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병우박사의 종교관과 인생관스크랩된 좋은글들 2025. 8. 24. 20:27
하느님의 발견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1953년 미국에 처음 가서 이것저것 견문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섭리는 과연 오묘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뉴욕 맨하탄의 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 건물을 보면서, 하느님의 역사함이 없이 어떻게 저런 백층이 넘는 집을 지을 수 있단 말인가 하고 감탄하기도 하였다. 하느님은 세계 인류에게 골고루 자기들만이 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신 것이라고 느꼈다.
미국 사람에게는 저런 건축을 할 수 있는 지식과 지혜를 주시고 또 우리에게는 이엉을 엮어 만든 집이나 기와집을 지을 수 있는 색다른 지혜를 주신 것이다. 심지어 제비나 까치 같은 날짐승에게까지도 진흙이 나 벼이삭으로 또는 나뭇가지를 물어다가 집을 짓고 살 수 있도록 재간을 주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미국의 고층 건물을 바라보면서 '과연 하느님은 계시다'란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 각 개인이 하느님을 만나는 길은 천차만별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람은 교통사고로 병상에 눕게 된 뒤 하느님을 깨닫는 이도 있고, 가족의 죽음이나, 풍비박산된 경제적 파탄 후에 하느님을 알게 되었다는 분도 있다. 그야말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겪게 되는 고통과 역경 속에 서 하느님과 만나게 된다는데, 나는 팔자 좋게 맨하탄의 마천루 숲을 유람하는 가운데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이 느껴졌으니 정말 희한한 일이다.
그때 나는 하느님께서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고, 이어 나를 색다르게 키워 주셨고, 나에게 푸짐한 삶을 누리게 하신 분이란 것을 처음으로 분명히 알게 되었다. 내 아들과 딸들이 다 하느님의 아들, 딸이고, 나의 집과 재산도 모두 하느님의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깨달았다. 오늘까지 지내온 모든 일은 물론, 앞으로의 모든 일도 다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았다.
구도자의 심정
하루는 사무기기 장사를 하는 친구가 찾아왔을 때, 교회가 너무 보수적이 더라고 불평처럼 말했더니, 카톨릭 신자인 그는 그렇다면 자기와 함께 명동 성당에 한번 가보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난생 처음 그를 따라 명동 성당에 따라 나섰다. 카톨릭에서 지내는 미사라는 것을 처음 참례해 보았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카톨릭의 제사라는 것인데, 경건 한 인상은 받았지만 일어섰다 앉았다 하면서 하는 여러 가지 전례가 나에게 는 무척 부담스러웠고,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형식주의가 카톨릭을 휘감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한 마디로 말해 나는 카톨릭 형식주의에 질렸다. 이 때가 아마 1959년쯤 되는 해인 것 같다. 나는 그 후 어떤 친구를 따라 영락교회도 가 보았다. 때마침 백낙준 박사 부부가 참석하고 있었는데 모든 신자들이 남녀 따로 앉아 있었지만 이 두 분만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나는 거기서 깨달았다. 교회가 왜 이렇게 보수적이냐고 따지며 불평할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할 수 있다면 백 박사처럼 부부동반해서 의젓하게 앉아 있으면 좋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날따라 한 목사님은 설교 중에 뜻밖에도 소매가 짧은 옷을 입은 여인에 대해서 망신을 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정말 인상적이었던 설교가 허물어지는 순간이었다. 미국에서 공부까지 하고 왔다는 한 목사님이 미니스커트나 반소매 블라우스를 입은 여신도들에게 창피를 주는 설교는 듣기에 민망했다. 미국은 핫 팬츠를 입고, 소매 없는 블라우스를 입고 다니는 것이 예사인 시대였다. 세상은 온통 이렇게 바뀌었는데도 한 목사의 설교는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의 여자들이 시원하게 옷을 벗고 다니고, 남자들이 여름에도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보고, 일본인들이 훈도시만 차고 서울 거리를 걸어다니는 것을 보던 나는 어느 편이 하느님의 뜻인가를 생각했다. 약한 편에 서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하느님을 찾으러 다닌답시고 이 교회 저 교회를 순례했지만 이 같은 사소한 일에 신경이 쓰이 곤 했다.
이처럼 종교 외적인 인간적인 면이 내 비위에 맞지 않아 교회를 멀리하게 되었다. 나는 그 후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봉사를 열심히 하며 착하게만 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종교를 선택하지 않고 살았다.
그 후부터 나는 전국적으로 무료 개안 수술을 하러 다녔고, 맹인을 도와주는 재활 센터도 세웠다. 교회는 가지 않아도 실제로 남을 도와주는 것을 잘 하면 그것이 참 기독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미국 사람들은 진실로 하느님을 믿고 그 정신으로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온갖 문물도 발전한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한국에서 나도 그 같은 기독교 정신만을 갖고 살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부지런하게 기독 정신을 발휘하여 봉삿거리를 찾으며 열심히 일을 하였다. 그래서 앰뷸런스를 타고 개안 수술 무료 순회 진료도 한 것이다. 그 순회에 따라다니던 한종원 씨는 지금도 그 때의 정열적인 봉사의 시절이 자기 일생에 큰 영향을 미친 교훈적인 일로 기억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현재 천호동에서 안과의원을 개업하고 있는 한종원 씨는 1989년 대한적십자사의 박애상을 받았다. 이는 나에게 매우 기쁜 사실이었다.
형무소에서 나온 전과자, 강도 같은 사람에게 직장을 주기도 하였는데 이것도 하느님께 대한 은총의 소박한 갚음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아침에 깨면 하루의 삶을 허락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고, 그 보답은 하느님이 허락 해 주신 시간을 아껴 쓰며 열심히 사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이 하느님 섭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것은 하느님 중심으로 사는 신앙생활이 아닌 것 같았다. 나를 중심으로 해서 내 편리한 대로의 생활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진지하게 종교에 대해 심사숙고하기로 하였다. 어떤 종교 단체에 들어가 배울 것도 배우고 성경의 지식이라도 얻어야 할 것이란 생각이 든 것이다. 말하자면 구도자의 자세로 종교 공부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퀘이커 모임에 나갈 결심을 하였다. 이 모임은 함석헌 선생이 지도하는 모임 이었다. 내 소유인 청진동 타자기 공장을 빌려 주어 퀘이커 모임을 시작하였다. 함석헌 선생의 무교회주의적인 설교에 나는 많은 공감을 받기도 했다. 그 후 나는 1980년에 미국에 다시 들어간 뒤 교회에도 다녀 보았고, 통일교 목사의 방문을 받기도 하였다. 또 통일 원리 이론을 배우기 위해 통일교의 세미나에도 참석해 봤다. 그러나 통일교의 공용 언어와 공동 글자를 우리말 과 한글로 통일한다는 말은 없었다. 통일교 후원으로 나오는 신문 잡지에는 한문자 혼용이 많았다. 그리고 예수를 구세주로 인정하지는 않고 문 목사 자신이 구세주인 양 말하는 것이 미심쩍었다. 그것보다도 나는 통일교는 사람을 죽이는 무기를 생산하는 기업을 운영하는 교단이라는 소식을 듣고 실망하였다. 나는 곧 모 일간지에 그 점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그 후 나는 성경에 취미를 붙이기 위해 일본의 소설가 미우라 아야꼬가 쓴 소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재미있게 읽기도 하였고, 카톨릭의 통신 교리 강습도 조금 받아 보기도 하였다. 성경을 읽어 봐도 믿어지지 않는 부분이 많아 지식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이를 극복하고 싶었다. 내가 여러 교회를 떠돌아 다니다가 그만둔 것은 대개 어떤 신학적인 회의가 있어서라 기보다는 눈에 거슬리는 못마땅한 것들이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구도의 마음이 차츰 나이와 함께 자꾸 부풀어올 때, 김수환 추기경의 정의 와 평화를 위해 부르짖는 글이 나왔는데 나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우리 조국이 어둠에 잠겨 소용돌이칠 무렵이었다. 최루탄 연막 속에서 온 국민이 눈물로 범벅이 되었을 때였으니 김 추기경의 목소리는 확실히 광야에서 들려오는 세례자 요한의 소리였다. 나는 김 추기경의 용기와 진리의 발언에 크게 감동하였다. 아무도 바른 소리를 하지 못하고 있을 무렵이었지만, 그는 대담하게 군사 독재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바른말을 토해내곤 하였다.
내가 존경하는 분들
나를 고집불통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1965년 4월 한국일보를 보면 “한국의 유아독존 10화”라는 연재물이 나오는데, 그것은 이름이 좋아 유아독존이지, 쉽게 말해 한국 사람들 중에서 이름난 고집쟁이 열 명을 차례로 소개한 것이다. 여기에는 이승만, 최현배, 김원규 등이 등장했는데 나도 그 속에 끼어 4 월 11일자로 소개되었다.
나는 덮어놓고 내 것이 옳다고 내세우는 이기적인 고집을 부린 적은 없다고 생각한다. 나의 신념을 밀고 나가는 것뿐인데, 사람들은 아마 나를 고집쟁이로 아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것도 어쩌면 남 보기에는 괴팍한 유아독존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보기를 든다면, 시간을 철저히 지키는 일이라든지, 에누리는 살 때나 팔 때나 절대 해서는 안 된다든지, 관혼상제에 시간이나 돈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든지와 같은 생활 신조는 내 평생을 두고 지켜온 것인데, 이런 것들을 보고 고집 운운하는 모양이다. 그런 종류의 고집은 끝내 부릴 생각이고 보니 고집쟁이란 별명이 그리 밉지는 않다.
그러나 내가 이같이 고집을 부릴 정도의 신념을 얻기까지는 많은 존경하 는 분들로부터 훌륭한 점들을 두루 배우고 익혀, 수용해 온 결실이란 점을 밝힌다. 나는 덮어놓고 잘난 척하고 내 식으로 산다는 이기적인 의미의 고집 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무척 좋아했다. 지금까지도 즐기고 있는 책읽 기를 통해 존경할 분들을 많이 만났으며, 좋은 인생 교훈과 생활 철학을 책을 통하여 얻을 수 있었다. 사교를 즐길 줄 모르는 나는 주로 책을 통해 사람을 발견했고, 사람답게 살아가는 모습을 본받으며, 친교를 맺기도 했 다. 그러한 분 중 외국인으로는 인도의 간디와 중국의 임어당을 들 수 있 다. 그리고 한국인으로는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평생을 바치고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지주 구실을 한 함석헌 선생, 한글 발전을 위해 삶 전체를 바친 최현배 선생, 어려운 한문을 번역할 수 있는 한문 실력을 가졌으면서도 한글 전용을 외쳐 온 시인 이은상 선생, 한글 기계화에 각별한 관심을 표명하고 발전시켜 보려고 애쓰셨던 주요한 선생, 일제 때부터 한글 타자기로 원고를 쓰는 시대와 신문사에서 라이노타이프로 문선 식자를 할 시대가 와야, 우리 민족 문화는 획기적으로 발전한다고 말한 이광수 선생, 독재자의 총칼에도 비겁하지 않은 김수환 추기경 등이 있다. 일간 신문들이 모두 비과학적인 세로쓰기와 한문 혼용으로 나오는 지금에 한글 가로쓰기와 한글 전용으로 일간지를 발간하여, 민족문화 발전에 획기적 업적을 이룩한 한겨레 신문과 민주일보를 창간한 분들에게 높은 찬사와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밖에도 나는 민족과 조국을 위해 자기 일신의 영달과 개인 생활을 돌보 지 않고 싸우는 용기 있는 지식인, 대학생, 근로자, 농민들을 존경한다.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왔다. 내가 신조로 삼는 정의와 평화를 이루기 위하 여 그들은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으니, 그런 점에서 나는 그들을 존경하는 것이다. 나와는 다소 생각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자기 분야에서 자기 신념대로 위험을 무릅쓰고 투쟁하는 사람을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형선고를 받고도 자기 신조를 굽히지 않은 정치인, 시인, 소설가들에게 도 머리를 숙인다. 심한 고문을 받고 목숨을 잃은 박종철 군이나, 봉재 공장 의 직공들도 사람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분신자살한 전태일 군 등도 내가 하지 못할 일을 대신 해낸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내 대신 희생을 해 준 사람이기에 나는 그들을 존경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덕목과 나의 삶의 신념을 굳히게 하는 데 큰 영향을 준 분들을 주로 독서를 통해서 많이 만났다. 이분들은 대체로 많은 분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훌륭한 분이기도 하지만, 내가 존경하게 된 데에는 역시 한글 기계화 문제와 한글 전용에 대해 투철한 신념 때문인 경우 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나에게 정신적으로 크게 영향을 준 외국분들은 한글 기계화는 관계가 없이 주로 인류나 민족을 위해 큰 공헌을 한 분들이다. 그 중 내가 존경하는 간디는 누구나 다 잘 알다시피 인도에서는 '위대한 성인'이란 칭호 를 받고 있는 세계적인 인물이다.
런던 대학에서 법률 공부를 한 그는 영국 측에 붙어 자신의 영달을 누릴 수도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누더기 무명옷을 걸쳐 입고, 인도 민중 들과 함께 반영 독립 운동에 나선 분이다. 시간은 곧 생명이라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 나는 이분에 관한 책을 열독하면서 보람 있는 삶에 대한 생각을 더욱 굳게 할 수 있었다. 이분은 기회 있을 때마다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유별나게 많이 하였다. 이분이 쓴 시간에 대한 이야기는 나 혼자 읽기가 너무 아까운 생각이 들어, 나는 이것을 한데 모아 복사를 해 친지나 이웃에게 뿌리기도 하였다. 더욱이 이분은 타자기에 얽힌 일화도 있어 나의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그는 신문사에서, 영문 사설을 영국인 여성 타자수를 시켜 전속으로 타이핑을 해왔다. 그는 정성스럽게 일을 잘하는 타자수가 너무 고마워 봉급을 인상해 주겠다고 하였더니, 그 백인 여성은 이를 사양하였다는 것이다. 간디만 감동할 일이 아니었다. 나도 감동을 하였다. 훌륭하고 성스러운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훌륭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따르기 마련인 것이다.
우리는 좋은 사람을 얻게 된 사람을 흔히 인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남에게 잘 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을 얻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 된다. 물론 일하는 사람의 성실성도 필요하지만, 주인 측의 훌륭한 마음 쓰임새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본다. 그러니 자기 하기에 따라서 인복을 자기 스스로가 만든다는 것을 간디의 일화를 통해 확인하게 된 셈이다. 간디는, 문명이란 하느님의 섭리로 이루어진다고 했는데, 그 같은 생각에도 나는 크게 공감했다. 또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 정신을 잃고 사는 것은 몹시 아쉬운 일이라고 지적한 점도 무척 감명 깊었다. 나는 간디가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세계적인 위대한 사상가라고 표현하는 편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는 확실히 인도인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이끈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스크랩된 좋은글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트럼프의 압박, '핵연료 동맹'으로 판을 뒤집자 (4) 2025.08.26 트럼프 "혹시 그 정신이상자?"… 李대통령 '특검' 얘기에 빵터진 이유 (3) 2025.08.26 공병우박사의 인생의 길을 바꾼 그의 교장선생을 비판 작문 (4) 2025.08.24 "물리면 위험" 야생 너구리와 전쟁 (0) 2025.08.23 "한국 사랑한 안동의 사위, 南北을 시원하게 달렸죠" (8) 2025.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