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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통령의 말투
    스크랩된 좋은글들 2022. 10. 12. 05:39
     

    30년 이상을 함께한 아내가 얼마 전 필자에게 제대로 발끈했다. 필자가 자신에게 학생 대하듯 훈계 조로 말한다는 것이다.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야?” 하며 역정을 냈더니 “지금 말투도 그렇잖아” 한다. 사람의 습성이 이렇게 무섭다.

    해외 순방 중인 윤 대통령이 바이든 미 대통령과의 만남을 마치고 나오며 스태프들에게 툭 던진 비속어 투의 말을 MBC가 보도해 파문이 일었다. 대통령은 “사실과 다른 보도로 동맹을 훼손하는 것은 국민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라며 “진상이 확실히 밝혀져야 한다”고 말했다. 야비한 MBC 보도에 분노한 것이다.

     

    필자의 눈에도 문제의 보도는 달 대신 손가락 끝을 바라본 질 낮은 발목 잡기였다.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치 세력을 지원하고, 정당성 없는 상대 정파를 격파하는 것이 언론의 책임이라고 믿는 이들이 의도를 갖고 수행한 적대적 보도였다. 이를 키운 민주당의 행태 역시 흠집 잡기로 일관하는 맹목적 파당정치였다. 경세능력과 무관한 인간적 흠결, 도덕성, 품행을 문제 삼아 반대 정파를 사문난적으로 몰고 풍문 탄핵하여 정치적으로 몰락시킨 조선조 당쟁(박승관, 2017)이 딱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진영 언론과 진영 정치의 새삼스러울 것 없는 행태다. 그런데 새 정부와 여당이 이 프레임에 꼼짝없이 말렸다. “이 XX들이 승인 안 해주고(면) 000 쪽팔려서 어떡하나”라는 발언에서 “000″는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고, ‘XX’는 국내 야당을 지칭한다는 대통령실의 해명이 나온 순간, MBC와 민주당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사냥감이 덫에 제대로 걸린 것이다. 자막 조작을 했다며 여당 의원들이 MBC 앞에 우르르 몰려간 것이며, 사장, 보도국장, 기자 등을 검찰에 고발한 일 역시 정확히 그들이 원한 구도였을 것이다.

     

    그중 압권은 뜬금없는 MBC 민영화 협박이었다. 필자가 아는 한 MBC 구성원 다수는 민영화를 원치 않는다. 이들을 어렵게 설득한다 해도 MBC 최다 출자자인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가 보유한 70% 지분을 민간에 넘기기 위해선 방문진 법 조항들을 손봐야 하는데 여소야대 정국에서 이 같은 법 개정이 가능할 리 없다. 또한 방문진 이사회가 지분 매도를 의결해야 하는데 이는 동 기구가 재편되는 2024년 8월까지 무망한 일이다. 무엇보다 현 시점에서 누가 사양산업인 지상파 방송, 그것도 흉포한 육식공룡 같은 MBC를 인수하려 나서겠는가. 여당이 정쟁의 맥락에서 MBC 민영화를 꺼내듦으로써 그 희미한 가능성마저 사라졌다고 할 것이다.

     

    이 어설픈 행태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자 세계가 주목하는 문화강국의 국정을 이끄는 정부와 여당의 수준이라는 데 한숨이 나온다. 하지만, 이를 두고 대통령실 관계자며 여당의원들만을 탓하는 건 타당치 않아 보인다. 이번 사태의 본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프로페셔널들이 왜 그리 말하고 행동했겠는가. MBC 보도에 격분한 대통령의 심기를 살피느라 스텝이 꼬였을 것이다.

     

    이번 비속어 보도 파문에서 가장 우려스러운 것이 이 점이다. 정치 경험이 일천한 대통령에게 뱀처럼 냉정하고 부엉이처럼 지혜로운 정무적 판단을 제공해야 할 이들이 대통령 눈치를 보며 허둥대는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미 세간에는 대통령이 공식, 비공식 석상에서 대화를 독차지하고, 다른 이들의 조언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돌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대통령을 비판한 풍자만화인 속칭 윤석열차에 대한 문체부 경고 논란이 더해졌다. 권부 핵심 인사들 간의 은밀한 모의를 연상시키는 메시지 누출 사건도 이어지고 있다.

     

    이제 국민들 사이에 새 정부가 권위주의로 퇴행하고 있는 건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확산되고 있다. 민심은 얻기는 어려워도 잃는 건 순간이다. 믿었던 이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은 훨씬 큰 법이다.

     

    윤 대통령은 27년 동안 검사, 그것도 권력의 외압에 흔들리지 않는 강골 검사의 외길 인생을 걷다가 국가수반으로 직행했다. 그 바탕에 남들이 뭐라 하건 개의치 않고 스스로 옳다고 믿는 소신과 원칙만 바라보는 강한 자기중심성이 존재할 것이다. 비속어 말투 역시 긴 세월 범죄 혐의자들을 상대하며 자연스레 몸에 밴 언어 습관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 스스로가 권력의 중심이다. 권력자의 자기중심성과 거친 말투는 독선과 소통장애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비속어 파문에 따른 민심 이반은 이 문제들을 원점에서 돌아보라는 엄중한 국민의 경고다.

     

    “내가 해본 거라곤 선생질뿐이어서. 말투가 언짢았다면 미안.” 필자가 아내에게 한 말이다. 세상살이가 참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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