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심하는 도마'처럼… 증거를 찾고 믿으라스크랩된 좋은글들 2025. 5. 16. 08:35도마는 의심이 많은 제자로 전해진다. 스승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사실을 그는 직접 보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던 그의 앞에 부활한 예수가 나타나 못이 박힌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주며 만져보라고 했다. 증거를 본 도마는 그때야 예수를 알아보고 부활을 받아들인다. 의심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의심하는 도마(doubting Thomas)’라는 말의 유래다.
그렇다고 도마가 예수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라고 한다. ‘의심’을 뜻하는 그리스어는 ‘보류하다’ ‘주저하다’라는 의미에 가까우며, 의심이 많은 것이 아니라 증거를 얻기 전까지는 판단을 보류하는, 인간적 합리성을 지닌 제자였다는 것이다. 아무튼 판단을 위해 증거를 요구한 도마는 증거를 보고 확신을 얻어 인도까지 스승의 가르침을 전파하고 순교한다.
증거는 인간의 합리성과 과학이 협동하며 진화시켜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원전 시민 법정에서는 과학적 수사가 없던 시절이니 검증 불가능한 증언이나 물증이 증거로 채택되었고, 심지어 노예를 고문해서 얻은 증언도 채택되었다. 증거보다 설득하는 사람의 말주변과 논리력이 더 힘을 발휘했고, 인간적 지혜도 필요했다. 한 아기를 두고 서로 엄마라고 주장하는 두 여인을 재판하기 위해 솔로몬이 아기를 둘로 가르라는 지혜를 발휘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요즘 법정이라면 DNA 검사 하나로 간단하게 끝날 일이다.
무지성이 판치는 것 같지만, 사실 우리는 과거에 비해 꽤 합리적인 세상에 살고 있다. 증거를 요구하고 제시하는 행위가 일상화되어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원하는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성적 증명서와 추천서 등을 제출해야 하고, 상을 받으려면 공적이나 실적 증명서가 필요하다. 특정 언어 능력이 있다는 사실은 어학 능력 시험 성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운동선수의 능력은 기록으로 증명되며, 세일즈맨의 실력은 실적으로, 직업학교의 경쟁력은 취업률로 증명된다. 법정에 가면 하나부터 열까지가 모두 증거 싸움이다.
이런 세상이라면 강력한 증거는 진실과 동의어가 되어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게 현실이다. 증거가 명백한데도 다른 이유로 무죄가 선언되기도 하며, 어떤 증거를 제시해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증거가 아무리 차고 넘쳐도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 새로운 논증 모델을 찾고자 한 사람들이 영국의 툴민(Toulmin)이나 벨기에의 페렐만(Perelman) 같은 20세기 논증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증거보다 증거를 해석하는 청중이 그 열쇠를 쥐고 있다고 생각했다.
툴민은 어떤 증거를 채택할지 결정하는 것은 공동체의 몫이며, 증거의 증거력을 판단하는 것도 공동체에 따라 다르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공동체 A의 증거가 공동체 B로 갔을 때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페렐만 역시 증거란 청중의 해석망 속에 존재하며 그 안에서 진실도 규명된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공동체’란 예를 들면 법 공동체, 종교 공동체, 이런 것이다. 법에서 요구하는 증거와 종교에서 요구하는 증거가 같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물론 이 두 철학자의 분석은 증거가 중요하다고 믿는 사회를 전제로 한다. 논의의 출발점은 어디까지나 의심하는 자세로 증거를 요구하며 증거에 설득되는 합리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조차 설득되기 힘든 영역을 공동체 이론과 청중으로 설명하려 한 것이다. 합리성이나 설득을 향한 그들의 진지한 접근을 보다가 우리 사회로 눈을 돌리면, 아무도 설득하지 못하고 누구도 납득하지 못해 갈라져 사는 우리의 불행이 도드라져 보인다. 대체 우리 사회에 합리성이 존재하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회는 증거를 믿는 사회인가? 증거를 요구하기는 하는가? 그리고 증거에 따라 설득되는가? 공동체의 가치관은 건전한가? 그리고 각기 다른 공동체를 통합하는 정치가 존재하는가? 이런 물음에 대한 나의 의심은 ‘아니오’ 쪽에 가깝다.
합리적인 사회라면 성적 증명서를 내고 합격을 기대하는 사회여야 한다. 좋은 성적 증명서가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법원은 증거를 기반으로 법에 따라 범인을 가려야 한다. 학교가, 법원이 다른 공동체의 가치관으로 학생을 받고 범인을 재판한다면, 그 사회는 어디서도 진실을 얻을 수 없는 디스토피아로 전락할 것이 불 보듯 훤하다.
불과 18일 후, 엄연하게 다른 논쟁 공동체인 법 공동체와 정치 공동체가 내놓는 각종 파열음 속에서 대통령 선거를 치른다. 법원의 시계가 정치 때문에 멈추고, 정치는 법의 판결에 따라 날개를 다는 끈끈한 협력이 우리 사회에 미칠 영향은 치명적이다. 정치가 ‘다름’과 소통하기를 접고 자체적 논리와 증거만으로 세상을 지배하려고 하는 사회를 ‘닫힌 사회’, 다른 말로 독재라고 하지 않던가.
욕망과 선전이 난무하는 선거판 한가운데 있는 유권자들은 각기 속한 공동체의 상식과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투표할 것이다. 선거 결과는, 그러니까 어떤 후보의 당락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근본을 이루는 어떤 가치관과 상식의 승리로 이어진다.
나는 우리의 건전한 상식과 합리성이 승리하기를 바란다. 선거가 아니라 그 무엇이라도, 의심하며 증거를 요구하고, 증거에 바탕해 판단하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그들의 집단 합리성 덕분에 우리 사회가 이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합리적인 지도자를 얻는 건 덤이다. 그런데 그게 과연 가능할 것인가.
2025년 5월 16일 조선일보 박성희 칼럼'스크랩된 좋은글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핵 언급 않는 李 후보 진짜 안보관은 뭔가 (3) 2025.05.16 무엇이 '진짜 이재명'인가 (0) 2025.05.16 인생에 찾아 온 세 분의 스승 (1) 2025.05.15 사법부를 발아래 두려는 민주당 반헌법 폭주 (0) 2025.05.15 대법원장 사퇴 시키려 탄핵·청문회에 특검까지 (2) 2025.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