시니 장자는 한남군(漢南君), 둘째 는 수춘군(壽春君), 셋째는영풍군(永豊郡)이다.
세종23년 (1441년)7월 23일 세자빈 권씨가 원손 홍의(훗날 단종)을 낳으시고 다음날 서거하니, 세종 23년 (1441년) 8월 7일 세종대왕께서는 빈어중, 혜빈에게 단종 휘 홍위를 보육하라고 보모(保姆:왕세자를 가르치고 보육하던 스승)으로 명하시니 지성으로 보육하셨다.
문종2년 1452년 5월 14일 문종대왕께서 승하하시고, 5월 18일 단종대왕께서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하시니 혜빈은 교태전(交泰殿)으로 들어와 내외 정사를 총괄 섭정하시고 궐내의 기강을 바로 세웠다.
그러나 단종 3년 (1455년) 윤6월 혜빈,금성대군,의안대군,화의군,한남군,영풍군, 영상 ,좌상등 160명등과 교결하고 목숨을바쳐 단종의 보위를 지킬 것을 맹서하고 단종께 고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조가 의금부에 명하여 혜빈은 청풍으로 유배되고 한남군은 금산, 아산, 양지, 함양으로 유배되고 영풍군은 예안으로 유배당한 후 모두 직첩이 삭탈되고 극형으로 피화(被禍) 되었다.
혜빈께서는 세조 원년(1455년) 11월 9일 교살(絞殺)당하시고 시신이 방치되어 있는것을 야음을 툼타 당숙뻘인 병사공 양치께서 포천군 신북면 기지리 선산에다 봉분도 없이 암장하는 비극적인생을 마감하셨다.
그후 세월이 흘러 암장지도 흔적도 찾을 수 없는 비극의 연속이 이어졌다. 진실이 승리한다는 진리처럼 역사는 흘러 숙종 38년 (1712년) 4월 28일 혜빈양씨의 관직과 봉호를 회복하라는 어명에 이어 숙종 39년 (1713년)4월 2일 자차 복기관봉(復其 官封) 사시 봉묘(賜諡封墓)를 명하였고 정조 15년 (1791년)5월 27일 정조 대왕께서 혜빈의 시호를 민정(愍貞)으로 봉하시고 굳은 절개를 가상이 여기고 제사받지못한 것을 불쌍히 여겨 신주를 새로 만들게 하여 한남군후손에게 봉사(奉祀)토록 명하였다.
고종태황제 11년(1907년) 민정빈 양씨의 묘를 찾지 못함을 안탑깝게 여겨 수춘군묘 근지(近地)에 설단(設壇)하고 시제를 수춘군 후손에게 봉향( 奉享)토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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