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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사 참배에 굴복한 한국 교회
    종교문화 2025. 6. 23. 08:26

    신사참배에 굴복한 한국 교회

    1930년대부터 일본은 신사참배 강요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 했다. 신사참배 강요는 기독교 학교에서 제일 먼저 시도되었다. 첫째, 일제는 신사참배가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이며, 예배가 아니라 조상에 대한 경의의 표일 뿐이라고 회유했다. 둘째, 교육의 목적은 지적 육성뿐만 아니라 천황의 신민이 되는 것이기에 신사참배를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19321월 광주 지역에 서 열린 만주사변 기원제에 기독교 학교 학생들이 신사 참배 참여를 거부했다. 평안 도지사가 9월에 또 만주사 변 1주년 전몰자위령제 참 여를 종용했으나 숭실전문 학교 등 10개 기독교 학교 는 참석을 거부했다.

     

    19351114일 평안남도 도청이 도내 공·사립 중고등학교 교장 회의를 열고 평양 신사에 신사 참배 할 것을 요구했다. 숭실전문학교 교장 맥큔(G. S. McCune 尹山溫, 1873-1941)과 숭의여학교 교장 스누크(V. L. Snook鮮于梨, 1866-1960)의 대리 참석자인 정익성이 이를 거부했다.

     

    평남지사는 60일간의 여유를 주면서 신사참배를 강요했는데, 거절하면 학교 폐쇄와 강제 추방을 경고했다. 1936년 일본은 두 교장을 면직 시키고 추방시키는 동시에 전국적 규모로 신사참배 강요를 시작했다. 선교사는 신사참배를 수용하지 않으면 학교 운영이 불가능하게 되자 중대한 결단을 해야 했다.

     

    1937년 북장로교회 선교실행위원회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학교를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19383월 평양 삼숭(숭실중·숭실대·숭의여학교)이 폐교했고, 대구의 계성과 신명, 재령의 명신, 선천의 보성과 신성, 강계의 영실, 서울의 경신과 정신여학교가 폐교했다. 그렇지만 연희전문대 언더우드(H. H. Underwood 元漢慶)와 몇 사람은 신사참배가 애국 행위라는 일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학교 를 폐쇄하지 않고 존속시켰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도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자 19372월 해외 선교부 실행위원회 총무 풀톤(C. D. Fulton)을 파송했다. 그는 일본에서 출생한 2세 선교사로 일본 신도의 실체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풀 톤은 '한국 학교에 대한 정책'이라는 성명서를 통해 신사참배 반대를 분명히 했다. 남장로교회가 운영하던 기독교 학교들은 모두 강제(광주: 숭일남중·수피아여중, 목포: 영흥남중·정명여중) 혹은 자진(순천: 매산, 전주: 신 흥·기전, 군산: 영명) 폐교했다.

     

    호주 장로교회 선교부도 19362월 신사참배 거부 방침을 정하고, 19391월 부산의 일신학교, 마산의 기독교 학교들을 폐쇄했다.

     

    그러나 캐나다 연합교회 선교사들은 신사참배를 찬성함으로 폐교 하지 않고 지내다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강제 퇴거당했다. 그들은 대체로 자유주의 신학을 가진 자들이었는데, 일본과 매우 타협적 인 입장을 취했다.

     

     

    일본은 심지어 '11신사정책을 펴면서 관공서, 학교 그리고 가정 마다 간이 신사인 '가미다나'(神殿)를 설치하게 하여 아침마다 참배하도록 강요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은 본격적으로 교회에 신사참배 강요를 시도했다. 교회에서는 1931년부터 신사참배가 총회적 차원에서 의제가 되었다. 왜냐하면 기독교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해 왔기 때문이다. 장로교회 총회는 1932, 1933, 1934, 1935"학교의 문을 닫을지라도 교리에 위반되는 참배를 할 수 없다"고 결의했다.

     

    그렇지만 안식교는 1935년 신사참배를 가결하였고, 성결교회, 감리 교회, 구세군, 성공회, 로마 천주교회까지 일제에 굴복했다. 로마 천주교회는 1936526일 이탈리아 무솔리니 지배하에서 신사참배를 허락하는 훈령을 내렸다. 감리교도 19361월 감리교 총리사 양주삼 이 총독과 만난 후 신사참배를 수용했다. 마지막까지 거부한 교회는 장로교였다.

     

    마지막 보루 장로교도 굴복

    장로교회는 선교사로부터 한국 목사에 이르기까지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적지 않은 사람이 친일 입장이었다. 193710 월 장로교 기관지 <기독교보> 사설은 '일 황제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일본이 친일 목사들을 포섭해 분위기를 바꾸고 위협과 회유를 통해 신사참배에 동의하도록 했던 것이다.

     

    193829일 평북노회가 장로교 최초로 신사참배를 국가 의식으로 인정하고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63일 전남노회도 그 길을 따랐다. 친일 단체인 평양의 기독교 친목회는 일본기독교대회 의장 도미다 목사를 초청하여 신사참배가 국민의례일 뿐임을 설명하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비상시국 상황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것' '비국민적 행동'이라고 압박 혹은 협박했다. 이런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점점 배교하는 목사들이 많아졌다.

     

    그해 8월 평양노회가, 9월 경 안노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결국 193899일 총회가 열리기 전에 전국 23개 노회 가운데 17개 노회가 이미 신사참배를 가결했으니 74%나 되었다. 분위기는 신사참배 가결 쪽으로 기울었다.

     

    일제는 본래 신의주에서 열릴 예정이던 총회 장소를 평양 서문밖 교회로 바꾸고 신사참배 적극 반대자인 주기철, 채정민, 이기선 목사 등 을 옥에 구금시켰다. 봄 노회에서 선출된 총회 총대들은 이미 신사참배를 지지하도록 일제 경찰의 회유와 협박을 받았다. 그들은 세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첫째, 총회에 가서 '신사참배가 죄가 아니다'에 투표하든지, 둘째, 총회에 가지만 '신사참배 문제에 침묵하는 지, 셋째, '총회에 참석하지 않는다'였다. 선교사 총대들도 경찰에 불 려가 신사참배 문제는 한국 사람들의 문제이니 아무 말도 하지 말 것 을 경고 받았다. 평양 경찰서장은 총회 전날 평양·평서·안주노회 총대 들을 불러 각본을 미리 짜서 지시했다. 평양 노회장 박응률이 신사참 배는 종교의식이 아니고 애국적 국가의식이니 기독교인이 앞장서서 실행해야 한다고 '제안'하면 평서 노회장 박임현이 '동의'하고 안주 노 회 총대 길인섭이 '재한다는 것이었다.

     

    193899일 제27회 장로교 총회 분위기는 살벌했다. 무장 경찰이 서문밖교회 예배당 문을 지키고 있고 예배당에는 사복 경찰이 돌아다녔다. 총회 앞 좌석에는 평남 경찰부장과 수십 명의 고등경찰 간 부들이 칼을 차고 총대들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또 경찰 97명이 187명의 총대 사이에 끼여 앉아 회의를 시작했다. 이것은 기독교 총회가 아니라, 꼭두각시놀음이었다.

     

    첫째 날, 예정대로 임원 선거를 했다. 총회장에 홍택기(洪澤麒, 1893- 1950), 부총회장에 김길창(金昌, 1892-1977)이 선출되었다. 둘째 날, 오전 1050분 각본대로 신사참배 문제가 제안되고 결정되었다. 방위 량·킨슬러·한부선 선교사가 반대 의견을 내려고 손을 들며 발언권을 요청해도 홍택기 총회장은 찬성하는 총대들에게만 발언 기회를 주었다. 한부선(Bruce F. Hunt, 1903-1992) 선교사가 발언권을 달라고 소리치며 요구했지만 경찰에게 제압당해 끌려 나갔다. 총회장이 "이 안건에 가하면 ''하십시오" 하자, 제안자, 동의자, 재청자를 포함해 10여 명 만 ''라고 하고 나머지 회원은 침묵했다. 총회장은 마지막으로 아니 면, 아니라 하시오"라고 물어야 했다. 그런데 홍택기는 그 과정을 일부러 생략했다. 그는 곧바로 신사참배를 해도 되는 것으로 가결하고 선언했다. 불법이었다. 방위량을 비롯해 선교사들이 부당함을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서기는 미리 준비한 신사참배 지지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등은(우리는) 신사가 종교가 아니요,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한다.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여행(힘써 행함)하고 추()히 민국정신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하에서 총후(=후방 국민, 조선 사람) 황국신민으로서 적성(=참된 정성)을 다하기로 기함.

     

    신사참배가 가결되자 친일적 '평양기독교친목회'의 회원 심익현(沈霬鉉)목사가 즉시 신사참배를 건의하여 같은 날 12시 부회장 김길창의 인도로 전국 노회장 23명이 총회를 대표해 평양신사에 가서 참배 했다. 치욕적인 배교의 순간이었다. 마지막 남은 장로교마저 배교의 길을 걸었다.

     

    통탄할 일이었다. 1계명을 어기는 결정을 하고 실행함으로써 교회는 타락했다. 일본 경찰의 조직적이고 치밀한 계획 가운 데 진행된 신사참배 가결이었지만, 장로교 지도자들의 자의적 결정이 었음을 어찌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신사참배를 가결함으로써 한국 장로교뿐만 아니라 모든 한국 기독교는 일본의 신하와 하인으로 전락 하고 말았다.

     

    고난을 피해 빠르게 타락한 한국 기독교

    1939년 제28회 장로교 총회는 회의 진행에 앞서 일 천황의 충성된 신민의 표증으로 국민의례를 시행했다. 총회의 서기는 일명 '국민의례'로 궁성요배, 국가합창, 황국신민의 서사(, 맹세)를 제창했다. 부 총회장 김길창은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력을 발휘하여 국책의 여행에 협력할 것을 선언했다. 이어 평북도지사의 축사) '황군장병''동양평화'를 위한 묵도가 이어졌다. 배교한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에 바알 신을 들여놓고 경배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교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살기보다 서슬 퍼런 일제 의 칼 앞에서 생명을 구걸하는 비굴한 삶을 선택했다. 총회란 그리스 도를 주인과 왕으로 모시고 그분의 다스림 앞에서 회의하고 결정하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일제 천황의 통치 아래 살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총회는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 예수교 장로회연맹'을 결 성하고 신사참배를 시행하도록 경고문을 전국 노회에 발송하는 한편, <장로회보>를 발간해 신사참배 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이렇게 한국 장로교는 스스로 일본 정부를 위한 전쟁 보조 기구로 타락하고 말았다. 일제는 한국 교회를 압박하여 선교사들을 추방하기 시작했다. 핍박은 집요했다. 선교사들은 그들이 사랑한 한국 교회로 부터도 냉대를 받았다. 결국 1116일 선교사의 54%에 해당하는 219명이 한국을 떠났다.

     

    1941년 한국 기독교는 일본제국주의를 위한 실천 성명서를 냈다. '황도정신의 체득' '내선일체의 완수' '애국기 헌납' '일본적 기독교의 건설' '구미 의존 구태 잔영의 공제(=)' '교역자의 재연수' 등이 포함 되었다. 교회는 주일에 하나님께 예배했지만, 실제로는 일본 정부의 하수인이 되고 말았다.

     

    19421월 교회는 찬송가 중에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믿는 사람 들은 군병 같으니' 12장의 찬송가를 삭제했다. 전투적 내용이기 때 문이다. 나중에는 사도신경 가운데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를 신도(神道)의 창조 설화에 위반된다는 이유로 삭제했다. 그리고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천황의 영속성을 부인한다고 없앴다. 한국 교회는 신앙고백마저 유린 당하는 처참한 지경이 되었다.

     

    194354'조선예수교장로회''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 으로 개칭되면서 제31회 총회를 끝으로 사라졌다. 모든 교파가 하나 로 통합된 것이다. 친일 목회자들은 일본을 여행하며 신궁 참배 후 사 진을 찍어 기록에 남겼다. 당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매맞고, 고문당하고, 오랫동안 옥살이를 해야 했던 동료 목사들도 있 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담하기 그지없다.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일본의 총칼 아래 일본에 경쟁적으로 충성했다. 일본이 강제한 것이지만 고난을 피해 스스로 황국신민으로 살기 로 한 것이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한국 장로교는 1942210일 일본 육해군에게 '조선장로호'라는 이름으로 해군함상전투기 한 대를 바쳤다. 그리고 기관총 7정에 해당하는 15,317원을 헌납했다. 미군 과 싸워 이겨 달라며 신도의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또 전쟁 무기를 만 드는 데 필요한 금속, 교회의 종, 예배당 철문까지 바쳤다. 장로교뿐만 아니라 감리교도 마찬가지였다. 1939년 정춘수 감독이 취임하면서 부일협력(附日協力)은 더 강화되었다. 1944년 감리교단 상임위원회의 결 정으로 '감리교단호'라는 전투기 3대를 사도록 21만 원을 헌납했다. 일제 말기의 한국 교회 성도는 대부분 '기독교도 연맹'이라는 조직 에 가입했다. 교회가 회원 한 사람당 20원씩 내야 했다. 20원은 당시 보통 신문기자의 월급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교회는 이렇게 일제의 전쟁을 위해 충성했다.

    변질된 신학교, 두 신학원 설립

    신사참배에 적극적으로 반대 입장을 밝힌 선교사들은 추방당하고 (1940) 대부분의 기독교 학교는 문을 닫아야 했다. 1907년 개교했던 목회자 양성기관인 평양 장로교신학교도 19395월부터 무기 휴교를 선언했다. 이렇게 되고 보니, 한국에는 장로교 목사를 배출하는 신 학교가 하나도 없게 되었다. 바로 그 영적 위기 상황에서 기회주의자 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자유주의 신학을 배우고 가르치던 신학자와 목사들이었다. 그동안 비교적 보수적 선교사들과 그 입장에 선 한국 교회의 분위기에 밀려 큰소리치지 못하던 자유주의 목사들이 활동을 개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변절한 장로교 총회는 1939년 신학교 설립을 결정하고, 19402 9일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평양신학교'(조선예수교장로회)를 설립했다. 자유주의 신학자 채필근 목사가 교장으로 추대된 까닭에 일명 '채필근 신학교'라 불렸다. 한편 그해 9월 서울에는 역시 자유주의 신학자 김재준이 중심이 되어 '조선신학원'을 개원했다. 이것이 1946 년 장로회 총회 직영 '조선신학교'로 이어지고, 나중에 '한신대학교' 로 발전했다. 사설 신학교의 설립은 나중에 교단 분리로 이어졌는데, 1953'한국(대한)기독교장로회'가 그것이다.

     

    두 신학교는 모두 신사참배를 적극 지지했으며 동시에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쳤다. 그리고 학교 설립 목적을 천황의 나라 일본에 충성하는 기독교 교역자를 양성한다고 천명했다. 더구나 그동안 일본에 충성하지 못한 점을 크게 회개한다고 자발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두 신 학교는 일본 당국으로부터 설립 허가를 받아 계속 운영했다.

     

    정체성을 잃고 일본기독교조선교단으로 통합하다

    일제는 먼저 일본 내 모든 기독교 교파를 '일본기독교단'으로 통합 하여 1941년 태평양전쟁을 위한 전시체제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일제는 한국 기독교의 여러 교파를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통합을 추진했다. 1942년 먼저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 군 그리고 다섯 개의 자그마한 교파를 모두 하나로 통합하고자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감리교가 제안한 12개의 혁신안에는 반유대주 의적 신학이 들어 있었다. 구약에 나타난 유대사상을 모두 없애고, 심 지어 요한계시록을 없애자는 견해를 내세웠다. 그래야만 일본을 위해

    충성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교파합동추진위원회'는 결렬되었 다. '조선예수교장로회'1942년 스스로 해산함으로써 사라져 버렸 고, 대신 19435'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을 창립했다. 감리교는 그해 10'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을 창설했다.

     

    19457월 장로교와 감리교, 구세군이 함께 '일본기독교조선교단' 으로 통합되었다. 그때 전국 교회에 보낸 공문에는 다음과 같은 결의 가 들어 있었다.

    첫째, 교회는 매월 일정액의 국방헌금을 하고, 신사참배 및 전승(戰勝)을 기도한다. 둘째, 각 신도의 가정마다 신궁대마(神宮大麻)(가정 신단 에 넣어 주는 일종의 신주 내지 부적)를 모시고 신도 정신을 철저히 이행한다. 셋째, '목사' 칭호 대신 '교사'로 부른다. 그리고 예배의 형식은 일본 풍습을 따랐다. 한국 교회는 더 이상 기독교와 교회로서의 정체성 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태평양전쟁의 막바지 즈음인 1945719-20일에 '일본기독교 조선교단'(日本基督敎朝鮮敎團)으로 모든 개신교 교파가 통합되었다. 장로교 대표 27, 감리교 대표 21, 구세군 대표 6, 마지막으로 군소 교파 다섯이 각각 1인 대표로 모여 설립되었다. 일본 정부가 세운 통리는 장로교의 김관식, 부통리는 감리교의 김응태, 총무는 장로교의 송창근 이었다. 이렇게 일본은 한국 기독교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게 되었고, 한국 개신교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참으로 슬프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평양신사에 참배하는 장로회 총회  총대들 91938년9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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