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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복 80주년, 대한민국이 선 자리
    스크랩된 좋은글들 2025. 6. 4. 06:44

     

    세계의 찬사 속에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  약체 민주주의 드러낸  정당 정치의 파산  좌도, 우도 아닌  엔진 꺼지느냐, 되살리냐 갈림길

     

    광복 80주년. 한 사람의 생애보다 짧은 그 세월에 대한민국은 참 많은 걸 이뤘다. 기적의 역사라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세계지도를 펴면 한국이 딛고 선 지정학적 숙명이 비장하게 다가온다. 세계에서 제일 광활한 나라 러시아, 세계에서 둘째로 인구 많은 나라 중국, 그리고 세계에서 제일 폐쇄된 북한이 체제를 달리한 채 맞닿아 있다. 그에 둘러싸여 아시아 대륙 끝에 매달린 듯 크지 않은 영토에 5100만 인구가 모여 산다.

     

    딱 80년 전인 1945년 6월 4일엔 국제 질서에서 존재도 미미했다. 두 달 뒤 찾아온 광복도 희미한 새벽녘 여명이었다. 3년 뒤 민주공화국으로 겨우 나라 틀을 갖췄는데 그로부터 2년도 안 돼 침략을 당했다. 지지리 가난하고 변변한 군사력도 없으니 북·중·러 호전적 동맹이 냉큼 집어삼키려고 했다. 유엔군과 수많은 국민의 희생으로 지켜냈고 그 잿더미에서 일군 70년이 오늘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다.

     

    이렇게 국제적 위상이 높아진 게 한반도 유사 이래 있었나 싶을 정도다. 경제 규모(GDP)는 세계 12~13위 수준이고 수출은 그보다 높아 세계 6위다. 바다 넘어 드넓은 세계 시장을 개척한 덕분이다. GDP는 일본의 절반 좀 안 되지만 인구 감안한 1인당 GDP는 일본을 넘어섰다. 경제적 극일(克日)을 이뤘다. 문화적 매력도도 한껏 높아졌다. 세계 시장에서 K팝, K드라마가 사랑받고 우리가 평소 먹는 라면, 김치, 만두까지 잘 팔린다.

     

    널리 알려진 미국 매체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 10위’를 꼽으며 1위 미국, 2위 중국, 3위 러시아에 이어 대한민국을 6위에 올렸다. 우리 바로 앞이 영국(4위), 독일(5위)이고, 바로 뒤가 프랑스(7위), 일본(8위), 사우디아라비아(9위)다. 잘 믿기지 않지만 정치적 힘, 경제적 영향력, 군사력, 국제 동맹, 리더십, 이 다섯 가지를 종합한 결과라고 한다. 군사력이 미국, 러시아, 중국, 인도에 이어 세계 5위로 매겨졌다. 영국, 프랑스, 일본보다 앞이다.

     

    세계 속 성적표는 이리 높은데, 정작 우리 스스로는 후한 점수를 못 주고 있다. 사는 게 힘들다고 느끼는 사람이 부쩍 늘었기 때문이다. 사회 전체적으로 ‘심리적 안전감’이 극도로 낮아졌다. 치열한 경쟁 속에 쉽게 좌절하고 극단적 선택을 하는 나라가 됐다. 과열 사교육에 돈 쓰느라 부모는 허리 휘고 아이들은 우울한 청소년기를 보낸다. 일자리 없고 집 없어 청년들은 결혼 못 하겠다고 하고, 아기가 안 태어나 외국 유명인까지 국가 소멸을 걱정해 주는 지경이다. 세계적 수준의 의료 덕에 수명이 초고속으로 늘어 세계 3위 장수국이 됐는데 돈 없어 재앙 같은 노후도 적지 않다. 나라 전체가 6000조원(가계·기업·정부) 빚더미에 앉아 있다. 그러는 새 성장 엔진이 점점 꺼져 간다. 해법이 없는 건 아니다. 신산업이 쑥쑥 자라도록 부지런히 경제 규모를 키우고 미래 세대에게 일자리와 기회를 열어주면서 사회적 약자를 보듬을 여력을 확보하는 것인데 규제가 가시 덤불처럼 경제를 옭아매고, 백해무익한 갈등과 반목이 서로를 공격하며 공동체를 질식시킨다.

     

    이럴 때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정치다. 공적 마인드를 갖춘 인재들이 모여 국민의 어려움을 덜어주고 국가 미래에 더 나은 정책 해법을 제시하려고 두뇌 경쟁을 벌여야 하는데, 자기 이익에만 집착한 부도덕한 정치꾼들이 자리 경쟁을 벌이면서 나랏빚으로 돈 풀 손쉬운 궁리만 한다. 명색이 ‘진보 정당’은 국제 정세에 눈감고 역사를 왜곡하고 사회를 갈라치기하면서 불만을 동력 삼아 정치 근육을 키우는 ‘수구 퇴보 정당’이 됐다. 보수 정당은 보수 리더십이 쌓은 역사적 자산을 다 까먹도록 분열해서 차세대 리더도 키우지 못한 채 대통령 탄핵을 두 번 당한 ‘무능 보신 정당’이 됐다. 민주주의의 꽃인 정당 정치가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지난 80년 대한민국의 성취는 가장 높은 망루에서 고독하게 국제정치 지형을 꿰뚫어 보면서 국가를 지켜내고, 나라 미래를 위해 통찰력 있는 성장 해법을 제시한 리더들이 초석을 닦았기에 가능했다. 그런 탁월한 리더십까지는 아니어도, 신뢰할 만한 리더를 배출하면서 나라를 꾸준히 전진시켰어야 할 정당들이 ‘4류’ 그 이하로 전락해 나라를 지체시켰다.

     

    광복 80주년에 국제 정세는 요동치는데 계엄과 탄핵의 정치적 혼란 끝에 조기 대선까지 치러져 새삼 지난 역사와 우리 현실을 되돌아보게 된다. 지난 80년의 성취가 앞으로도 굳건히 이어지리라는 기대가 무너져 가는 지금, 새 대통령의 임무는 자명하다. 대한민국은 이대로 정체되느냐, 나아갈 동력을 새로 찾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 화끈한 묘약은 없다. 세계지도를 펴놓고 마주 선 현실을 무겁게 느끼고, 더뎌도 제대로 된 해법으로 국민에게 호소하는 신뢰의 리더십이어야 전진으로 방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25년 6월 4일 조선일보  강경히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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