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가수의 팬클럽에 가입했던 젊은 지인이 “활동하기 참 힘들다”고 털어놨다. 고령층 회원의 비율이 높은 그곳 팬카페에서 해당 가수의 성공 요인을 분석한 글을 올렸더니 “그런 쓸데없는 짓 할 시간이 있으면 신곡 스트리밍(음원 실시간 전송)이나 한번 더 하라”는 반응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까지 ‘꼰대질’을 겪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딴 거 할 시간 있으면 영어 단어 하나라도 더 외우라’는 식의 말투는 타인의 일상에 개입해 제어하려는 오만한 자세로, 이른바 ‘꼰대’들의 대표적인 발화(發話) 방식이다.
지역과 이념 갈등에 이어 성(性) 갈등 문제가 대두되고 있지만, 정말 심각한 것은 세대 갈등일지도 모른다. 이건 가정이나 직장에서 지지고 볶으면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서로 고개를 돌려 외면하면 세월이 지나도 그대로 균열이 남을 수 있는 갈등이다. 최근 뉴스1·타파크로스 조사에선 사회관계망서비스 등에서 산출된 올해 1분기 한국 사회 세대 갈등 지수가 2018년에 비해 5.2%p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모처럼 가족을 집 안에 모이게 했을 코로나19 사태가 오히려 갈등의 골을 깊게 만든 셈이다.
그저 같은 나라에서 생활할 뿐, 이제 노인 세대와 청년 세대는 사용 어휘는 물론 사고 방식마저 달라진 것 같다. 그러나 아침에 눈을 뜨면 새로운 디지털 용어가 출현하는 지금, 젊은 세대가 습득해야 할 지식은 더 이상 어른들의 경험이나 경륜에 있지 않다. ‘후진국 시절 조부모와 개도국 시절 부모가 선진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키운다’는 말도 나온다. 스마트폰 작동법이나 신어의 뜻을 물어보는 쪽은 대개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다.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불치하문(不恥下問)’이 아니라, 아랫사람에게 물어보지 않을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불하문(無不下問)’의 시대가 된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나이 든 세대에게 남은 권위란, 도덕성을 바탕으로 한 ‘모범’의 제시다. 그것은 마을에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서슬퍼런 꾸지람과 적확한 고전 인용으로 구성원을 반성케 하고 중심을 잡아주던 대쪽 같은 백발 어르신의 모습이다. 그러나 지금 어디에 그런 ‘어르신’이 있는가? 지하철을 타 보면, 다른 빈자리를 놔두고 임산부석에 버티고 앉거나, 이어폰 없이 TV 앱을 크게 틀어 놓거나, 우렁찬 목소리로 통화하는 사람들은 청년보다 어르신의 비중이 훨씬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아널드 토인비는 “세대 간 오해를 줄이려면 기성세대가 먼저 스스로 책망하고 반성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들의 표정을 봐서는 도무지 쉽게 바뀔 것 같지 않다.
반면 ‘요즘 애들’ ‘MZ세대’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평가절하되기 일쑤인 청년들은 어떤가. 그들은 지독한 개인주의라는 말을 들을지언정 부당한 관습에 저항하는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고, 기존 체제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들으면서도 공정(公正)에 어긋나는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으며, 낭비가 심하다는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글로벌한 문화 체험에 인색하게 굴지 않는다. 보릿고개 시절에나 어울릴 만한 ‘그게 밥 먹여 주느냐’는 타박이 이들에게 먹힐 리 없다.
코언 형제의 영화 제목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예이츠의 시구에서 따온 것으로, 노인의 경험과 지혜대로 흘러가지 않는 이 세상이 예측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그러나 세상이 이미 변했는데도 새로운 세대를 이해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면, 광화문 집회에 청년층이 좀처럼 유입되지 않는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원하는 세상은 향후 젊은 세대에 의해 실현되기 어렵고, 끝내는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노인이 원하는 나라는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