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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는 무엇을 했는가?스크랩된 좋은글들 2020. 2. 18. 08:06
서울 효창공원에는 안중근을 비롯한 독립투사 4인의 묘가 있다.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는 유해가 묻혀 있지만, 안중근은 유해를 찾지 못해 1946년 가묘(假墓)를 세웠다. 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지 않았다면, '근대화를 통한 조선인의 자발적인 동화(同化)'라는 히로부미의 전략에 의해 조선은 뿌리부터 식민지로 전락했을지 모른다.
안중근 의사는 조선의 영원한 식민지화를 막았다.
모처럼 비가 내리던 1909년 7월 9일 대한제국 옛 황궁 덕수궁에서 옛 황제 고종이 손님들에게 시운(詩韻)을 던졌다. 사람 '인(人)', 새로울 '신(新)' 그리고 봄 '춘(春)'. 일본인 손님들이 쓴 첫 세 연은 아래와 같다.
단비가 처음 내려 만인을 적시고
함녕전 위로 이슬빛 새로우니
일본과 한국이 어찌 다르다 하리오
甘雨初來霑萬人(감우초래점만인)
咸寧殿上露革新(함녕전상로혁신)
扶桑槿域何論態(부상근역하론태)
각 연을 쓴 사람은 순서대로 초대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오노리와 후임 통감 소네 아라스케다. 마지막 손님인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춘(春)'자로 시를 완성했다.
두 땅이 한 집 되니 천하가 봄이로다
兩地一家天下春(양지일가천하춘)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 추밀원 의장으로 전임되며 인사 온 날이었다. 그때 나라는 1905년 2차 한일협약(을사조약)과 1907년 3차 한일협약(정미조약)에 의해 외교권은 물론 조세, 사법, 군사권까지 박탈당하고 껍데기만 남아 있었다. 네 사람이 쓴 시에는 그 황량한 세상에 대한 오만한 찬사가 가득하다. 일본인 기록에 따르면 고종은 이 시를 읽고서 '크게 기뻐하였다(大加嘉賞·대가가상)'.(오다 쇼고, '덕수궁사', 1938)
그리고 석 달 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이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주권을 강탈한 원흉을 처단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듬해 조선은 사라져버렸고 주권 회복까지 자그마치 35년이 걸렸다. 과연 안중근이 한 행동은 무슨 의미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안중근이 있었기에 35년 만에라도 나라를 찾은 것이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계획한 '근대화를 통한 조선의 자발적 동화(同化)'를 무력으로 저지했다.
메이지유신과 정한론(征韓論)
19세기 말 조선 정부는 쇄국으로 일관했다. 그때 일본 집권층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 근대화의 가장 큰 제물은 조선이었다.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 요시다 쇼인은 '서구에 빼앗긴 국부(國富) 만회를 위해 조선을 복종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1875년 운요호가 강화도를 포격했다. 이듬해 조선은 일본에 강제로 나라 문을 열었다. 6년 뒤 조선 엘리트들이 비밀리에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조사시찰단 가운데 어윤중이 이렇게 보고했다.
"이웃 나라의 강함은 우리나라에는 복이 아니다(隣國之强 非我國之福也·인국지강 비아국지복야)."(어윤중, '종정연표') 어윤중은 요시다의 정한(征韓) 논리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역사는 어윤중 예측대로 굴러갔다.
'강한 이웃' 일본의 야심
메이지 정부 지도부는 조선을 두고 대립했다. 군부에서는 조선을 군사적으로 병탄하자고 주장했다. 문관들은 "군사력을 키울 때까지 유보하자"고 주장했다. 1873년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한 군부가 권력투쟁에서 패배했다. 군사적 정한론은 땅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문관 집단을 이끈 사람은 요시다 쇼인의 수제자이자 조슈번 고향 선후배인 이토 히로부미와 기도 다카요시였다. 두 사람은 1871년 이와쿠라 사절단의 멤버로 1년 10개월 동안 미국과 유럽을 시찰하며 서구와 절대적인 국력 차이를 목격했다. 이들은 군사행동 일체를 유보하고 식산(殖産)과 체제 개혁에 집중했다.
그렇게 20년 넘도록 칼을 갈다가 휘두른 사건이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이었다. 1881년 어윤중이 고종에게 한 나머지 말은 이러했다. "우리가 부강의 방도를 행할 수 있으면 그들이 다른 뜻을 품지 못할 것이고 우리가 약하면 다른 일이 없다고 보장하기 어렵다." 고종과 지도부는 국부 창출과 군사력 증강이라는 최우선적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 또 한 번 역사는 어윤중 예측대로 굴러갔다. 두 전쟁에서 대국(大國)을 꺾어버린 일본에 조선은 풍전등화였다.
히로부미의 정교한 정한론
요시다 쇼인의 직계 제자였던 히로부미는 온건파였다. 일본학계에서는 '온건파'라는 용어로 히로부미를 미화하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정반대다. 조선인의 반발 초래는 물론 막대한 재정이 소모되는 군사 행동 대신, 히로부미는 우회로를 택했다.
1906년 3월 2일 히로부미가 초대 조선 통감으로 부임했다. 통감부가 착수한 작업에는 일본군의 한국 주둔과 '조선 근대화'가 포함돼 있었다. 근대화 작업에는 산업, 도로, 교육 개선이 들어 있었다. 모두 당시 조선에 부족하거나 없는 분야였다.
그런데 '조선을 위한' 근대화 작업 비용은 100% 조선이 부담했다. 히로부미는 대한제국 정부와 일본흥업은행 사이에 1000만엔의 차관 계약을 맺도록 했다. 이자를 뺀 실수령액은 900만엔이었고 50%인 500만엔이 그해에 도입됐다. 대한제국 정부가 이미 일본은행과 정부에 발행한 국채 650만엔을 합하면 빚이 1150만엔이었다. 1906년 560만엔인 나라 예산의 두 배였다. 근대화를 이룰 산업은 농업에 한정됐고 교육은 아동을 위한 간이(簡易) 교육에 집중됐다.(이토 유키오, '이토 히로부미', 선인, p338 등) 한마디로 자기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빚을 끌어와 조선의 근대화를 이룩해 일본에 조선을 종속시키겠다는 뜻이었다.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 직후 히로부미는 당시 일본 중의원 오가와 헤이키치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너무 급하게 극단적인 처분을 하면 후에 (일본에) 불이익을 초래하지는 않겠는가."(이토 유키오, 앞 책, p354)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킨 뒤 히로부미는 일본 기자회견에서 "한국은 일본의 분가(分家)이니 본가가 분가를 수탈하는 일은 없다"고 말했다. 훗날 히로부미는 '분가' 대신 조선을 '일가(一家)'라고 불렀다.
1909년 1월 황제 순종을 호종해 조선 남북을 순행(巡幸)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조선 근대화와 황제권 존중을 통해 조선 사회가 일본에 자발적인 친밀감을 갖도록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 이면에는 국채로 경제적인 종속이, 황제에 대한 강제 행위로 통치권의 박탈이 있었다. 가장 폭력적인 행위를 가장 온건한 미소로 포장해 실현해버린 것이다. 결국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의 외교와 내정권 일체를 빼앗고서 1909년 6월 통감에서 물러났다.
안중근은 무엇을 했나
바로 그 이토 히로부미를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이 처단한 것이다. 망국에 임하여 다른 지식인들은 붓을 꺾고 자결을 하며 항의를 하는 사이, 안중근은 모순의 근본 원인을 총으로 저격한 것이다.
안중근은 황해도에서 의병 활동을 하다가 연해주로 넘어간 의병장이었다. 연해주에는 독립지사가 숱하게 많았다. 러시아에서 큰돈을 번 함경도 머슴집 아들 최재형은 안중근의 후원자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서 러시아 재무대신 고고프체프를 만난다는 소식에, 안중근은 거사를 결의했다. 최재형의 집 마당에서, 최재형이 구해준 권총으로 사격 연습을 하고, 최재형이 마련한 자금으로 하얼빈으로 가서, 이토 히로부미를 쏘고, 외쳤다. '코레아 우라(조선 만세).' 최재형은 일본군의 토벌 작전 때 노상에서 총살됐다.
자기 나라를 위해, 당대 권력가들이 방치했던 이웃 나라를 희생시키던 이토 히로부미였다. 그 사내 심장을 향해 조선의 사내 안중근이 총을 쏘았다. 타협할 여지는 없었다. 그때 안중근이 히로부미를 처단하지 않았다면 이듬해 강제 병탄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후 10년간 이어진 총독부 무단통치도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히로부미의 달콤한 사탕에 홀린 조선인은 기미년 만세는커녕 지금도 일본어로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쓰는 식민지에 살고 있지 않았을까.
히로부미가 죽고 일본에서는 군부가 권력을 잡았다. 조선은 즉시 강제로 병합됐다. 초대 조선총독에 육군대신을 겸한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부임했다. 마사다케는 취임사에서 "함부로 망상을 다하여 정무를 시행하는 것을 방해하는 자가 있으면 결단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9년 뒤 조선은 1919년 만세운동으로 저항의 불을 댕겼다.
안중근은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고 3월 26일 처형됐다. 유해는 찾지 못했다. 서울 효창공원에 가묘(假墓)가 있다. 안중근을 후원했던 최재형 또한 유해는 찾지 못했다. 그의 행적을 기록했던 손자 최발렌친은 지난 14일 독일에서 사고를 당해 모스크바로 옮겨졌으나 사망했다. 모두 하늘로 갔다. 땅에는 그들이 만든 대한민국이 있다. 긴 여정이었다.
2020년 2월 18일자 조선일보 박종인 기자의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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