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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서 4주간 의료봉사 코로나 戰士 김미래씨
    스크랩된 좋은글들 2020. 4. 18. 08:38

    후배 간호사의 '코로나 SOS'에  안식년을반납하고 대구서 4주간 의료봉사 코로나 戰士  60세 김미래씨

     

    '이건 전쟁입니다' '저희 좀 살려주세요'….

    지난 2월 간호사 단톡방에 이런 SOS(조난신호)가 울렸다. 안식년 휴가 중이던 김미래(60·대구 칠곡경북대병원)씨는 비상사태를 직감했다. 2월 18일 '31번 확진자'가 등장한 직후였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자들이 밀물처럼 병원으로 몰려왔다. 확진자가 폭증하자 대구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 최전선에 있던 간호사들이 받은 충격과 공포는 훨씬 더 컸다.

    "단톡방이 조용할 날이 없었어요. '살려 달라'고 후배들이 아우성쳤습니다. 신문·방송으로 접하는 뉴스보다 병원 내부 상황은 훨씬 더 위급했어요."

    김미래 간호사는 곧장 의료봉사를 자원했다. 감염 위험을 무릅쓰고 전쟁 한복판에 뛰어든 것이다. 이 '코로나 전사(戰士)'는 2월 27일 근로복지공단 대구병원에 배치돼 4주 동안 코로나 환자들을 돌봤다. 2주 자가 격리를 마치고 지난 8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예순 살의 나이팅게일은 "쓰일 곳이 있다면 다시 들어가 코로나와 싸우겠다"고 했다.

    안식년을 반납하고 대구에서 코로나 의료봉사에 지원한 김미래 간호사. 환자를 돌보며 쓴 일기가 보도돼 유명해졌다. 김미래 간호사는 “사람들은 어디서든 희망의 등불을 찾고 싶었을 것”이라며 “그래서 저 같은 간호사가 보였겠지만, 코로나와 싸우는 국민 모두가 작은 영웅들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일러스트= 안병현

     

    "괜찮아, 엄마는 베테랑이잖아"

    코로나와 벌이는 전쟁에서 우리나라가 이만큼 선방한 것은 헌신적인 의료진 덕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대한간호협회에 따르면 2월 20일부터 4월 10일까지 간호사 3824명이 코로나 의료봉사에 지원했다. 대한민국 현장 간호사(18만명)의 2%다. 이 중 900여 명이 특별재난지역인 대구·경북에 투입됐다. 김미래씨처럼 안식년을 반납하고 온 간호사가 더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외출은 오랜만이지요.

    "3월 초 대구 도심은 사람이 살지 않는 영화 세트장 같았어요. 오늘 KTX를 탔는데 동대구역은 서울역과는 사뭇 다르더라고요. 그렇게 붐비던 곳이 한산해요. 대구 서문시장이 다시 열렸다지만 예전 같은 활기는 없어요. 그래도 기차 안에서 창밖을 보면서 '봄이 왔구나. 그래, 이런 기분이었지'를 새삼 느꼈습니다."

    ―간호사에게 안식년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경북대병원과 칠곡경북대병원에서 35년을 근무했어요. 지난해 7월부터 1년짜리 공로 휴가(안식년)를 받았지요. 오는 7월 1일 퇴직까지 저에겐 일종의 사회 적응 기간인 셈이에요."

    ―사회에 적응하라는 명을 어기고 병원으로 유턴하셨네요.

    "코로나 사태가 없었다면 3월에 미국을 여행했을 거예요. 항공권을 검색하던 2월 중순까지만 해도 대구는 코로나 청정 지역이었습니다. 신천지 사태가 터지면서 확진자가 기하급수로 늘어났지요. 의료봉사는 남편이 먼저 말을 꺼냈어요. 은퇴 후 제 버킷리스트에 해외 의료봉사가 있었거든요. '인력도 당장 필요하지만 시설과 환경부터 준비돼야 하니까 좀 기다려보자'고 했어요."

    ―대구시간호사회가 퇴직 간호사나 유휴 간호사를 대상으로 자원봉사자를 모집했지요.

    "2월 21일에 문자메시지를 받고 바로 지원했어요. 그 무렵 간호사 단톡방에선 '살려 달라'는 아우성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대구 1번 확진자가 다녀간 대구의료원은 응급실을 폐쇄했고요. 협회에 상황을 물으니 '봉사 인력이 너무 부족하다'는 거예요. '그럼 제가 들어갈게요'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재난 속에서 지쳐가는 후배 간호사들을 생각하니 작은 힘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었어요. 공로 휴가 중인 간호사가 손을 들고 자원한 게 알려지면 추가 모집에 도움이 될 테고요."

    ―자녀들이 말리지 않았나요?

    "왜 안 그랬겠어요. 큰딸은 '35년이나 힘든 길을 걸었는데 그러지 마 엄마. 안식년이잖아'라며 붙잡았고, 둘째 딸은 '집에서 맨날 아프다면서 제발 나이 생각 좀 하라'고 말렸어요. 오늘 이곳에 함께 온 아들은 뭐라고 했는 줄 아세요? '코로나 전담 병원들은 지금 전쟁터래요. 다른 엄마가 의료봉사를 한다면 존경할 거야. 내 엄마가 가는 건 싫어'…."

    ―뭐라고 설득했습니까.

    "괜찮다. 엄마는 베테랑 간호사야. 가서 잘할 수 있어. 아직 건강하고 쓸모가 있잖아!"

    ―간호사도 사람인데 두렵지 않았나요?

    "정체불명의 감염병이니 무서웠지요. 그렇지만 애들이 어릴 때부터 제가 들려준 얘기가 있어요. '우리나라는 북한과 긴장 상태에 있고 어떤 상황, 가령 전쟁이 나면 엄마는 피란이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게 간호사고 내 직업이다'라고요. 이번에도 애들에게 말했어요. '나라가 부르면 가야 하는데 지금이 그 시기'라고."

    동행한 아들에게 그때 심정을 물었다. "고집을 굽히지 않아서 서운했지만, 여행 일정을 취소할 때부터 저희는 어머니가 어떻게 행동할지 예감하고 있었다"고 했다.

    김미래 간호사는 “이 힘든 시간은 먼 훗날 국난 극복의 역사로 기록될 것”이라며 “코로나 병동에서 쓴 일기와 국민에게 받은 응원 메시지 등을 모아 책으로 펴낼 계획”이라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병동 안에서 치른 전쟁

    김미래 간호사는 1983년 대구 미문화원 폭파 사건부터 그 도시에 닥친 위기를 응급실에서 겪었다. 1995년 대구 상인동 가스폭발 참사(101명 사망),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192명 사망), 2015년 대구 50사단 수류탄 폭발사고…. “코로나와 싸우는 일은 내심 떨렸지만 나이팅게일의 소명을 가진 사람으로서 책임감이 더 컸다”고 했다.


    ―나이팅게일의 소명이란 무엇인가요.

    “생명 중시와 측은지심입니다. 어떤 사정으로 코로나 의료봉사에 동참하지 못하는 간호사도 물론 있겠지요. 아마도 마음이 무거울 거예요. 그들도 저희를 응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로복지공단 대구병원은 어떤 곳입니까.

    “확진자가 폭증하자 임시로 코로나 전문 병원으로 지정됐습니다. 경증 환자를 많을 땐 200명까지 수용했어요. 의료진 150여 명 중 간호사가 121명인데, 환자들 식사와 약을 챙기고 활력 징후를 점검하는 일을 했지요.”

    ―코로나 환자는 어떤 분들이었나요.

    “신천지 교인이 95%에 달했어요. 첫인상은 각양각색이었습니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우는 사람도 있고. 대부분 젊었어요. 제 아이들 또래였지요. 인간적으로 보면 감염돼 병원에 갇혀 있으니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왜 대구에서 신천지 집단감염이 일어났습니까.

    “신도는 다른 지역에 더 많다는데, 그들이 하는 말로 ‘추수철’이었대요. 전도가 부진한 대구에 모여 예배를 벌이다 그렇게 된 거예요.”

    ―레벨D 방호복과 고글, 마스크와 장갑, 후드와 덧신으로 무장한 의료진 사진을 종종 보았습니다.

    “레벨D는 가장 낮은 등급의 방호복이라 무겁지는 않아요. 하지만 N95 마스크와 고글 때문에 호흡이 힘겹고 불편해요. 얼굴과 귀에 자국이 남고 짓무르고 아물 새가 없었습니다. 나중엔 반창고도 붙이고 요령이 생겼지요. 두통과 메스꺼움은 피할 수 없지만요. 두 시간 근무하고 두 시간 쉬고 다시 두 시간 근무하는 식으로 하루 여덟 시간씩 일했어요. 15년 만에 야근도 했지요. 밤에 방호복을 벗을 땐 뼛속까지 추워요. 휴게 공간까지 100여m를 전력 질주하곤 했습니다(웃음).”

    코로나 전담 병원인 근로복지공단 대구병원에서 방호복과 고글, 마스크 등으로 무장한 김미래 간호사. /김미래 제공

     

    ―간호사는 밤 근무가 힘들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이직률이 높아요. 어떤 간호사는 야근할 땐 세수만 하고 출근하는데 저는 화장을 완벽하게 하라고 가르칩니다. 환자가 나를 봤을 때 ‘저 간호사가 근무하러 나왔구나. 그럼 난 편히 잘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야 하니까요.”

    ―코로나 병동에서 무엇이 가장 괴로웠나요.

    “육체보다는 정신의 고통이 더 컸어요. 솔직히 특정 종교 집단 환자들에 대한 미움이 없지 않았습니다. 환자들을 더 적극적으로 감싸 주고 보듬어 주지 못한 게 두고두고 아쉬워요. 반성할 일이지요. 또 저를 포함한 의료진이 감염돼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면 어쩌나 불안했어요. 긴장 탓이겠지만 숙소에서 맥주 안 마시면 잠을 못 잔다는 분도 있었지요. 저는 방호복 입고 왔다 갔다 하는 꿈을 자주 꿨어요.”

    ―사실상 환자들과 함께 격리된 셈인데 외롭지는 않았습니까.

    “대구시에서 숙소를 마련해 줬는데 멀었어요. 저는 가까운 집에서 출퇴근했습니다. 가족은 모두 서울에 있었고 강아지가 저를 반겼지요. 근무 끝나면 가족과 영상통화를 하곤 했어요. 쉬는 시간에는 프랑스 자수를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었지요. (수를 놓은 마스크를 보여 주며) 이것도 제가 만든 거예요. 이따금 힘겨웠지만 그래도 나오길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집에 있을 땐 불안했는데 최전방도 별거 아니네 싶고. ‘간호사는 병상에 임해야 간호사다’라는 말을 절감한 한 달이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하루라면.

    “밤 근무를 하던 날이었어요. 병동은 적막했습니다. 창밖 벚나무에 만개한 꽃이 그제야 보였어요. 전쟁 통에 참호 안에서 봄을 맞이한 기분이랄까요. ‘자연의 봄은 어김없이 오는구나. 우리 마음의 봄은 얼마를 더 기다려야 올까’ 하는 생각을 했지요.”

    김미래 제공

     

    “인력이 부족해지면 다시 들어갈 것”

    김미래 간호사는 코로나와 싸우면서 틈틈이 일기를 썼다. 사진과 함께 사연이 보도되면서 유명해지기도 했다. 해당 기사들에는 ‘대한민국의 진정한 영웅입니다’ ‘당신에게서 희망을 봅니다’ 같은 댓글이 달렸다.


    ―처음에는 인터뷰를 사양했는데.

    “지금도 현장에서 묵묵히 환자 돌보고 있는 후배 간호사가 많이 있어요. 자원봉사자 대부분이 자식뻘인데 함께 일할 수 있어 고마웠다는 인사를 꼭 담아 주세요.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전우애도 느꼈어요. 간호사들 사이에선 제가 셀럽이 됐나 봐요(웃음). 제가 쓴 일기를 보고 자원봉사를 결심했다는 간호사도 여럿 만났어요.”

    ―김미래 간호사 같은 의료진이 있어 자랑스럽다는 국민도 많아요.

    “코로나는 의료인만의 싸움은 아니에요. 국민도 너나없이 고생하고 계시잖아요. 아이부터 노인까지 전국에서 병원으로 많은 후원품과 응원 메시지를 보내 주셨습니다.”

    ―며칠 전 통화하면서 ‘내가 숭고한 희생을 한 게 아니다’라고 했는데.

    “대한민국이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고 있잖아요. IMF 외환위기 때 그랬듯이 사람들은 아마 어디서든 희망의 등불을 찾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저 같은 간호사가 보였겠지요. 다들 노력해 확진자가 눈에 띄게 줄었어요. 국민 모두가 작은 영웅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방역 당국이 실수한 것은 없는지요.

    “정치적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전반적으론 질병관리본부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잘 대응했다고 생각해요. 외국인 입국을 좀 더 일찍 막을 수는 있었겠지요. 신천지 대구교회에 대한 늑장 대응을 지적하는 간호사도 많았어요. 정부가 발표한 지원금 때문에 불필요한 오해도 받았습니다. 봉사의 가치가 돈 때문에 훼손되면 안 돼요.”

    ―경북 경산에서 의사가 코로나로 사망했습니다. 의료진의 피로 누적이 심각하다고 들었는데.

    “저도 아는 분이라 놀랐고 마음이 아팠어요. 코로나 사태는 종식까지 몇 달이 더 걸릴지 몰라요. 의료봉사자들은 교체 주기가 있지만, 대구의료원이나 동산병원은 기존 간호사들이 두 달 넘게 말 그대로 소진된 상태입니다. 대체해 줄 인력이 필요해요. 의료진이 로봇은 아니잖아요.”

    ―병원에서 나가면 가장 먼저 뭘 하고 싶었나요.

    “고향이 강원도 동해예요. 묵호초등학교 35기 동창들이 병원으로 증편(떡)을 몇 박스 보내 줬어요. ‘미래야, 노병(老兵)은 죽지 않는다!’는 응원에 힘이 솟았지요. 친구들 만나러 가고 싶었어요. 병동에 있을 때 간호사들에게 지금 뭐가 제일 생각나는지 물어봤어요. 엄마가 끓여 준 된장찌개, 친구와 마시는 맥주 한 잔, 봄나들이…. 모아 보니 우리가 잃어버린 일상 풍경이었어요.”

    ―불합리한 코로나와 싸우면서 품위를 잃지 않는 길이라면.

    “감염병은 환자를 가리지 않아요. 영국 총리도 코로나에 걸려 중환자실로 실려 갔습니다. 품위를 잃지 않으려면 실의에 빠지지 말고 각자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해야죠.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깨닫는 시간입니다.”

    ―간호사가 된 것을 후회한 적이 있나요.

    “전혀요. 제가 신입일 때 입원 환자 중에 급성 백혈병에 걸린 중학생이 있었습니다. 가수 양희은이 기타 치며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는 ‘누나, 기타 칠 수 있어?’ 물었어요. 제가 가르쳐 줬지요. 사실 손가락에 피가 몰릴 수 있어 하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수간호사한테 혼쭐이 났죠. 그 아이가 결국 숨졌는데 글쎄 저한테 기타를 남기고 갔어요. 어떤 즐거움 하나는 품고 저세상으로 갔구나 싶어 간호사가 되길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일이 중간중간 많았어요.”

    ―국민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신다면.

    “너무 뻔한 말이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예요. 하늘이 뚫린 것처럼 쏟아지던 소낙비도 그칠 때가 오잖아요. 언젠가 웃을 날이 올 겁니다. 불안하고 힘들지만 서로 격려하며 이겨냅시다.”

    올해는 세계보건기구(WHO)가 정한 ‘세계 간호사의 해’다. 하지만 간호사들은 축배를 들지 못했다. 지금도 코로나 전선에서 사투 중이다. 김미래 간호사는 “이 얘기 를 하면 애들이 싫어할 텐데 인력이 부족할 경우 다시 자원할 것”이라며 “봉사할 힘이 아직 남아 있다”고 했다.

    코로나 확진자 통계에서 대구는 6800여 명으로 64%를 차지하고 있다. 지난 10일 ‘대구 신규 확진자 0명’이라는 소식을 듣고 문자메시지로 축하 인사를 전했다. 곧장 답장이 왔다. “역경 끝에 겨우 햇살이 보입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입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4/17/202004170251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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