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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켓리스트를 수행하기위해 오늘은 걸어서 새벽기도회에 가보기로 했다. 집에서 교회까지는 약 10키로가 넘는다. 그전에는 시간이 없으면 택시타고 가보기도 했고, 조금 시간이 있으면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도 했다. 오늘은 일어나보니 2시가 조금 지났다. 5시반에 새벽기도회 시작되니 걸어가도 될성 싶었다. 청계천 고산자 교에 이르니 그곳 시계탑은 3시를 가르키고 있었다. 그전에 마라톤을 한다며 뛰어다닐때에는 1시간 반이면 다니곤했는데 심박게를 달고있으니 뛸수가 없다. 부지런이 걸어도 젊은이들에게 추월을 당한다.
요사이는 날이 더워서인지 밤에도 낯처럼 활개를 치고 다니는 사람도 많다. 야외 농구장에는 젊은이들이 운동연습을 하고 있었고 산책로에는 젊은이들이 일렬로 줄을 지어 힘차게 페다를 밟는다. 나는 빨리걷지못하니 시간에 여유를 두고 나왔는데도 간신이 예배시간에 맞추었다.
기도회를 마치고 나오니 현관로비에는 이곳 정신여고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사전시회가 있었다. 그는 1910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뒤 광주 수피아여학교와 모교에서 교사를 지냈다. 1915년 도쿄 여자학원 예비과에 입학한 후 1918년 동경유학생독립단에 가담했으며, 1919년 2·8독립운동에 참가했다. 2·8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국하여 각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사상을 고취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5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석방 후 모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면서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추대되었다. 임시정부 군자금 지원에 힘쓰던 중 비밀조직이 탄로나, 3년 형 선고를 받았다. 복역중 병보석으로 풀려나와 1921년 상하이로 망명했다. 1923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파크대학과 시카고대학교 등에서 공부했다. 근화회를 조직하여 재미한국인의 애국정신 고취와 일제의 식민정책을 서방국가에 알리는 데 노력했다. 귀국하여 그리스도교 전도사업과 신학발전에 노력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2019년 7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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