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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 : 지금 여기가 하느님 나라종교문화 2025. 8. 11. 08:25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지만, 당시의 왕정 제를 공화제로 전환해야 한다거나, 아테네 민주주의를 재현해야한다거나 같은, 정치 체제의 원리나 실현 방식 등에 대해 서는 일절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님이 꿈꾸었던 하느님 나라는 당대의 그 어떤 정치적 선택지에도 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대신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가 무엇이 아닌지에 대해서 는 많은 말을 남겼다. 하느님 나라는 카이사르의 나라도, 헤롯 의 나라도, 다윗의 나라도 아니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모든 외적 지배 구조를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는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는 '내세'나 '내면’의 나라도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리스도인 중에는 '내세의 천국'을 하느님 나라로 여기는 이들이 많다. 그들에게는 살아서 예수 잘 믿고, 그 결과로 죽어서 천국 가는게 신앙과 삶의 목표다. 그들은 오늘도 거리에서 거친 목소리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친다. 하지만 정작 예수님은 내세의 천국에 대해선 거의 말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이 내세 또는 사후의 천국으로 여기는 '하늘나라'를 언 급한 것은 대부분 비유의 맥락에서였다.
물론 마태오복음서에는 '하늘나라'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지만, 그것은 마태오 공동체가 유대인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사실과 관련이 있다. 초월적 유일신 신앙을 가졌던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은 물론 유한한 인간의 언어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도 불경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다른 경건한 유대인들처럼 마태오 공동체도 '하느님 나라' 대신 '하늘나라'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 따라서 마태오복음서의 하늘나라도 인간이 죽어서 가는 '천상의 나라' 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실현되어야 할 '하느님 나라'의 다른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죽어서 천국 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만, 예수가 가르쳐 준 기도는 그 반대였 다. "나라가 임하게 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시옵소서(마태오 6장 10절)." 예수는 저 하늘이 아닌 이 땅에서 정의, 평화, 생명의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기를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다른 한편, 하느님 나라를 '내면의 평화를 은유하는 것으로 여기는 그리스도인도 많다. 그들은 "하느님의 나라는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루가 17장 21절)"라는 말씀을 영적 의미로 해석한다. 루가복음서의 이 말씀을 한국어 성서들은 다르게 번역한다. 개역성서는 "너희 안에 있다"로 번역하고 공동번역 과 표준새번역은 "너희 가운데 있다"로 번역한다. 흥미롭게도 영어 성서들도 비슷하다. 킹제임스성서(King James Bible)는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로 번역하고, NRSV 성서는 “The Kingdom of God is among you"로 번역한다. 이 차이가 사소하지 않은 것은 '너희 안에 (within you)'라는 표현에 매이면 개인의 내면으로 침잠할 수 있지만, '너희 가운데 (among you)' 라는 표현에 강조점을 두게 되면 공동체적 관계를 지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님이 "삶이 고통스러울수록 내세의 천국을 소망 하라"라고 가르쳤다면, 예수님은 세상을 등진 종말론 집단의 교 주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예수님이 "세상이 어찌 되든 상 관말고 내면의 평화를 누려라"라고 가르쳤다면, 예수님은 팔레스타인의 스토아적(Stoic) 신비가로 추앙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수가 선포하고 실현한 하느님 나라는 로마 제국에 도 헤롯 왕국에도, 그리고 종교 왕국에도 불온하고 위험한 나라였다. 그래서 권력자들이 공모·공조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로마 제국, 헤로데 왕국과 정치적, 군사적 충돌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세상의 권력자들이 예수님을 그토록 위험 한 존재로 여기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예수님과 그의 공동체의 무엇이 당시의 지배체제를 위협했을까?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의 핵심어 중 하나는 '가난한 사람 (the poor)'이다. 구약성서에는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고 돌보라는 하느님의 명령과 예언자의 외침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서에서 말하는 '가난한 사람'은 경제적으로 빈곤한 사람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정치적·경제적· 사회적 불의로 인해 차별받고 혐오당하고 배제당하는 모든 사람이 성서가 규정하는 가난한 사람이다.
이와 같은 성서 전통의 가난한 자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20세기의 해방신학자들은 '가난한 자를 위한 하느님의 우 선적 선택(God's preferential option for the poor)'이라는 신학적 개념으로 재조명했다. 해방신학의 창시자 중 하나인 페루의 신학 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즈(Gustavo Gutierrez)는 가난한 자를 “불의에 의해 자기 수명보다 일찍 죽는 자"로 정의했다.
그렇게 보면, 우리 시대의 가난한 자는 경제적으로 빈곤한 사람만이 아니라 온갖 차별과 혐오와 억압에 의해 사회적, 신체적 생명을 위협당하는 모든 약자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산업재해로 죽은 사람들, 차별과 혐오의 희생자들, 전쟁 폭력의 희생자들, 생태계 파괴로 죽어가는 모든 생명이 가난한 자다. 특히 오늘 날의 기후 위기 현실에서 자연은 '가난한 자 중의 가난한자(the poor among the poor)'다.
1970년대에 남미 해방신학이 재조명한 '가난한 자는 70, 80년대 한국 민중 신학이 재발견한 '오클로스(ochlos)'와도 통한다. 오클로스는 '무리' 또는 '군중'이라는 뜻이다. 유사한 의미의 '라오스(Laos)'와 병행되기도 하는데,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오클로스를 불의에 의해 가난하고 억눌리는 '민중'과 동일시했다. 김진호는 안병무가 발견한 오클로스의 특징을 "무 소속성'을 특징으로 하는 집단"이라며 "사회의 경제, 정치, 문화적 분배 과정에서 총체적으로 소외된 최악의 박탈 계층으로서 사회적 고난의 담지자"라고 했다. 주류 사회에 소속되지 못하고 배제되어 소외된 사람들이 오클로스요, 민중이라는 것 이다. 예수님은 거대한 억압의 구조 속에서 몸과 마음이 부서진 사람들의 친구요 치유자요 교사요 해방자였다.
가난한 사람, 오클로스, 민중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잊히는 것, 있어도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는 것이다. 사회적 무관 심과 망각 속에 보이지 않는 존재, 아무것도 아닌 존재, 비존 재(non-person)가 되는 것이다.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의 가장 빛나는 정신은 가난한 사람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가난한 사람이 끝까지 잊혀지는 일은 없으며, 고난 받는 사람의 희망도 영원히 사라지지는 않는다(9장 18절)”라고 노래한다. 하느님은 가난한 자를 잊지 않고, 우선적으로 사랑하고 돌보는 신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을 돌보았고,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히브리인들의 신음소리를 듣고 그들을 파라오의 압제에서 구원 했고, 예언자들을 세워 가난한 자를 괴롭히고 학대하는 권력자들의 죄를 폭로하고 규탄했다.
히브리 전통의 예언자 정신을 계승한 예수님은 그 자신이 가난한 자였고, 가난한 자와 함께 살았고, 가난한 자를 위해 죽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 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장 18~19절)
크로산은 하느님 나라를 '노바디의 나라(kingdom of nobodies)'라고 한다. 노바디, 즉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 존재를 부정당하는 사람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위한 나라가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라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크로산이 노바디라고 부른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을 특별하고 고귀한 존재 인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렀고, 모두가 존엄하고 평등한 하느 님 나라 공동체에 초대했다.
예수의 저항은 정치 체제의 '대체'보다 더 깊은 차원의 '대안사회' 형성이었다. 예수의 하느 님 나라의 법은 노바디들을 향한 무조건적 자비와 환대였다. 이처럼 모든 지배와 차별을 거부하는 하느님 나라는 권력자 들에게는 위험한 상징이었지만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에게는 기쁜 소식, 즉 복음이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안의 가난한 자를 망각하는 것은 하느님과 예수님를 망각하는 것이다. 우리 곁의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것, 그것이 유대-그리스도교 신앙의 원천이다.
예수님 시대의 가난한 자는 또한 죄인이기도 했다. 이스라 엘 사회는 대부분의 다른 고대 사회와 마찬가지로 정(淨)과 부정(不淨)의 이분법에 기초해 있었다. 유대인들은 신체적, 의례적, 사회적으로 부정한 자들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공적 삶에서 배제했다. 특히 정·부정의 판별이 복잡하고 세세한 율법 조항에 따라 이루어지면서, 율법을 준수할 수 없는 가난한 자, 연약한 자는 죄인으로 규정되어 더욱 배제되었다. 예수님은 부정하다고 낙인찍힌 죄인들을 거리낌 없이 만났다. 예수님은 왜 세리(세금을 징수하는 관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를 하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비난에,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병든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면서, 자신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답했다.
여기서 '죄인'의 의미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예수가 말하는 죄인은 말 그대로 '죄를 지은 사람'이라는 의미보다는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이 죄인으로 규정한 사람'을 뜻한 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예수님 역시 종교적으로는 '신성 모독죄'로 고발되었고 정치적으로는 '선동죄'로 고 발당한 죄인이었다. 예수님은 체제가 죄인으로 만들어 배제하던 사람들을 확대하고 사랑했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공동체는 죄인들의 공동체였다.
2025년 8월 11일 지금 우리에게 예수는누구인가의 책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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