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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앙콜내인생 이란 책에 소개된 저의 이야기입니다.
    저의소개 2015. 7. 6. 08:39

    제가 투고한 글을  조선일보 신동흔 기자님이 인터뷰를 하고 최종 정리작성한 글입니다.







                  한전 퇴직 후 해외 봉사로 '제2의 인생' 찾은 양병택(69)씨


    지난 21일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있는 서울 청계천문화관에서 급하게 나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원예 기술을 배우고자 우리나라를 찾은 아프가니스탄 영농인들이 문화관을 방문하는데, 통역과 설명을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일하는 날(월·수요일)은 아니었지만 흔쾌히 요청에 응했다. 그분들은 코이카(KOICA·한국국제협력단) 초청으로 방한했는데, 나는 KOICA 해외 봉사단원으로 스리랑카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KOICA 초청이라고 하니 반가운 마음이 먼저 앞섰다. 벌써 6년이 지났지만, 당시 경험은 내 인생에서 아주 큰 전환점이 되었다.


    1998년 12월 나는 30년 가까이 다닌 한국전력에서 명예퇴직했다. 세상은 뒤숭숭했다. IMF 외환 위기 이후 '폐업' '구조조정' '명퇴' 같은 단어들이 연일 신문지상을 도배했다. 당시 나는 전산 업무를 담당하는 정보처리처의 처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 부서의 업무도 통째로 '아웃소싱'(외부 위탁)이 결정됐다. 명색이 부서의 장(長)으로서 책임을 느꼈고, 후배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겠거니 하는 생각에 명예퇴직을 결정했다.


    아쉬운 마음도 컸지만, 되돌아보면 쉬지 않고 달려온 인생이었다. 나는 경기도 용인에서 서울로 올라와 국립체신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국가에서 전액 장학금을 주는 대신 졸업 후 일정 기간 체신부에 근무해야 하는 특수목적 학교였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이라 내가 들어갈 때 입시 경쟁률은 50대1이 넘었다. 국립체신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 중앙전화국에 배치됐다. 그곳에서 야간대학에 다녔고, 군대도 다녀왔다. 그리고 의무 근무 기간을 채운 뒤 1969년 2월 한전에 대졸 공채 사원으로 입사했다. 그 후 27년간 전산 관련 부서에서만 근무했다. 1970~80년대 남들보다 일찍 전산을 접한 터라 지금도 IT에는 밝은 편이다. 얼마 전에는 명함 뒷면에 'QR코드'도 넣었다.


    회사를 퇴직하고 몇 달간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아침에 눈을 떠도 별다른 할 일이 없는 상황을 처음 겪었다. '할 일'이 필요했다. 그래서 처음 1년은 영어 공부에 빠져 지냈다. 내가 다닐 때 체신고등학교는 기능 교육 위주여서 체계적으로 영어를 공부하지 못했다. 마음 한구석에 늘 "제대로 영어 공부 한번 하리라" 는 생각을 품고 평생을 미뤄왔다. 늦게 시작한 대신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학원에 다녔고, 1년 만에 미국 대학 진학이 가능한 수준까지 도달했다.


    그때쯤 KOICA에서 해외 봉사단원을 뽑는다는 공고를 보았다. 지원 자격은 21~61세였고, 나는 만 61세까지 6개월여가 남아 있었다. 전공과 영어·적성검사를 거쳤고, 외국에서 발생할지도 모르는 사고에 대비해 가족 동의서까지 제출했다. 그렇게 나는 KOICA의 최고령 봉사단원이 되어 2002~2004년 스리랑카에 가서 '한국·스리랑카 직업훈련원'에서 컴퓨터를 가르쳤다.


    KOICA는 한국인 봉사자끼리 어울리는 것을 금지하고 철저히 현지에 동화할 것을 요구했다. 젊었을 때 화려함만 생각한다면 엄두도 못 낼 생활이었다. 나는 2년을 꼬박 현지인 집에 방을 얻어 자취했다. 대학 다닐 때도 해보지 않은 것을 환갑 지나서 한 셈이었다. 쌀을 사려면 수도인 콜롬보까지 갔다 오는 데 하루를 꼬박 들여야 했다. 마을 사람들 마음을 열기 위해 집집이 찾아다니며 "한국에서 왔다"고 알리고, 설이면 가족사진도 찍어줬다. 강의를 하면서 "알아들었느냐"고 해도 고개만 가로저을 뿐인 학생들을 보며 답답했는데, 그 나라에선 '예스'나 '노'나 모두 고개를 젓고 다만 거절이나 부정할 때는 고개를 더 빨리 젓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그들과 생활하면서 행복은 물질적 풍요만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리고 봉사는 남을 위하는 마음에서 출발하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으로 귀결된다는 깨달음도 얻었다.


    귀국 후 지금까지 일주일에 2~3차례씩 자원봉사를 핑계로 청계천에 나가 외국인들에게 서울을 소개하고 있다. 틈틈이 크고 작은 '새로운 도전'도 시도하고 있다. 퇴직 후 취미를 붙인 마라톤은 몇 차례 완주에 성공했다. 지난 2007년에는 안나푸르나 등반을 시도, 베이스캠프(해발 4130m)까지 다녀왔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우리 형제의 손을 잡고 걸어 다녔던 서울~용인의 160리 길을 한번 뛰어보자는 생각에 혼자 100㎞를 쉬지 않고 달려보기도 했다. 요즘은 외발자전거 타기에 흥미를 느끼고 있다.


    젊은이들에게 '내 삶은 어떤가'라고 묻고 싶다.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무엇으로 그 삶을 채우고, 무엇에 도전하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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