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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 거상 임치종(林致宗)
    스크랩된 좋은글들 2025. 8. 3. 22:38

     

    임치종(林致宗은 의주 사람으로 소싯적 집이 몹시 가난했다. 일찍부터 남의 집 점포에서 고용살이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의주의 풍속은 사람을 고용하면 품삯은 몇 해가 지나도 한 푼도 지급하지 않았다. 다만 5년이나 10년을 겪어 보고 싹수가 있어 보이면 독립시켜 장사를 해보도록 뒷받침해 주었다. 사람이 성실하지 못하면 새경은커녕 맨몸으로 쫓겨나기 십상이어서 주인의 눈에 들기까지는 온갖 고생을 무릅써야 했다.

     

    점주가 몇천 냥을 떼 주어 이른바 '문상'이 되게 해주었는데, 이때 임치종의 나이 마흔 살이나 되었을 적이었다.

     

    당시 헌종(조선 제24대 왕, 재위 1834~1849) 무렵 조선과 청나라는 별도로 통상을 하지 않고 다만 사신이 오갈 적에야 비로소 책문(柵門)을 열어 조선과 중국의 상인이 서로 무역을 하게 되는데 이를 일컬어 '문상' 이라고 했다. '문상'이 되어야 밑천을 대고 이문을 남겨 먹을 수 있는데 고용인은 죽도록 일만 할 뿐 쇠푼 하나 제것으로 만져 볼 수가 없었다.

     

    갖은 풍상 다 겪은 임종이 이른바 '불혹의 나이로 문상이 되어 중국에 가는 첫걸음이었다. 북경 시가를 구경하러 나갔더니, 어느 청루(靑樓)에 편액(篇額)을 써 붙인 '만금루'란 글자가 눈에 띄었다. 지나가는 중국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저게 무슨 뜻이오?"

    "새로 나온 기생이 하나 있는데 정녕 절대 가인이라오. 하룻밤 자는데 1만 금을 내라는 거요."

    그는 혼자 가만히 생각했다.

    '저렇게 거금의 방을 붙인 것을 보면 중국 사람도 선뜻 나서지를 못 하는구나. 얼마나 미인이길래 저런 돈을 내라고 하지.'

     

    가까이 할 곳이 못된다고 여기고 물러서 나오다가 임치종은 혼자 부아가 났다.

    '애라, 저들이 우리를 소국인 이라고 노상 깔보는데 저런 기생을 먼저 사서 지내면 저들의 기를 한번 꺾어 놓을 수 있겠지.

     

    나 같은 사람이야 고국에 돌아가서 한 10년간 남의 고용이 점원 노릇을 하면 그 만이겠거니와 그들이 나 아닌 우리나라 사람들을 대하는 눈초리가 달라지겠지. 어디 큰 도박이나 한번 해보자꾸나.'

     

    마침내 그 청루를 찾아가 1만 금을 던져 주고 하룻밤을 같이 지내기는 했어도 그 여자의 몸에 손도 대지 않고 그냥 일어섰다. "대인께선 존함이나 소녀에게 일러 주시오."

     

    성명만 알려 주고 홀홀히 맨손으로 돌아오니, 고향 의주 사람들 모두 허튼짓을 했다고 그를 나무랐다. 하룻밤 청루에서 미녀를 앞에 놓고 뜬 눈으로 밤을 새운 탓으로 무수한 고생을 했다. 남의 집 고용이라도 들어가려면 청루에다 돈을 내다버린 허랑한 사람이라고 아무도 발을 붙여 주지 않았다.

     

    가난과 수모와 후회로 얼룩진 10년 세월이 흘러간 어느 날 중국에 문상으로 나갔던 어느 점주가 선물 꾸러미를 가득 싣고 임치종을 찾아왔다.

    나 같은 사람을 어인 일로 찾아왔나?"

    "내가 이번 연행 길에서 기이한 인연이 있었지."

     

    값나가는 중국 비단과 보화를 풀어놓으며 북경서 장사를 가장 크게 하는 제일 갑부가 임치종의 안부를 묻는다는 것이었다.

    "그자가 어찌 먼 변방의 나 같은 사람을 알리가 있나?"

    아닐세. 다음 사신이 북경을 올 때엔 자네를 꼭 안동해 가지고 오라고 나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사람에게도 신신당부를 했네."

     

    마침내 임치종은 다음 사신을 따라 중국 상인이 보낸 밑천을 가지고 문상의 자격으로 마침내 북경에 도착했다.

     

    그 부상을 찾아갔더니 십년지기를 대하는 것보다 더 반갑게 맞으며 상빈(上賓)으로 모셨다. 고대광실로 인도하는데 정원에는 기화요, 초가 눈을 현란케 하고 은은한 음악 소리가 황홀한 가운데 깊숙한 분벽사창에 들어서니 고귀한 향기가 사람 사는 곳이 아닌 양 느껴졌다. 영문도 모르고 어리둥절 상좌에 좌정하니 진수성찬 산해진미의 주안상이 들어오고 금잔에다 이름 모를 고귀한 향취의 술을 따라 권했다. 이윽고 성장한 절세미인이 머리를 조아려 공손히 절하며 말했다. "대인께선 소녀를 기억하시나이까?"

     

    10년 전 청루의 그 밤을 얘기하며 그 큰 도량과 고마움에 새삼 눈물을 지우며, 10만 금을 그에게 주었다.

     

    "이 돈은 비록 얼마 되지 않으나 대인께서 소녀에게 갚아준 돈의 이자에 지나지 않으니, 그 은혜는 또 따로 갚을 도리를 생각했나이다." 그러고는 마침내 그 갑부와 독점 거래를 트게 해 주었다. 10만 금으로 중국을 드나든 지 몇 해 만에 임치종은 마침내 100만 금을 모 은 부자가 되었다.

     

    마음 통하면 거금쯤 쉽게 던지다

    전국에 '의주 거부 임 아무개'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성질이 호탕하여 아낄 때에는 한없이 아끼다가도 한번 마음이 통하면 선 자리에서 1천금을 내던져 주기는 예사였다.

     

    이 무렵 충주 고을의 한 아전이 관전을 축내었다가 갚지 못해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임치종이 통 크다는 소문을 듣고 한번 대질러 그 마음을 격동시켜 돈을 꾸어 보자고 아전은 마음먹었다. 천여 리 길을 뒤지며 마침내 의주에 닿았다.

    "소인 충주에 사는 아무개인데, 고을에 기근이 심하여 많은 생민이 굶주리게 되었소이다. 구휼할 길이 없어 멀리서 소식을 듣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청컨대 만전만 도와주십시오."

    그는 선선히 대답했다.

    "그럼 내가 도와주겠소. 그 돈은 여기서 충주까지 1,300리나 되는데 어떻게 운반하겠소?"

    "어음을 끊어 주시면 환전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 말에 임치종은 발끈 성을 내며 그 아전을 호되게 꾸짖었다.

    "네가 나를 속이는구나. 너는 필시 관전 축낸 것을 보충해 놓으려는 속셈이지?"

    "과연 그러합니다."

    아전은 이실직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온데 제가 거짓말을 하는 것을 어찌 아셨습니까. 그것이나 듣고 싶습니다.”

     

    임치종은 그 까닭을 설명했다.

    "지금이 2월인데 만약 그 돈을 환송하면 반드시 4월은 되어야 찾을 수 있는데 그때까지 기다리자면 백성은 모두 굶어 죽을게 아니냐." 임치종이 충주 아전의 속임수를 꿰뚫어 보면서 말했다. "네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을 당장 알아차린 것은 다름이 아니지. 지금 돈을 운반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인데도 내가 너에게 돈을

    주겠다고 승낙했으면 너는 먼저 돈 운반할 방책을 물어야 마땅하거늘 너는 그렇지 않았으므로 곧장 사기 치려는 줄을 알았느니라."

     

    당시 조선 헌종)에 사용하던 엽전은 한 닢 크기가 요즘 500원짜리 주화만큼이나 두껍고 무게는 더 무거웠다. 엽전을 세는 단위로 열 닢 (열 푼)이 한 돈이고 열 돈이 한 냥인데 한 냥은 곧 엽전 백 닢인 것이다. 보통 장정 한 사람이 지고 갈 수 있는 엽전 꾸러미는 고작 100냥이 었다. 충주 아전이 돈짐 운반할 걱정을 했다면 당장 삯꾼 100명이 있어야 1만 냥을 운반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더욱 먼 길을 갈 적에는 한 사람이 70~80 냥씩밖에 운반할 수 없었다. 그러니 120~130명의 일꾼이 필요했으니 당시 의주 바닥에서 그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구하기 힘들 것은 뻔했다.

     

    소나 말에 싣는다고 해도 20~30바리는 족히 되는 송금 행렬이었다. 당시는 걸어 다녔으므로 의주서 충주까지는 1,300리니 짐 없이 잰 걸음으로 하루 100리를 걷는다고 해도 열사흘이나 걸리는 노정이었다. 게다가 짐을 지거나 싣고 가자면 날씨가 좋아도 보름 내지 20일은 넉넉히 걸리는 일정을 잡아야 했다.

     

    이런 셈을 마음속으로 해본 충주 아전은 스스로의 실수도 이만저만 이 아니라는 것을 절감하면서 임종에게 물었다.

    "하오면 어르신께선 빠른 방법으로 돈을 운반할 무슨 좋은 묘책이 라도 있으십니까?"

    사뭇 존경하는 말투에 임치종은 웃음을 띠면서 대답했다.

    "내 돈이 전국에 두루 널려 있어서 만 냥을 운반하는 데에는 한 달도 걸리지 않지."

    임치종은 그 충주 아전에게 1천 냥의 어음을 써 주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네 말이 비록 거짓이었으나 천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찾아왔으니 내 어찌 너의 뜻을 저버릴 수 있으랴. 이 돈을 요긴하게 쓰고 어려운 처지나 면하도록 하라.'

    충주 아전은 백배 사례하고 떠나며 생각했다.

     

    '홍경래의 난 이후로 서북의 민심이 흉흉한 데다 도처에 도둑이 들끓어 어지간한 고갯길이나 산길은 혼자 지나다닐 수 없을 만큼 화적 떼가 날뛰는데 내가 만약 엽전을 바리바리 싣고 지고 장사진을 이뤄 길을 떠났다면 어느 화적의 손에 귀신이 될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구나.'

    조선 후기의 시장 조선 후기 실학자인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는 1830년경에 모두 1천 52 개의 시장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3일장과 10일장, 15일장도 있었지만 5일장이 전체 시장의 86%가량으로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충주 아전을 보내고 난 임치종은 사신을 따라 북경으로 갈 채비를 서둘며 먼젓번에 함께 청나라를 다녀온 문상을 불렀다.

     

    자네는 이번에 북경에 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니 어쩐 일인가. 말해 보게."

    "사실 월여 전부터 배탈이 나서 이제 탈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이번엔 원행(遠行)할 수 없을 것만 같습니다. 연경의 호상(胡商)아무개한테는 대인께서 잘 말씀해 주십시오."

     

    그 문상이 앞서 북경 걸음에서 후미진 곳에 잘못 갔다가 갖고 간 장사 밑천을 도둑에게 털리고 오도 가도 못 할 딱한 처지가 되었던 적이 있다. 그와 거래를 자주 하던 호상이 선뜻 훗날 갚으라며 장사 밑천을 대주어서 자진이라도 하려던 위기를 모면했을 뿐더러 한밑천 잡기까지 했던 것이었다. 그런 사람이 막상 돈 갚을 생각은 않고 병을 핑계 삼아 장삿길 떠나는 것조차 꺼리는 게 아닌가.

     

    "예끼 고얀 사람 배은망덕해도 유만부동이지. 자네가 못 갈 지경이면 돈이라도 갚아야 할 게 아닌가."

    "뭘 그리 걱정이 심하십니까. 혹 그 호상이 제 안부를 묻거든 중병 을 앓다가 죽었다고 하면 그만이 아닙니까."

     

    "고얀 사람이군. 다시는 내 앞에 발길도 들여놓지 마라. 당장 물러 가지 못할까."

    임종은 못내 그 문상의 장사꾼답지 못한 비겁함과 좀스러움을 괘씸히 여기면서 북경에 당도했다.

     

    하루는 북경의 돈 대준 그 호상이 처연한 얼굴빛으로 찾아와서 말 했다.

    "내 들으니 먼저 내가 장사 밑천을 조금 마련해 준 그 문상이 급살 병으로 죽었다더군. 아까운 인재를 놓쳐서 정말 섭섭하이. 우리네 장사 풍습에 한 번 그 사람이 눈에 들면 밑천을 대줘서 뒤를 밀어줄뿐더러, 실패를 해서 본전을 날려도 세 번까지는 봐주는데....... 참 아까운 사람이야."

    눈물을 뚝뚝 흘리던 호상이 임종에게 약간의 은자를 전해 달라며 부탁했다.

    "아직 자녀가 어리고 집안도 가난할 터이니, 이 얼마 안 되는 것으로 장사나 후하게 지내게 해주시오."

     

    그는 난처했다. '문상'이 죽지 않았다고 곧이곧대로 말해 줄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 은덩이를 받아가지고 문상의 배신에 대해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압록강에 닿았다.

     

    말조심의 소중함을 느끼다

    그는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선걸음에 말을 달려 그 문상의 집을 찾았다.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면서 마당에 들어서니 초상난 집이 아닌가.

    "이 사람이 친상을 당했나, 상처를 했나 웬일이지."

    혼자 생각을 하며 온 김에 문상을 하지 않을 수 없어 상청으로 들어섰다. 굴건제복으로 곡하는 상주가 바로 그 문상의 아들인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 사람이 과연 자기가 앞세운 말대로 죽었구나."

    북경에서 가져온 장례 비용을 그 아들에게 전해 주며 그가 죽은 경위를 들었다.

    선친은 어르신네가 연경 길을 떠난 뒤 갑자기 열병을 앓기 시작했

    는데 백약이 다 효험이 없다가 끝내 운명했습니다."

     

    "뭐 남긴 말은 없었던가."

    상인의 신의를 저버렸음을 임종 때 크게 후회하며 뼈저리게 한탄 했습니다. 저희들을 보고 자기는 그 죄 갚음으로 죽어 마땅하거니와 꼭 신의를 지키는 사람이 되라며 그 호상에게 진 빚을 꼭 갚고 사죄하라고 엄명했습니다."

     

    통곡하는 상주를 위로하며 빈소를 물러나온 그는 참 말 한마디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소소한 장사꾼들이 이문이 별로 안 남는다는 말을 강조할 적에 실없는 맹세의 말을 하는 수가 많다. 마찬가지로 큰 흥정을 할 적에는 자기의 신체나 조상을 두고 맹세하는 수도 적잖았다.

    '절대로 '빌미'가 될 만한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구나. 그 사람이 그렇게 허무하게 떠나다니...

    집에 당도한 임치종은 집사를 불러서 일렀다.

    "광 안에 간수해 둔 은덩이를 모두 마당에 꺼내 놔라. 햇볕 좀 쐬야겠다."

    임종이 집사에게 명하여 은괴를 모두 꺼내 햇볕을 쬐게 하니 집안사람들은 그 영문을 몰랐다. 봄이나 가을이 되어 책을 꺼내 햇볕에 말려 습기를 없애고 좀이 먹지 않게 하는 일은 더러 있어도 녹이 슬거 나 벌레도 먹지 않을 은덩이를 내다 말리라니 이상했다. 마당에 멍석 을 깔고 그 위에 백지를 펴고 은덩이를 있는 대로 꺼내 놓으니 그 엄청 난 수량이 장관을 이뤘다.

    어느 가난한 사람이 이 은덩이를 보고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가난한 사람을 불러서 가까이 오게 한 임치종은 의외의 선심을 썼다. "그대는 너무 가난하고 나는 이렇듯 부자이니 너무 공평하지 못한 것 같구려 들고 가고 싶은 대로 갖고 가시오."

     

    이 빈자는 감지덕지 고마워 어쩔 줄 모르며 갖고 갈 만큼 은덩이를 포개어 끌어안고 나갔다. 무거워 끙끙거리면서도 결코 놓치지 않으려 고대문께로 나가는 것을 본 임치종의 좌우 사람들이 괴이쩍게 여기 어 물었다.

    "무슨 연유로 은덩이를 마구 집어가게 하십니까?"

     

    "나도 전날 이런 은덩이가 쌓인 집을 보고 한번 놀란 사람이었다. 내 어찌 그 빈자를 동정하지 않을 수 있으랴."

    사람들은 모두 그가 통이 크고 호탕한 줄 알았다. 사실 그는 돈을 모을 때까지는 더할 수 없이 구두쇠였다. 엽전 한 닢이 아니라 반의 반 푼까지도 결코 소홀하게 다룬 적이 없었다. 결코 낭비란 있을 수도 없었을뿐더러 꼭 써야 할 곳마저 푼돈이라도 줄이고 깎으려 들었던 그 였다.

     

    임치종이 움켜쥐고만 있던 재물을 흩어서 나눠 주고 쓰기 시작한 커다란 계기가 있었다. 일찍이 그는 중국과 무역을 해서 거만금을 모으면서도 한편으로 농토를 널찍이 장만해서 농사를 지어 추수하는 곡식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리고 흩어지는 곡식 낱알과 싸라기며 심지어 밥풀 한 톨까지도 버리는 일이 없도록 양계를 했다. 임치종이 손수 모이를 주고 계란 낳는 수량을 챙기며 그 넓은 마당에 가득하도 록 닭을 길렀다.

     

    이 무렵 서북 지방에 기근이 들었다. 관곡(官穀)이 바닥나자 부호 토호들에게 손을 뻗쳐 돈이나 곡식을 갹출하려 들었으나 그는 겨우 체면치레만 할 뿐 좀처럼 듬뿍 인심을 쓴 적이 없었다. 관서 지방에서는 임 아무개가 재물 있는 사람으로 손 꼽혔을 뿐더러 세상에 둘도 없는 노랑이로 소문이 났다. 가난한 이웃이나 마을 사람들이 굶주려 부황이 난다고 소동을 벌여도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마침 암행어사가 의주에 당도하여 임치종을 책잡을 꼬투리를 찾기 위해 그의 집을 우선 찾아갔다. 초가을 석양 무렵 유난히 매미, 쓰르라미 소리가 요란한데 허름한 나그네가 찾아와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하는 소리에 임치종은 깜짝 놀랄 일을 발견한다. 바깥마당 가득 모이를 쪼고 있던 닭 중에서 병아리 한 마리를 솔개가 채어가지 않는가.

     

    여느 때 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나그네를 사랑방으로 모셔 놓고 진수성찬을 차려서 대접을 하면서 집사를 시켜서 두툼한 책으로 된 문부(文簿)를 꺼내오게 했다. 그 책에 이름이 적힌 사람을 모두 불러 모아 그 큰 사랑의 대청에 가득 모이게 하고는 그들 모두에게 곡식과 돈을 나눠 주었다.

     

    "김 아무개는 10년 전 흉년들었을 적 아무 달에 나한테 쌀 서 말만 꿔달라고 했는데 내가 그걸 거절했지. 사실 그때 그 곡식은 더 있어도 춘궁기를 다 이겨낼 수는 없겠기에 내가 안 주고 여기다 적어놨지. 해 마다 장리로 늘려서 쌀 스무 섬이 되었다네. 이걸 가져가게. 그냥 먹지 말고 몇 해만 늘리면 백석꾼도 될 수 있는 밑천이야." 모두들 임치종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암행어사도 감복한 사연

    암행어사는 속으로 출도할 기회를 노렸다가 한편으로는 실망을 금치 못했으나 또 한편으로는 감탄해 마지않았다. 혼숫감 빌리러 왔던 사람, 장사 밑천 꾸러 왔던 사람, 죽어간다고 약 대달라던 사람, 일일이 치부해 둔 것을 상기하면서 그들에게 걸맞는 돈을 내주고는 크게 잔치를 벌였다. 평소 임치종 스스로도 검소하게만 살던 것과는 딴판으로 소를 잡고 술을 거르고 흥청망청 음식을 내오게 했다.

     

    이윽고 잔치가 파했다. 그 암행어사와 단둘이 앉아 젊어서 고생한 얘기며 중국 가서 청루에 만 금을 던져 호기를 부린 온갖 사연을 밤 가는 줄 모르고 들려주었다. 오히려 암행어사가 감복하여 스스로 신분 을 노출하고 말았다.

     

    "주인장. 사실 나는 조정서 내려온 관원이었소. 혹여 탐학질이나 해서 돈을 모으고 백성을 괴롭히지 않나 싶어서 내 그대를 찾아 온 것이었소. 정 트집 잡을 것이 없으면 살고 있는 집 칸수라도 넘치게 지었으면 내 그것이라도 징치하려 들었소."

     

    "나도 젊은 선비가 겉모습은 초라해 보이나 그 걸음걸이나 안광이 비범찮은 것은 알아차렸소 마는 사실 그보다도 내게는 더한 징험 을 보여준 게 있었소이다."

     

    술 한 순배를 권하고 나서 임치종은 얘기를 계속했다. "내가 이토록 부자가 된 것은 부지런히 모으고 일한 덕분도 있지만 의주 제일의 부자가 되자면 뭐랄까 천우신조랄까 도와주는 운수가 있어야 했소이다. 내가 곡식을 심으면 지나가는 소라도 밭고랑에 거름 될 물건을 한 무더기 누고 갔으면 갔지 곡식을 밟는 적이 없었소. 하다 못해 호박을 심으면 한 꼴지에 두 개씩 열렸으면 열렸지 물러서 떨어지거나 썩는 법이 없었지요. 마찬가지로 사온 물건의 수량이 한두 개가 더 많았으면 많았지 결코 모자란 적이 없었으니 이를테면 재수가 좋았다고나 할까요.

     

    또한 짐승을 먹여도 새끼가 죽는 법이 없었고 닭을 쳐도 가령 계란 열세 개를 품게 안겼다면 나중에 병아리로 깨어 나온 것은 한두 개 늘어난 열네 마리나 열다섯 마리가 되도록 어미닭이 알을 더 낳아 보탰으면 보태었지 결코 줄어드는 법이 없었소. 심지어 닭이 거름 무더기에서 벌레를 쪼아 먹을 적에도 끌어 모아가지 끌어 내려 흩은 적이 없었소.

     

    바로 어제 선비님이 우리 집을 들어서는 순간 솔개가 병아리를 채어 가는 것을 보고 제 운수가 이젠 다 찼구나 직감 을 했다오.

     

    원래 얼마나 모을 수 있나 그 끝까지 가보고 싶었는데 스스 로 내리막길이 시작된 줄 얼른 알고 당장 베푸는 행동에 옮기는 그것 도 역시 상인의 타고난 상재가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 어사가 조정에 임치종을 천거하여 벼슬을 시켜 마침내 곽산 군수에까지 이르게 했다.

    한갓 상점 머슴살이로 시작해서 한 나라 제일의 부자가 되고 출신 바탕을 뛰어넘어 관인을 차는 목민관에까지 이르렀던 임치좋은 그의 자손들이 재산을 제대로 보존 못 할 줄 알고 천석지기의 땅을 어느 관가의 소유로 만든 덕분에 갑오경장 뒤까지 그 부명(富名) 을 잃지 않았다.

    2025년 8월 3일 

     

    출처: 이준구 상호성 편저 '조선부장의 세상읽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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