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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도전 한양을 설계하다
    종교문화 2025. 6. 5. 16:36

     

    새 왕조를 개국한  이성계는 민심을 새롭게 하고 새 나라의 위엄을 세 우기 위해 새 도읍지 건설에 적극적으로 나셨다. 그리고  천도를 결심했다. 

     

    태조가 처음 천도를 결심한 곳은 계룡산 지역이었다. 그러나 도성 공사를 진행하던 중 풍수지리에 밝은 하륜의 이의 제기로 공사가 중단되었다. 이성계가 도참사상에 꽤나 호의적이었다는 증거다. 그 다음 후보지로 물색됐던 곳이 지금의 서울 신촌과 연희동 일대인 무악이다.

     

    계룡산수도 계획이 백지화된 후 풍수지리 전문기관인 서운관의 서적들을 연구하여 새로운 후보지를 물색해보라는 태조의 명을 받은 하륜은 무악이 국토의 중앙에 위치해 있고 뱃길이 통하며 우리나라 옛 사람의 비결과 부합되는 바가 많다. 중국의 여러 풍수책의 설명에도 모두 비슷하게 들어맞는다."는 이유를 들어 무악을 새 수도로 주장했다. 그러나 무악에 대해서는 서운관 관리들이 풍수설에 입각 하여 반대의견을 제시하고 정도전은 풍수설이 아닌 합리주의적 관점 에서 반대의견을 제시하였다.

     

    정도전은 무악이 국토의 중앙에 있고 뱃길이 통하기는 하나 골짜기 속에 끼어 있어 궁전과 관청, 시장, 종묘, 사직 등을 건설할 공간 이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 도읍을 정함에 있어 풍수보다는 과학적 입장에서 사람들이 살기에 충분한 공간과 교통편의의 장점을 두루 갖추고 있는가 하는 쪽으로 논쟁의 초점을 옮긴 것이다.

     

    풍수설을 바라보는 그의 기본 입장은 사람에 따라 장사가 잘되고 못 될 수는 있지만 땅에 의하여 왕성하고 쇠퇴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풍수사상에 대한 정도전의 유학적 관점은 태종 17(1417) 61일자 실록에도 보인다. 태종이 서운관에 명하여 참서(참언을 적은 책) 를 불살라버리도록 명하는 과정에 "내가 서운관의 참서를 모조리 불 살라버리라고 했는데 아직도 있다는 말인가? 우리 조정에 이르러 참서에 말한 바 목자(木字 이씨가 왕이 된다는 설), 주초(走肖조씨가 왕이 된다는 설)의 설은 개국 초에 있었다.

     

    정도전이 말하기를 '이것은 반드시 호사자가 만든 것이다' 하였지만 조정의 대신들까지도 이런 참서들을 믿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만약 참서를 불살라버리지 않고 후세에 전한 다면 사리를 밝게 보지 못하는 자들이 필경 깊이 믿을 것이니 빨리 불 살라버리게 함이 사직에 손실이 없을 것이다"고 하는 내용이 나온다. 정도전은 도참서와 이를 믿고 따르는 자들은 쓸데없이 일을 벌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며 이러한 서적들은 마땅히 폐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금은 천도문제를 의논하기보다는 개국 초의 민생안정에 더 역점을 두어야 한다고 건의하고 있다. 태조 3812일자 기록이다.

     

    이성계가 여러 재상들로 하여금 새 수도 후보지에 대한 의견을 올 리도록 명하자 정도전은 전하께서 기강이 무너진 고려의 뒤를 이어 처음으로 즉위하여 백성들이 소생되지 못하고 나라의 터전이 아직 굳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모든 것을 진정시키고 민력을 휴양하여 위로 천시를 살피시고 아래로 인사를 보아 적당한 때를 기다려서 도읍 터를 보는 것이 만전한 계책이며 그래야만 왕업이 무궁하고 자손도 함께 영원할 것입니다. 지금 땅기운의 성쇠를 말하는 자들은 마음속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다 옛 사람들의 말을 전해 듣고서 하는 것이며 신이 말한 바도 또한 옛날 사람들이 이미 경험한 말입니다. 어찌 술수를 한 자만 믿을 수 있고 선비의 말은 믿을 수 없겠습니까?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여 사람의 노력을 다한 뒤에 이 점을 상고하시어 자칫 불길함이 없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정치를 하는 사람에게 달린 것이지 땅의 성쇠에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지금은 새 수도 건설보다는 민생안정이 더 급하다는 주장에서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당시는 왕조교체기였다.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백성의 고 통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견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튿날인 813일 태조는 왕사인 무학대사와 서운관 관리들 그리고 대신들과 함께 무악을 직접 방문하여 지세를 살폈다. 이 자리에서 서운관 관리들은 무악천도를 반대하면서 풍수설에 입각하면 개경이 최고의 입지이므로 구태여 천도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되풀이하였다. 그들의 소신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도전이 백성을 생각하는 입장에서 천도를 반대한 것과 달리 그 들은 풍수설만 내세워 개경을 고집했다는 측면에서 서운관 관리들의 반대 이유 중에는 개경기득권 세력이었던 관리들의 기득권 지키기나 태조의 큰 뜻을 읽지 못하고 기술적인 사항에만 집착한 관료의 한계를 나타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자 태조는 화를 내며 "나는 이미 도읍을 옮기려고 결심했다"면서 무악이 좋지 않다면 다른 명당자리를 보고하라고 하였다.

     

    태조가 이렇게 한양도읍에 집착한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도참설 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사회에는 개경의 땅기운이 이미 다했으며 풍수상 한양에서 목자 즉 이씨가 왕이 되어 800년간 도 읍한다는 한양명당설이 널리 퍼져 있었다. 실제 태조는 불교와 민간 사상에 상당히 심취하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학대사 등과 가까이 지낸 것은 물론 후대에 재미가 보태진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왕조창업을 둘러싼 다양한 도참 관련 얘기가 전해오고 있다.

     

    꿈에 이성계가 무너진 집에 들어가 서까래 세 개를 지고 나왔다. 그때 사방 여러 집의 닭이 한꺼번에 울면서 꽃과 거울이 떨어졌다. 꿈 이야 기를 들은 무학대사가 해몽을 했다. "서까래 세 개를 진 것은 '' 자의 형상이니 임금이 될 징조요, 꽃과 거울이 떨어진 것도 마찬가지 이 다. 사방 여러 집의 닭이 한꺼번에 운 것은 '고귀위 高貴位 즉 높은 지 위'를 얻을 것이란 뜻이오"라고 했다. 닭의 울음소리 '꼬끼오''고귀위가 음이 비슷한 데서 나온 해석이었다.

    이성계는 한때 경남 남해에 있는 금산에서 수도한 적이 있었는데 산천 에 기도하기를 자기를 왕으로 만들어주면 산 전체를 비단으로 둘러 주겠다고 서원을 했다. 그 후 왕이 되었으나 산 전체를 덮어씌울 비단 이 없었으므로 산 이름을 금산錦山 (비단산)이라고 고쳐 불렀다는 전설 이다.

     

    그러나 이성계가 한양천도를 고집한 진정한 이유는 도참설의 영향 보다는 도읍을 옮김으로써 개경을 기반으로 한 고려 왕족이나 구 귀족들의 정치적·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력 중심의 정치를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려는 목적이 더 컸을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의 경우도 국운융성의 변화에 맞추어 몇 차례 수도를 옮겼다. 고 구려는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국내성에서 다시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으며 백제도 한양에서 웅진으로, 웅진에서 다시 부여로 옮겼다. 특히 백제 성왕은 수도를 부여로 옮기면서 백제 중흥을 꿈꾸기도 하였다. 또 우리 역사에는 비록 수도가 옮겨지지는 못했지만 수도이전을 추진한 여러 사례가 있다. 묘청의 평양천도론, 정조대왕의 수원 화성건설, 최근의 신행정수도 건설이 그에 해당될 것이다. 특히 정조는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면서 집권노론 세력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 과 함께 상업과 농업을 진흥하여 새로운 경제체제로의 변화를 도모하기도 하였다. 모두가 옛 수도에 터잡고 있던 기득권 세력을 약화시키고 시대의 변화를 선도하기 위함이었다.

     

    마침내 태조는 고려때 조성된 서울 옛 궁궐터에서 산세를 보고 무 학대사와 중신들의 의견을 들어 한양으로 도읍을 결정했다. 한양은 국토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강과 연결돼 교통이 편리하고 터 가 넓은 이점이 있다. 또한 북악을 주산으로 하여 좌청룡인 낙산과 우 백호인 인왕산, 안산인 남산이 있으며 내명당수인 청계천과 외 명당 수인 한강이 흘러 풍수상으로도 명당터로 인정된다. 당시 무학대사는 풍수설에 입각하여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북악과 남산을 좌청 룡 우백호로 삼으려 했으나, 정도전은 임금은 항상 남쪽을 향해 있는 법인데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으면 궁궐을 남향으로 앉힐 수 없다 하여 북악을 주산으로 결정했다는 속설이 전해져온다. 역시 정도전의 합리적이고 유학자적인 소양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만약 그때 무학 대사의 의견이 채택되었으면 경복궁은 동쪽을 바라보고 지어졌을 것 이오 세종로 길도 현재와 같은 남북길이 아니라 동서대로가 되었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새 수도의 후보지가 결정되자 바로 그해 91일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闢造成都監)이 설치되고 정도전이 이 사업을 주도 하게 되었다. 한양천도에 대한 태조의 열망은 대단하였다. 이 해 10 28일 왕실 및 정부 일행이 벌써 한양에 도착하였다.

     

    신도궁궐도감이 설치된 지 두 달도 채 안 되어 천도를 단행한 것이다. 물론 이때는 아직 궁궐을 비롯한 토목공사가 시작되지도 않은 상태였다. 이듬해 9 월에 드디어 경복궁과 종묘가 완공되어 12월에 새 궁궐로 이사하였다. 기공식이 있은 지 꼭 1년 만이다.

     

    오늘날 4대문 안에서 정도전의 숨결과 체취가 스며있지 않은 거리와 건물은 없다. 왜냐하면 한양의 도시계획을 총지휘한 인물이 바로 정도전이기 때문이다. 그는 13949월초 심덕부, 김주 등 신도궁궐 조성도감 간부들과 함께 보름 정도 한양에 머물면서 궁성 지을 터를 정하고 종묘, 사직, 궁궐, 관청, 시장, 도로 등의 설계도를 만들었다. 한양의 도시설계는 주례의 기본원리를 바탕으로 하되 우리나라 자연환경에 맞게 조정되었다. 즉 북악을 주산으로 하여 그 아래에 정궁 인 경복궁을 두고 경복궁의 좌측에 종묘와 우측에 사직을 배치하였다. 종묘는 왕실의 조상신을 모신 곳이고 사직은 토지와 곡식을 주관 하는 신을 모신 곳이다.

     

    오늘날 서울의 중심도로인 세종로, 태평로와 종로의 골격도 이때 결정되었다. 태평로에 해당하는 광화문 남쪽 6조 거리에는 좌우로 6 조와 삼군부를 비롯한 중앙관청들이 들어섰다. 동대문과 서대문을 연결시키며 한양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운종가(종로)에는 상인들이 자 리잡도록 하였다. 이 종로를 중심으로 북쪽은 북촌이라 하여 관청과 상류층 주택가가 형성되었고, 남쪽인 남촌에는 상인이나 하층민의 거주지가 자리 잡았다.

     

    이런 대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정도전의 애민사상이 나타난 작품이 바로 피맛골이다. 피맛골이란 종로 1가에서 6까지의 큰길 뒤에 있는 말 한 마리가 다닐 정도의 좁다랗고 긴 작은 뒷길을 말한다. 당시 고관대작들이 행차를 할 때에 일반 백성은 말에서 엎드려 예를 갖추어야 했는데 피맛골은 상점이 주를 이루었던 종로거리에서 이런 번거로운 행사를 피해 빨리 가기 위해 만든 서민 전용도로였던 것이다. 멀리서 고관의 행차를 보면 재빨리 이 뒷골목으로 이동하여 자기의 갈 길을 간다한다 해서 그 이름이 피맛골이다.

     

    또 종루(지금의 보신각)에서 남대문까지의 곡선대로로 남대문거리가 설계되어, 6조거리, 종로거리, 남대문거리로 한양의 3대 도로망이 형성되었다. 종루에서는 밤 10시와 새벽 4시에 각각 종을 쳐 통행금지의 시작과 종료를 알렸다. 서울의 야간 통행금지는 실로 1980년이 되 어서야 없어졌다.

     

    경복궁이 완성된 1395(태조 4) 107일 태조는 경복궁 완공을 축하하는 연회를 열었다. 정도전은 태조의 명을 받고 즉석에서 새 대궐의 명칭으로 경복궁이라는 이름을 지어 바꿨다. 정도전의 기록이다. "술을 세 번 올리자 신 도전에게 명하기를 '이제 수도를 정한 후 종묘제사까지 지냈고 새 대궐도 준공되었다. 내가 즐거운 마음으로 여러 신하들과 함께 연회를 베푸는 것이다. 너는 속히 대궐의 이름을 지어 나라와 함께 영원히 빛나도록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 이 명령을 받자와 손을 맞잡고 머리 숙여 절하면서 <시경> 주아편에 있는 '이미 술로 취하고 덕으로 배불렀어라, 임금이여 만년토록 큰 복을 누리소서라고 한 시를 외우면서 대궐을 경복궁이라 이름 지을 것을 청하였습니다."

     

    이 대목은 술 한잔하면서 수많은 고전 가운데 가장 적절한 구절을 골라낸 정도전의 천재성을 언급할 때 가끔 인용되는 대목이다. 그러나 제아무리 유교경전에 뛰어났다 하더라도 평소에 대궐 이름에 대 해 깊이 생각하고 미리 준비해두지 않았다면 작명이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큰 그림 속에서 매사를 미리미리 준비하는 그의 성품을 칭찬해야 할 것이다. 이어서 정도전은 궁궐을 지은 백성들의 노고와 임금에 대한 경계의 말도 잊지 않는다.

     

    "임금이 대궐에 편히 앉아 있다 해서 편안함만 알 것이 아니라 곤궁 하게 지내는 선비들과 만백성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춘추에 '백성을 중히 여기고 토목공사를 삼가라 했으니 이것이 어찌 임금된 자가 백성을 괴롭혀 임금에게 봉사만 하라고 하는 것이겠습니까?"

     

    정도전은 <시경><서경> 등 중국 고전에서 아름다운 글귀를 따고 왕실과 백성의 평안을 기원하는 의미를 부여하여 각 건물들의 이름을 지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공식적인 정사를 처리하는 전각을 근전정이라 하고, 그 문을 근정문이라고 하였다. 근정전이라고 작명한 이유이다.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폐하게 되는 것이 필연의 이치입니다. 작은 일도 그러하온데 하물며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같은 큰일은 또 어떠하겠습니까? <서경>에 말하기를 '경계하면 걱정이 없고 법도를 잃지 않는다.' '편안히 노는 자로 하여금 나라를 가지지 못하게 하라. 아침부터 날이 저물 때까지 밥 먹을 시간을 갖지 못할 정도로 업무에 정진하여 만백성을 즐겁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임금이 부지런하지 않을 수 없음이 이러하니 편안히 쉬기를 오래하면 교만하고 안일한 마음이 쉽게 생기게 됩니다. 또 아첨하 고 아양떠는 사람이 있어서 말하기를 '천하에서 나랏일로 자신의 정 력을 소모하고 수명을 손상시킬 까닭이 없다' '이미 높은 자리에 있어 서 어찌 혼자 비굴하게 노고를 하겠는가? 하면서 어떤 사람은 여자와 음악과 춤으로, 어떤 사람은 사냥으로, 어떤 사람은 구경거리로, 어떤 사람은 토목공사로 황음무도한 일을 부추깁니다. 이를 자기를 사랑 하는 것으로 여기면 자연히 태만하고 거칠어지는 것을 알지 못합니 다. 그렇다면 임금으로서 하루라도 부지런하지 않고 되겠습니까?" 하 였다. 이런 의미를 생각하면서 옥좌에 앉아 있는 임금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오늘 경복궁 근정전을 보는 관람객들도 모름지기 근정전이라는 현 판 속에 담긴 이러한 뜻을 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계속한다. "임금이 부지런한 것만 알고 그 부지런할 바를 알 지 못한다면 그 부지런한 것이 너무 복잡하고 너무 세밀한 데에까지 흘러서 볼 만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낮에는 어진 이를 찾아보고 저녁에는 법령을 닦고 밤에는 몸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이 임금의 부지런함입니다.

     

    또 말하기를 '어진 이를 구하는 데에 부지런하고 어진 이를 쓰는 데에 빨리 한다'는 뜻"이라고 부연설명하고 있다. 임금이나 고위직이 혼자 다하듯이 하면 안 된다. 재상이나 관료를 잘 선임하여 위임해야지 모든 일을 자기 혼자 부지런을 피운다고 좋은 정치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임금이 평소 일상 업무를 처리하는 전각인 사정전에 대해서는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아니하면 잃어버리는 법입니다. 대개 임금은 한 몸으로써 높은 자리에 계시오나 백성 은 슬기롭고 어리석고 어질고 불초한 사람이 섞여 있고, 만사의 번다 함은 옳고 그르고 이롭고 해됨이 섞여 있어서 만일 임금이 깊이 생각 하고 세밀하게 살피지 않으면, 어찌 일의 마땅함과 부당함을 제대로 구별하여 처리하겠으며 사람의 착하고 착하지 못함을 알아서 등용할 수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임금된 자로서 사람답지 않은 사람을 가까 이 하고 좋지 못한 일을 꾀하여서 재화로 인해 실패에 이르는 것은 진 실로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서경>에 말하기를 생각하면 슬기롭고 슬기로우면 성인이 된다'고 했으니 생각이란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그 쓰임이 지극한 것입니다. 매일 아침 이곳에 서 정사를 보시고 만기를 거듭 모아서 전하에게 보고가 되면 조칙을 내려 지휘하시매 더욱 생각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신은 사정 이라 이름 하기를 청합니다."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에 대해서는 상서 홍범편에 나오는 '강녕이란 그것만 가지면 그 밖의 모든 것을 갖출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복'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을 붙였다.

     

    이른바 마음을 바르게 하고 덕을 닦는 것은 여러 사람들이 함께 보는 곳에서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가하고 편안하게 혼자 거처할 때에는 안일함이 지나쳐 경계하는 마음이 게을러지게 됩니다. 대체로 공부를 쌓는 것은 원래가 한가하고 아무도 없이 혼자 있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원컨대 전하께 서는 무공의 시를 본받아 안일한 것을 경계하며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두어서 제왕의 복을 누리시면 성자신이 계승되어 천만대를 전하리이다. 그래서 임금의 거처를 강녕전이라 했습니다."

     

    침전에까지 이런 의미를 붙이다니 임금에 대한 대단한 압박이 아닐 수 없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는 경전과 역사책에서 아름다운 글귀를 인용하여 궁궐 침실의 네 벽에 붙이고 임금으로 하여금 교훈을 삼도록 하였다.

     

    근정전 앞의 문인 정문은 단순히 앞에 있는 문이 아니라 바른 문 이다. 왜냐하면 명령과 정교가 다 이 문으로부터 나가니 문을 닫아서 이상한 말과 기이하고 사특한 백성을 끊고, 문을 열어서 사방의 어진 이를 오도록 하는 것이 정의 큰 뜻이라고 하였다.

     

    궁궐 건축에 이어 1396년부터는 도성건설에 착수한다. 그해 윤 913일에는 도성조축도감(都城造築都監)을 설치하고 정도전에게 명하여 성터를 정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직접 백악산, 인왕산, 목면산 (남산), 낙산에 올라 거리를 측정한 후, 오늘날 우리가 보는 17킬로미 터의 도성설계를 완성하였다. 도성건설은 농번기를 피하여 각 도에서 징발된 약 12만 명의 장병들이 구역을 분담하여 진행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종의 열망에 따라 서둘러 궁궐과 도성축조 공사를 강행하다 보니 여러 곳에서 백성들의 어려움이 발생하였다. 한양천도를 반대할 때의 정도전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당시는 개국초기로 민심을 다잡아야 할 시기임을 감안하면 자칫 큰 사건으로 연결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 즈음하여 태조 이성계가 내린 영이다.

     

    "고려왕조의 말기에 요역이 실로 많았으므로 백성들이 이를 매우 고통스럽게 여기었다. 내가 즉위한 이래로 백성들이 편안하게 모여서 휴식하게 하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성이란 것은 국가의 울타리로서 난폭한 적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는 장소이니 방비하지 않을 수 가 없다. 그런 까닭으로 지난해 가을에 지방 백성들을 징발하여 도성 을 수축하게 했는데 부역을 치르는 동안 나무와 돌을 운반하거나 혹 은 질병으로 인하여 목숨을 잃은 사람이 있었으니 내가 매우 민망하 게 여긴다. 도평의사사에게 명하여 소재지 관리들로 하여금 3년 동안 그 집의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주고 이름을 파악하여 아뢰게 하라."

     

    정도전은 도성축조공사에 맞추어 주역5행의 방위에 맞추어 성 문의 이름을 지었다. 남대문은 예를 취하여 숭례문(崇禮門)으로, 동대문은 인을 취하여 흥인지문으로, 서대문은 의를 취하여 돈의문으로, 북문은 지를 취하여 소지문(炤智門, 뒤에 肅靖門으로 개명)으로 지었다. 또한 서울의 중앙에 위치한 종로의 종각은 오행의 신 을 취하여 보신각(普信閣)이라고 하였다. 이로써 한양은 인의예지신의 다섯 가지 덕을 상징하는 도시가 된 것이다.

     

    아울러 1396419일 정도전은 한성부의 행정구획을 정리하고 각 구역의 명칭을 짓는 사업을 맡았다. 한성부를 동···북 중의 5부로 나누고 5부를 다시 수십 개의 동네로 구획하여 각 동네의 이름 을 제정하였다.

     

    정도전이 지은 동네의 이름은 궁궐과 성곽 대문의 이름에서와 같이 인의예지신과 같은 유교의 덕목과 국가의 평안을 비는 뜻을 담은 글귀들로 이루어졌다. 지금 우리가 부르고 있는 4대문 안 동네 이름 하나하나에도 유교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 국가의 태평성대와 국민들의 안녕을 비는 정도전의 마음이 배어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주도하여 건설한 한양의 모습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 다. <신도팔경시(新都八景詩)>를 지어 자신이 힘써 완성된 도읍의 모습을 찬양하였는데, 이 시는 정도전의 문학적인 재능도 담고 있지만 내용 면에서 새 왕조의 이상정치를 펼칠 도시공간으로 그가 직접 설계 하고 건설한 한양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서 백성들의 풍요로운 경제생활과 견고한 국방체제를 기원하는 그의 꿈과 이상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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