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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 23년(서기 1441)년 측우기와 수표
    종교문화 2025. 6. 14. 12:06

    도서관에 가서 세종평전을  읽었다.  그중에서 측우기와  수표를 만들었다는 기사를  읽을 때는 옛 추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청계천   자원봉사할때 수표에 대해 해설을  했더니  방문객 한분이   수표에 설치된 치수가  이상하다고 했다.  실제 길이를 재보니 우리가 알고 있던 33Cm와는 먾이 달랐다.  수표를 만들었던 세종때는  중국 주나라 척관법을 사용한것을 간과했기  때문이었다.  오늘 아침 운동겸  청계천 고산자교에서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동상있는곳을 다녀왔다. 

     

    강우량을 정확하게 측정하는 일은 농사와 깊은 관련이 있을뿐더러 하천의 유량의 가늠대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비가 오면 땅으로 스며드는 정도가 토성에 따라 매우 다르기 때문에 지표에 보이는 물을 육안으로 관찰하는 것은 매우 부정확했다. 또 하천에 흐르는 물도 비가 오는 데 따라 어느 정도 수위가 높고 낮아지는지도 육안으로 관찰하는 것이 어려웠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측우기와 수표기이다.

     

    측우기가 평지의 강우량을 측정하는 도구라면 수표는 하천의 수위를 측정하는 도구이다. 이런 도구를 만들려면 수위를 측정하는 정확한 척도가 새겨져 있어야 한다.

     

    측우기와 수표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임금에게 그 제작을 건의한 것은 호조로서 세종 23818일에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각 도의 감사가 우량(雨量)을 보고하도록 이미 법으로 만들어져 있으나, 흙이 건조한 곳도 있고 습한 곳도 있어 서로 달라 흙속으로 스며든 것이 깊고 얕은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청컨대, 서운관(지금의 기상대 관장부서) 에다 축대를 짓고, 쇠로 그릇을 부어 만들되, 길이는 2, 직경은 8촌이 되게 하여 축대 위에 올려놓고 비를 받아 서운관 관원이 깊고 얕음을 측량하여 보고 하게 하소서.

     

    또 마전교(청계천 다리) 서쪽 물속에다 얇고 넓은 돌을 놓고, 돌위를 파고서 받침돌 두 개를 세우고, 그 가운데에 네모난 나무기둥을 세우고 쇠갈고리로 받침돌을 고정하고, 척수, 촌수, 분수를 기둥 위에 새깁니다. 호조 낭청(실무부서)이 수위의 높고 낮은 분수를 조사하여 보고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했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 서울은 서운관에 쇠로 만든 우기를 놓고, 청계천에는 나무로 만든 수표를 세웠는데  나무로 만든 수표는 조선후기에 돌로 다시 만들었는데, 지금 남아 있는 수표는  돌로 만든 것이다.

     

    수표를 세워 하천의 강우량을 측정하는 것은 다른 나라에도 이미 있었지만, 측우기를 만든 것은 유럽의 카스텔리(Benedetto Castelli)1639년에 서양 최초로 발명 한 측우기보다 무려 198년이 앞선 것이다.

     

    당시의 자는 주척(중국 주나라때 사용되던자) 을 사용했는데, 1자의 길이는 약 20.4cm였 다. 이것을 100등분하여 1분을 만들고, 10등분하여 1촌을 만들었으니, 1분의 길이는 약 2mm에 해당한다. 이 정도의 정밀성을 가진 자는 당시의 수준에서 보면 매우 앞선 것이다.

     

    왕의 허락을 받은 호조는 세종 2458일에 다시 약간 수정된 방법을 임금에게 아뢰어 허락을 받았다. 첫째 측우기의 길이를 15촌으로 줄이고, 직경을 7촌으로 줄였다. 이를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길이가 약 30.6cm이고, 직경이 약 14.2cm이다. 그러니까 강우량 을 약 300mm까지 측량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의 일시적 강우량이 300mm를 넘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평균적 강우량을 재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고한다.

     

    그러면 측우기를 발명한 사람은 누구인가?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다만 당시 측우기 제작을 건의한 호조판서는 남지(南智)였고, 호조참판은 이 선(李宣)이었다.

     

    2025년 6월 14일  

     

     

     

     

    수표는 가뭄과 홍수를 대비하기 위해 물의 높이를 재는 측량기구로서 조선 세종(1448~1450)때 한강변과 청계천에 처음 만들었다. 처음에는 나무로 만들었는데 쉽게 썩는 단점이 있어서 나중에는 돌로 만들었다. 현재 남아 있는 수표는 영조때 다시 만든것으로서 청계천 수표교 앞에 세웠다. 1960년 청계천 복개 공사때 수표교와 함께 장충단 공원으로 옮겼다가 1973년 다시 세종대왕박물관으로 옮겨 보관중이다. 둘 기둥에 1척에서 10척까지 눈금을 새겼고 3,6,9 척되는 곳에 O을 새겨 각각 갈수(가믐), 평수(보통), 대수(홍수)의 기준을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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