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7월 중순, 간송 선생은 한남서림에 있을 때 마침 책 중개상으로 유명한 사람이 모시 두루마기를 휘날리며 그앞을 바쁜 걸음으로 지나치는 것을 보고 “어딜 그렇게 바삐가시오?” 물었더니 지금 경상도 안동에서 <<훈민정음>> 원본이 나타났는데 책주인이 1,000원을 부르기에 급히 돈을 마련하려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훈민정음>>은 당시까지 발견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그때는 일본이 한글사용을 철저히 금하고 있던 시기였기에 그 책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조선 총독부 귀에 들어가면 어떻게든 손에 넣으려고 할게 뻔했지요.
책주인이 불렀다는돈 1,000원은 당시 큰 기와집 한채 값이었어요 이에 간송선생은 아무소리 않고 그돈을 주고 그것을 구했답니다. 그렇게 해서 훗날 국보 제 70호로 지정된 <<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훈민정음은 왕이 백성을 위해 만든 글입니다.
1443년 12월 30일, 세종대왕은 조선 백성 누구라도 말하는 것을 쉽게 옮겨 적을 수 있는 말글자, 훈민정음을 만들었어요. ‘백성을 인도하는 바른말’ 이라는뜻이 담겨있지요 .<<훈민정음>>은 ‘예의’와 ‘해례’로 나누어져있습니다. ‘예의’는 세종대왕이 직접 지은 것으로 한글을 창제 하는 이유와 사용법이 간단히 설명되어 있고, ‘해례’는 한글 창제를 담당했던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을 만든 원리와 목적, 그리고 글꼵을 결합하여 표기하는 방법을 상세하게 밝혀놓은 것이지요. 간송 선생이 어렵게 구한 <<훈민정음>>이 비로 이 ‘해례본’입니다.
훈민정음은 바람소리도 , 닭울음소리도 쓸 수 있습니다.
간송미술관의<<훈민정음>>이 국보로 지정된 이유는 1930년대까지 존재만 알고있을 뿐 아무도 본적이 없었던 ‘해례본’이기 때문이었어요. ‘해례본’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원리가 알려지지 않아서 얼마나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글자인지 뚜렷이 밝힐 수 없는 상태여어요. 그래서 창문을 보고 만들었다는 등 우리 말글을 낮잡아 이야기하는 내용만 전해오고 있었지요. 하지만 ‘해례본’이 발견되면서 한글이 어떤 원리로 만들어졌는지 자세히 알수 있었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보면 글자의 형태는 글자를 발음할 때 우리의 혀와 입등 발성 기관 구조를 본떠서 만들었어요. 한예로 ‘ㄱ’ 은 발음할 때 혀가 목구멍을 막고 치아에 닿는 형태를 바탕으로 만든거예요. ‘ㄴ’ 역시 혀가 아랫 니에[ 닿을 때 모양으로 만들었으며,입술로 소리내는 ‘ㅁ’은 소리낼 때 입술의 모양을본떠 만들었답니다.이밖에도 ‘ㅅ’은 치아 , ‘ㅇ’은 목구멍 등 소리 내는 부분의 형태를 본떠서 글자로 만들었다는 것 등이 ‘해례본’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만드어진 원리도 과학적이지만 그동안 한자로 표현하기 힘들었던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한글로 쓸수있으며 누구라도 쉽게 읽을수있다는 것이 더욱 놀라운 일이었어요. 그래서 ‘바람 소리와학의 울음 소리, 닭 울음 소리나 개 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표현해 쓸수있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랍니다.
일제 강점기에 나타난 <<훈민정음>>
1909년부터 1945년까지 36년동안 우리는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으며 우리말과 글을 사용하지 못했어요. 일본은 우리민족의 정신을 뿌리 뽑아 일본의 국민으로 만들겠다면서 민족말살 정책을 폎쳤고 집요하게 우리말과 글의 사용을 금지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학교에서는 오직 일본어로만 수업을 진행했으며, 한글은 사용할 수없었어요. 간송선생은 이런 민족 말살정책이 강화되던 시기에 <<훈민정음>>을 구한 것입니다.
1942년 10월 일본은 ‘조선어학회’사건을 일으켜 한글 학자들을 잡아 들였어요. 하지만 간송선생은 그러한 엄중한 시기에 여러 한글학자들에게 <<훈민정음>>을 건네며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게 했어요.
간송선생은 <<훈민정음>> ‘해례본’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다 광복이 된 뒤에야 세상에 공개했어요. 해방이후 통문관에서 연구를 위해 <<훈민정음>>을 출판하고 싶다고 하자 손수 한 장 한장 뜯어내어 사진을 찍게 했지요. 이렇게 출판한 <<훈민정음>> ‘영인본’을 통해 많은 학자들이 한글을 연구할수 있었고 <<훈민정음>>의 과학성 또한 밝혀진 것이지요.
간송선생은 일분일초도 품에서 떼어놓지 않았던 책
해방이후, 간송선생은 여러 학자들과 보화각에 보관한 문화재를 연구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또 다시 위기가 닥칩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난 거예요. 간송선생은 그동안 모아둔 문화재를 보화각에 그대로 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훈민정음>>민큼은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 챙겨갔어요.
피난길에서도 잃어버릴까 걱정하여 낮에는 품고 다니고 밤에는 베개에 넣어 베고 자며 일분 일초도 몸에서 떼어 놓지 않았다고 하지요. 일제 강점기를거쳐 6.25전쟁 속에서도 무사히 지킨<<훈민정음>>은 1962년 국보 제 70호로 1997년 유네스코 국제 기록 유산으로 등재 되었습니다.
간송 전형필(1906~1962) 선생은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을 설립한 문화재 수집가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문화재가 일본으로 반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고서화와 골동품 등을 수집했다. 1934년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개설하여 본격적으로 골동품과 문화재를 수집하는 한편, 1938년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을 북단장 내에 개설하여 서화뿐만 아니라 석탑·석불·불도 등의 문화재를 수집·보존하는 데 힘썼다.
그의 소장품은 대부분 국보 및 보물급의 문화재로 김정희·신윤복·김홍도·장승업 등의 회화 작품과 서예 및 자기류·불상·석불·서적에 이르기까지 한국미술사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62년 대한민국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1966년 보화각은 간송미술관으로 개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