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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대통령' 흉내 내단 나라 망가진다스크랩된 좋은글들 2019. 6. 8. 09:16
'민족 대통령' 흉내 내단 나라 망가진다
대통령은 변호인 없는 '역사 法廷'의 피고인.
나라가 놓인 '역사의 맥락'. 나라 둘러싼 '장소의 논리' 뚫어봐야
같은 말도 때와 장소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국가 최고지도자의 말의 무게는 보통 사람보다 몇천 배 무겁다. 한마디의 파문이 울타리를 넘어 나라 밖으로 번져 외교 기반을 흔들기도 한다. 외환위기의 여러 요인의 하나로 거론되는 '버르장머리' 발언이 그 실례(實例)다. 대통령은 연단(演壇)을 밟기 전 이 자리가 무슨 자리이고 지금이 어느 때인가를 정확하게 판단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는 걱정했던 대로 나라를 또 한 번 뒤집어 놓았다. 올해 들어서만도 해군사관학교 졸업 축사, 3·1절 기념사, 5·18 기념사 등 벌써 몇 번째다. 현충일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진 이들의 충렬(忠烈)을 기리는 날이다. 대통령이 선 연단 뒤로는 11만명의 무명용사들을 비롯, 모두 17만9000여명의 장병과 순국선열이 잠들어 있다. 거의 전부가 6·25 전쟁 전사자들이다.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대표해 현충 의식을 주관하는 제주(祭主)의 소임을 맡고 있고, 추념사는 호국 영령(英靈)에게 나라의 현실을 보고하는 축문(祝文)에 해당한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난데없이 김원봉(金元鳳)을 불러냈다. 그는 일제시기 무장 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을 이끌다 해방 후 월북해 김일성 정권 수립과 6·25 전쟁 기간에 국가검열상과 노동상을 지냈다. 그러다 1958년 정권 암투(暗鬪) 때 숙청됐다. "광복군에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 의용대가 편입돼 독립운동 역량을 집결했다. 이들이 연합군과 함께 기른 군사 역량이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됐고 나아가 한·미 동맹의 토대가 됐다." 김원봉은 다른 북 정권 요인들처럼 6·25 초반 전선을 시찰하고 남침한 인민군을 격려했을 것이다. 그런 그가 국군 창설의 뿌리라는 대통령 말에 숱한 고지(高地) 탈환전에서 인민군과 총검(銃劍)을 맞대고 백병전(白兵戰)을 벌이다 산화(散華)한 장병들이 고개를 끄덕였을까. 귀를 막고 싶었을 것이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았던 분들의 뜻을 기리고 넋을 위로하는 국가 의식에는 법도(法度)가 있어야 한다. 그들이 목숨과 맞바꾼 대의(大義)가 무엇이었나를 오늘에 비추어 새로 조명(照明)하고, 어떻게 그 대의를 계승·발전시킬지를 지도자와 국민이 함께 다짐하는 자리여야 한다. 링컨 대통령의 게티즈버그 국립묘지 헌정(獻呈) 현설은 표준 교과서다. 1863년 7월 1일부터 사흘 동안 게티즈버그에서 북군과 남군이 격돌해 5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링컨은 넉 달 후 이곳 연단에 섰다. "우리는 이곳에서 싸웠던 용사들이 남긴 미완(未完)의 대업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가 결코 소멸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해야 합니다."
문 대통령은 기념식에서 해군청해부대 소속으로 소말리아 아덴만 파병 임무를 마치고 복귀하던 날 입항식 도중 사고로 숨진 최종근 하사 부모와 함께 대표 분향을 했다. 빈소가 차려진 이틀 뒤 청와대 비서관 하나가 다녀가고 그만이었다는 최 하사의 적적한 영결식 소식에 가슴이 먹먹했던 터라 이 장면으로 지켜보던 사람들 가슴속 희미한 불씨 하나는 요행히 살아남았다.
세상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언젠가는 김원봉의 과(過)와 공(功)을 저울에 올려놓을 때가 올 것이다. 6·25 전후 월북한 수만명의 남로당원 가운데 중간 간부 이상은 김일성 치하에서 처참한 말로(末路)를 맞았다. 그들의 개인적·역사적 선택과 그에 따른 비극을 냉철하게 되돌아볼 날도 올 것이다. 그날이 앞당겨지느냐 늦어지느냐는 북한 동포가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져온 3대 세습 독재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거나 해방될 전망이 확실해지는 것과 직접 연결돼 있다.
대통령은 그날이 오기까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의 소임(所任)에 충실해야 한다. 대한민국이 놓인 '역사의 맥락(脈絡)'과 대한민국을 둘러 싼'장소의 논리'를 뚫어 볼 줄 알아야 한다. 섣부른 '민족 대통령' 행세는 내부 분열을 심화시키고 북한 동포의 노예 상태를 연장시키고 동맹(同盟)을 갈라놓을 뿐이다.
속생 각은 말로 나타나고 말은 행동으로 본심(本心)을 드러낸다. 생각을 단속해야 말이 헛나가지 않고 말을 단속해야 실족(失足)하지 않는다. 모든 '현(現)정권'은 '전(前)정권'으로 넘어가는 길 위에 있는 정권일 뿐이다. 대통령은 '역사의 법정'에 선 피고인 신분이다. 그 법정엔 변호인이 없다. 정권의 발자취만 증거로서 말하는 법정이다. 두려운 줄 알아야 한다.
<2019년 6월8일 조선일보 강석천칼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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