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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9 합의는 北이 이미 깼다스크랩된 좋은글들 2022. 10. 14. 07:43
지난 4일 공동경비구역(JSA)을 통과해 북녘 땅을 봤다. 십수 년 전 1사단 수색대원으로 비무장지대에서 근무를 하며 봤던 풍경과 그리 달라진 것은 없었다. 경계는 삼엄했고, 군사분계선 주변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 노릇노릇 익어가는 들판을 배경으로 한 북한 기정동 선전 마을도 여전했다. 이날 판문점을 취재하러 온 내외신 기자 30여 명의 카메라는 바삐 움직였다. 북한이 이틀에 한 번꼴로 미사일 도발을 하던 터였다.
북녘 땅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한 소초에서 그리프 호프만 유엔군사령부 국제정치담당관이 브리핑을 했다. 그는 두 동의 높은 건물을 가리키며 “저곳이 바로 개성공단”이라며 “그곳 앞쪽에는 남북연락사무소가 있었지만, 북한이 2020년 여름에 폭파시켰다”고 했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우리 세금 180억원이 들어간 남북사무소를 2020년 6월 6일 폭파한 사건을 말한 것이었다.
남북사무소는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이 남북회담을 하고 발표한 이른바 ‘판문점 선언’에 따라 5개월 만에 지은 건물이다. 그런데 이걸 김정은이 완공 2년도 채 안 돼 산산조각 내듯 폭파하고 그 장면을 촬영해서 공개했다. 그가 한국을 어떻게 여기는지 새삼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따져봐야 할 문제는 김정은이 남북사무소와 함께 9·19 남북 군사합의도 ‘폭파’하며 날려버렸다는 것이다. 문 전 대통령과 김정은은 2018년 9·19 공동선언을 하며 이른바 ‘9·19 군사합의서’도 체결했다. ‘쌍방은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일체의 적대 행위를 전면 중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순진하게 이 합의를 성실히 지켰다. 접경지 사격 훈련도 중단하고 북한 핵·미사일 동태를 감시할 정찰기 비행도 제한했다. 그런데도 김정은은 9·19 합의를 파기하고 보란 듯이 적대 행위를 벌인 것이다. 우리에게 돌아온 건 ‘삶은 소대가리’ 같은 조롱과 북의 잇단 무력 도발이었다.
김정은은 지난달 ‘핵 무력 사용’을 법제화했다. 이어 최근 보름간에는 발사 지점, 사거리 등을 바꿔가며 전술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탄도미사일을 수차례 쏘아올렸다. 9·19 합의에서 하지 말자는 것만 골라 하고 있는 모양새다. 한미 군사·외교가에서 9·19 합의의 수명은 이미 다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이날 판문점과 도보다리 일대를 둘러보는데, 커다란 표지석이 눈에 띄었다. ‘평화와 번영을 심다, 대한민국 대통령 문재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장 김정은, 2018년 4월 27일’이라 새겨져 있었다. 마침 이날 김정은이 5년 만에 태평양 괌을 사거리에 두는 중거리탄도미사일을 발사한 터라, 표지석 문구가 여간 어색한 게 아니었다. ‘평화’와 ‘번영’을 심었다면서 ‘핵’과 ‘미사일’ 위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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