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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레 신문의 박정희 신당동가옥 소개기사종교문화 2015. 7. 6. 08:45
박정희신당동가옥이 3월 17일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처음으로 내가 전시해설을 하기위해 3월 18일 오전 그곳을 갔을 때 그곳에서 루포형식으로 취재하고 있었던 한계레 신문 기자가 왜 나에게 이곳 지원배경을 물었다. 나는 그전에 이근처에 살았고 옛 향수도 있고 이곳에서 해설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했다. 특히 박정희 전대통령은 우리가 어려웠을 그당시 경제적 문제를 잘 해결해주신 훌륭하신 대통령이기에 존경한다고 했다.
그기사를 이곳에 옮깁니다.
[토요판] 르포
복원된 신당동 박정희 가옥
▶ 서울시가 지난 1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살던 중구 신당동 가옥을 복원해 시민에게 공개했습니다. 알랭 드 보통은 <뉴스의 시대>에 어떤 나라나 공동체를 이해하려면 건축물을 살피라고 썼습니다. 공간과 건축에 역사가 새겨져 있습니다. 신당동을 둘러싼 서로 다른 세 개의 기억을 더듬었습니다.
집, 길, 마을에 역사가 새겨져 있다. 신당동이 그렇다. 17일 오후 4시 2호선 신당역 3번 출구 앞에 평범한 풍경이 있다. 편의점 세븐일레븐을 지나치면, 아메리카노 한잔이 3000원인 커피숍 간판이 보인다. 담배를 피우며 휴대폰을 귀에 댄 사람 옆으로 철가방을 실은 스쿠터가 인도를 지나다닌다. 여기 무슨 역사가 새겨져 있는지 티 나지 않는다. 지하철 출구 표지 바로 앞 가로등 약 2m 높이에 달린 ‘박정희 대통령 가옥 350m’ 표지를 보면 비로소 이곳의 다른 공기를 알게 된다. 신당동에 떡볶이만 있는 게 아니다. 서울시가 17일 복원해 일반에 공개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살던 서울시 중구 신당동 62-4번지 가옥 앞에 미리 인터넷으로 예약한 관람객들이 줄 서 있었다.
실제 유품 대신 당대 물건 구해 전시
서울시 문화체육관광본부 역사문화재과는 이 가옥의 복원 및 재현을 마치고 17일부터 일반 시민에게 공개를 시작했다. 박 전 대통령과 부인 육영수씨 부부는 1958년 5월16일부터 1961년 8월15일까지 이 신당동 가옥에서 살았다.
5·16 쿠데타 뒤인 1961년 8월16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공관으로 이사갔다. 신당동 가옥은 등록문화재 412호로 2008년 문화재청에 등록됐다. 일제 때 건립된 ‘문화주택’이다. 서울시는 16일 낸 보도자료에서 “1930년대 신당동에 대단위로 조성된 ‘문화주택’ 중 오늘날 유일하게 남은 가옥으로 우리 주거사의 흐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건축사적으로 보존가치가 있다”고 설명했다.
‘문화촌’이라는 단어는 1920년대 초 처음 사용됐다. “서양식·일식·한식이 절충된 양식을 보이며, 응접실과 서재, 식당, 화장실을 실내에 갖추어 전통 가옥인 한옥에서의 생활과는 다른 새로운 근대 생활문화”라고 서울시는 설명했다. 조선총독부는 1925년부터 서울 곳곳에 대규모 문화주택 단지를 건립하기 시작했다. 1925년 신당리(현재 신당동) 9만9000㎡(약 3만평) 땅에 ‘경성문화촌’이라는 이름으로 문화주택촌이 지어졌다. 1941년까지 무학정(현재 선학동), 혜화동, 금화장(현재 북아현동 근처) 등 서울 10여곳에 지어졌다.
박 전 대통령과 육씨는 1950년 대구에서 결혼했다. 부부는 대구, 광주 등 남편 근무지를 따라 이사 다녔다. 첫딸 박근혜는 1952년 태어났다. 시인 박목월이 쓴 <육영수 여사>(삼중당·1976)를 보면, 육씨는 서울에 온 뒤 1956년 4월 신당동 401-7번지에 최초로 자기 명의의 집을 샀다. 어둡고 습했다. 마당도 좁았다. 육씨는 밝고 마당이 넓은 집에서 살고 싶어했다. 친척을 통해 대출을 받아 1958년 5월16일 450만환에 지금 신당동 가옥을 구입해 이사했다. <경향신문>을 보면, 1958년 대령 월급이 3만1561환이었다.
18일 오전 9시50분께 신당동 가옥을 두번째로 보니, 대문 구조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색 판 세쪽으로 만들어져 있다. “(육영수) 여사님의 놀라운 창의력이 오늘날 주택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문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요즘 대문들은 대부분 세쪽 아니에요. 그 전에는 그런 대문이 없었어요”라고 박 시인은 썼다. 두쪽 대문으로 만들어 한쪽에 작게 문을 뚫는 보통 두쪽 대문은, 드나드는 사람이 머리를 숙여야 하므로 세쪽 대문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마룻바닥을 뜯어내어 시멘트로 바닥을 깔고 손수 고안한 입식 조리대를 설치하였다”고 박 시인은 썼다. “그 모든 것은 육영수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서울시가 17일 복원해 공개한 박정희 부부의 신당동 가옥 일제 때 지은 문화주택으로
사진 등 바탕해 공간 구성했다 공개 첫날부터 사람들이 줄 섰다
운명의 5·16, 그 쿠데타의 기억과 이를 막으려다 날개가 꺾인 뒤
신당동 요정 초대받은 친구의 기억, 아버지 죽은 뒤 신당동에 돌아와
여권발급 부탁하던 딸의 기억이…
집 내부는 응접실, 안방 등 방 3개, 서재, 부엌, 창고, 화장실로 구성돼 있었다. 응접실이 부엌과 자녀방 등 다른 공간과 벽으로 구분된 점이 특이했다. 한옥의 마루와 달리 ‘독립된 공간’이라는 점이 시선을 차단하는 벽에 의해 자연스레 느껴졌다. 높이는 약 175㎝로 낮았다. 응접실에 탁자와 7개의 의자, 찬장, 선풍기 등이 있다. 찬장 위에 바비인형, 시계, 석고상이 있다. 시계 옆에 ‘神怡心靜’(신이심정)이라고 쓰인 편액이 걸려 있다. ‘정신이 온화하면 마음이 고요해진다’는 뜻이다.
1961년 7월10일 방한한 미 육군 차관 스티븐 아일스의 부인과 외국 사절단 부인들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촬영한 사진을 바탕으로 응접실 공간을 재현했다. 서울시는 2010년 12월~2011년 12월 복원공사를 했고 2010년 12월~지난해 2월 내부 전시 공간 조성공사를 각각 시행했다. 내부 재현에 육영수씨의 조카 홍정자씨 등 유족과 친척의 증언을 많이 참조했다. 가옥 재현의 경우,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3명 등이 주로 자문했다.
그러나 가옥 내부 소품 가운데 실제로 박 전 대통령 부부가 사용한 유품은 없다.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당대 물건을 구해 전시한 것이다. 박 시인의 전기를 보면, 육영수씨는 전축을 사서 ‘황성옛터’나 모차르트의 세레나데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 등을 듣곤 했다. 지금 전시물 중에 전축은 없었다. 서울시 역사문화재과 직원 조영훈씨 등은 이날 오전에도 공개 준비에 분주했다. 해설사 양병택(74)씨는 “근처 청구동에서 1958~61년 살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관심과 향수가 있어 해설사 자원봉사를 신청했다”며 “우리 때는 다 어렵게 살았다. 박 전 대통령은 경제 성장의 공이 상당히 크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8일 오전 11시 반께 대문 옆에 세워진 문화재 알림판 옆에 벌써 줄이 길다. 알림판에 ‘박정희 대통령은 1961년 이곳에서 우리나라 현대사의 큰 전환점이 된 5·16을 계획하였다’고 적혀 있다. ‘쿠데타’란 단어가 없다. 역사문화재과는 19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5·16에 대한 정의는 이미 (쿠데타라고) 다 끝나 약칭해서 쓰다 보니 불필요한 오해를 불렀다”며 “다른 정치적 고려는 전혀 없다”고 밝혔다. 역사문화재과는 “목적이 있어 쿠데타라는 단어를 일부러 빼려 했다면, 가옥 내부 전시실에 ‘쿠데타’라는 제목이 달린 신문도 전시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가옥 내부 영상실에는 ‘쿠데타’라는 단어가 제목에 들어간 1961년 5월17일치 조간신문 4개가 붙어 있다. 쿠데타 직후 나온 월간지 <사상계>도 전시돼 있다. 알림판의 영어와 일어 안내문에는 각각 ‘the May 16 coup’(5월16일 쿠데타) 및 ‘5·16軍事ク-デタ-(군사쿠데타)’라고 적혀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부부가 살았던 서울 신당동 가옥은 1930년대 말~1940년대 초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신당동 ‘문화주택촌’의 일부다. 중요한 건축사 자료로 평가된다.
신당동 한 공간에 서로 다른 기억이 다 얽혀 있다. 쿠데타의 기억과, 쿠데타를 막으려 했던 박 전 대통령 친구의 기억과, 쿠데타로 집권했던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현직 대통령의 기억이 다 여기 머문다. 이한림 전 1군사령관은 1921년생으로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나왔다. 박 전 대통령과 동기였고 가까운 술친구였다. 그러나 의회민주주의자였다. 공교롭게 1961년 ‘육군 소장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1군사령관이었다. 진압을 주장했으나 장면 총리의 도망 등 여러가지 이유로 결국 진압을 포기했다. 동기이자 친구에 의해 체포돼 마포교도소에 갇혔다. 그의 회고록 <세기의 격랑>을 보면, 1961년 8월 풀려나 미국 소도시 샌타바버라로 강제로 출국해 유학생 노릇을 했다. 1961년 11월 쿠데타 뒤 처음으로 이 전 사령관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만났다. “나를 이 꼴로 만들어놓고 속이 시원하지?”라고 말했다. 친구였으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62년 귀국했다. 최고권력자는 기관원을 시켜 친구의 집을 감시했다. 그리고 1963년 어느날 저녁에 불렀다. “신당동에 있는 요정이었다”고 이 전 사령관은 기록했다. “향주에 진미로 대접을 받았다. 이자들은 천하를 잡은 폭군들이고 나는 날개 꺾인 독수리이니 힘없는 자다.” 당시 박정희 의장은 자신을 도와달라고 말했다. 친구는 거절했다. 박정희 의장의 요청으로 한번 더 신당동 요정에서 만났다. 친구는 “너 혼자 실컷 해처먹어라, 나쁜 자식”이라고 말하고 다시 거절했다.
그러나 훗날 대통령이 된 박정희를 도왔다. 건설부 장관 등 비정무적 공직들을 역임했다. “어떠한 구실로도 군사 쿠데타는 있어서는 안 된다”고 회고록에 썼다. 2012년 숨졌다.
두번째 신당동 시절, 박근혜의 아픔
박근혜 대통령에게 신당동은 아픈 곳이다. 아버지가 살아있던 시절 가족이 청와대로 이사한 뒤 신당동 가옥에는 외할머니 이경령씨가 1975년까지 살았다. 그 뒤 비어 있었다. <경향신문> 보도를 보면, 1979년 10·26 뒤인 11월21일 박근혜씨는 청와대에서 신당동 집으로 동생 근령씨, 지만씨와 돌아왔다. 1980년대 초엔 혼자 성북구로 이사해버렸다. 이후 근령씨가 가끔 오가며 관리했다고 서울시는 설명했다.
그의 ‘두번째 신당동 시절’ 아픔은 전두환 전 대통령과 연관돼 있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대통령이 1980년 9월 노신영 당시 외무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주기 위해 불렀다. 노신영 장관은 3공화국 때부터 외무부에서 오래 일했다. 임명장을 받은 뒤 신당동에 머물던 박근혜 대통령을 찾아갔다. “박(정희) 대통령 영전에 분향한 후 근혜양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려 할 때에 근혜양은 ‘수행원 한명을 데리고 일본에 다녀오려고 하는데 아직 여권이 발급되지 않고 있다’고 하였다.”(<노신영 회고록>) 당시 노신영 장관은 전두환 대통령에게 따로 여권 문제를 부탁했다. 전두환 대통령 통치 아래서 전직 대통령의 딸은 수행원의 여권조차 발급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날 오후 2시께 잠깐 비가 내렸다. 오토바이가 경적을 울리고 ‘소문난 순대국’ 사장이 김이 오르는 돼지머리를 길가 좌판 도마 위에서 써는 시장길을 내려오자 다시 전철역이 나왔다. 쿠데타의 기억과, 쿠데타를 막으려 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 친구의 기억과, 쿠데타로 집권했던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현직 대통령의 기억이 다 머무는, 2호선 신당역 3번 출구가 다시 나왔다. 개장 뒤 3일째인 19일까지 약 900명이 신당동 가옥을 관람했다고 서울시는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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