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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스크랩된 좋은글들 2017. 6. 6. 22:04
이승만에 대한 역사 평가
4 ·19 혁명을 맞아 하야한 뒤 하와이로 망명하면서 이승만의 위상은 하루아침에 지지하는 많은 국민들로부터 국부(國父)로 불리던 입장에서 한낱 독재자(獨載者) 로 전락했다. 그런 그에게 첫 번째로 본격적인 비판론을 제기한 인물은 30세의 테일러 (John M. Taylor) 라는 미국청년이었다. 미 8군 사령관을 역임했던 맥스웰 테일러 대장의 아들인 이 청년은 4 ·19 혁명 직후 알렌(Richard C. Allen)이라는 필명으로 《한국의 이승만, 허가받지 않은 초상} (Korea'’s Syngman Rhee: An Unauthorized Portrait) 이라는 이름의 저서를 출간했다.
한국에 와 2년간 머물면서 폭넓게 한국정계를 두루 심층 취재한 그는 이승만이 ‘부산 정치파동’과 ‘사사오입’이라는 기상천외의 계산법으로 두 번이나 개헌을 감행하고 장기집권의 기반을 다진 뒤 진보당을 탄압하고 3 . 15 부정선거를 치렀으며 4 . 19 혁명에 의해 권력을 잃고 하야하는 경위를 밝히고, 거창 양민학살사건, 국민방위군 부정사건 등을 조명하면서 “평생 자기조국에 봉사한 대가로 국민들로부터 선물 받은 권력에 의해 추락한 애국자”라고 평했다. 4 ·19 혁명 분위기에 맞춘 듯한 절묘한 타이밍에 등장한 그 저서는 한국사회 에 작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송건호(宋建鎬: 언론인, 사학자) 는 그 저서를 인용하면서 이승만이 남북분단의 원흉(元兇)이고, 친일파를 비호. 중용하여 민족정기를 흐려놓은 장본인이며, 남한의 대미종속(對美從屬)을 심화시키고 그 앞잡이가 되었다는 논지의 글(“한국현대 인물사론”)을 썼다.
1980년대 초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이 발간되면서 등장한 수정주의(修正主義)가 국내에 소개되면서 이승만에 대한 비판 강도가 더 높아졌다. 한국정부가 한국전쟁에 대한 수정주의의 급진적 시각에 맞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대응했으나 커밍스의 연구하나를 상대하는 데도 역부족이었다. (박명림) 1980년대 후반 진보성향의 필진이 집필한 《해방 전후}의 인식》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이승만이 분단의 주범, 친미독재자로 많은 국민에게 일반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 만큼 이승만 옹호론은 설 자리도 없었고 여론도 주목하지 않았다. 1942년부터 1959년까지 이승만을 도와 미국 정부와 언론을 상대로 자문 · 홍보 · 선전 업무를 맡았던 미 시라큐스대학의 언론학 교수 올리버가 1954년 《신화에 가린 인물 이승만) (Syngman Rhee: The Man Behind the Myth) 을 발간하는 등 긍정 적 평 가를 위 해 외롭게 노력했다.
1963년 언론인 김인서 (金麟瑞)가 《망명노인 이승만 박사를 변호함》이란 글을 썼고, 1975년 〈한국일보〉가 이승만 특집을 게재했으며, 외국에서 연구한 소수의 학자들이 긍정적 평가의 논저를 발표 했을 뿐이다.
1989년냉전체제가 무너지고 붕괴된 소련의 현대사 관련 사료(史料)가 비밀 해제되어 공개되면서 이승만이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에 책임이 있다는 수정주의의 주장이 근거가 없음이 확인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이승만 긍정적 평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유영익(柳永益: 정치학자)이 광범위하게 이승만 자료를 섭렵하고 본격적으로이승만 긍정론을 폈다. 그는 국내외 학자들이 이승만의 잘못(過)을 파헤치는데 열중한 나머지 공(功)을 인정하는데 인색했다면서 재평가에 나서 이승만의 업적을 크게 3가지로 분류했다.
첫째로 그는 이승만의 대표적인 과오로 거론된 남북분단, 한국 전쟁에 대한 책임론이 사실(史實)과 다르고 근거가 없다는게 밝혀진 점을 강조했고, 둘째는 그간 노출된 실정 (失政)에 대해서는 대체로 인정하는 논리를 폈다. 셋째로 그가 강조한 것은 이승만이 공산주의와 싸우며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게한 나라세우기 (Nation building) 업적이었다. 한 · 미 상호방위조약 체결과 강군(强軍) 육성으로 산업화 정책이 안정적으로 추진될 수 있는 안보체제를 강화한 노력을 평가했다. 또한 교육혁명을 통해
엘리트층과 산업역군을 대량 양성하여 경제발전의 동력이 되게 한 업적도 높이 샀다. 그 뒤를 이어 소장학자와 언론인들의 심도있는 연구논문이나 관련 저서가 적지 않게 출간되었다. 이승만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어 활발하게 사업도 펴고 있다.
그러나 이승만 긍정의 재평가 작업은 그렇게 순조로워 보이지 않는다. 진보 · 좌파의 학맥이 두럽고 그들이 구축한 민족사관(民族史觀)의 벽이 높은 데다가 젊은 세대들이 진보성향이어서 그동안 형성된 부정적 인식을 전환시키는 것이 쉽지 않은 여건이다. 더구나 1998년에서 2007년까지 10년을 집권한 두 차례의 좌파정권이 현대사에 대한 편향적 인식을 가짐으로써 이승만평가도 다시 음지로 몰렸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초 대한민국 건국이 친일파 주도 아래 이루어졌다면서 “대한민국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고 말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해방 전후사의 인식》을 가장 감동적으로 읽었다면서 취임사에서 대한민국의 역사는 불의(不義)가 정의 (正義)를 눌러온 역사라고 매도했다. (양동안)
그 같은 역사인식에 따라 두 정권은 이승만에 대해서도 경멸적 태도를 취했다. 아무근거 없이 김구(金九) 암살의 배후자로 매도하기도 했고, 보도연맹원(保導聯盟員)들에 대한 처형 지시자로 매도해도 방관했다. 상대적으로 대한민국 건국(단정)을 반대했던 김구에 대한 존숭(尊崇)을극대화하고, 김구기념관을 건립했으며, 진정한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한 여운형 (북한의 고위층이 된 둘째딸 여연구의 회고)등 좌익에게도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노무현 정권은 친일파 민족행위 진상규명 위원회를 만들어 김성수 등 대한민국 건국 공로자들을 친일파로 몰아세우는 작업을 방조하기도 했던 것이다. (양 동안)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 이래 제국주의의 식민지였던 1백 수십 개 국가가 독립했다. 이들 신생독립국의 국가적 과제는 정치 발전과 경제발전을 함께 이뤄내 명실공히 잘 사는 나라가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를 건국이념으로 내건 많은 국가들이 후진국 특유의 식민지 경험이나 정치 · 사회적 여건, 무능과 부패 문제를해결하지 못하고 낙오했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채택한 10여 개국만 성공했다. (박종현) 그중 한국은 성공한 나라들 중에서도 경제성장과 정치민주화라는 는 두 가지 과업을 선진국 수준으로 함께 발전시킨 유일한 나라로 꼽히고 있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시장경제체제를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고 안보의 기반을 강화하는 등기초를 쌓았고,그 위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산업화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해 신흥공업국으로 발돋움했다. 그 뒤 반독재투쟁을 벌였던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이 민주화를 완성시켰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성공은 인류문명의 발상지이고, 엄청난 문화유산, 광활한 국토와 수억의 인구, 영국식민찌 아래서 자치활동을 통해 얻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기초 위에서 세계의 주목을 받으 며 독립(1947년 8월 15일)한 인도의 네루수상이 정치발전에는 성공했으나 경제발전에 실패해 근대화 작업이 정체된 사례와 비교가 된다. 경제성장을 우선시한 한국의 국가전략이 정치발전을 앞세운 인도를 제치고 먼저 근대화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한국과 인도는 1950년 1인당 국민소득이 비슷했으나 60년 뒤엔 15:1이 되었고, 인도는 1990년대 초에 들어와서야 자유주의 시장 경제를 적극추진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성공사례는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사이 미국은 후진국의 특이한 전통과 여건을 감안해 그들 국가에 대한 인식을 바 꿔야 하고 정책의 내용과 목표도 모두 새롭게 규정해야 한다는 미국정치학자들의 주장(로스토우 라이샤워 갈브레이스 스칼라피노 등) 과 통하는 바가 있다(박태균). 그들은 미국식 민주주의를 아시아, 아프리카국가 등에 그대로 대입 (代入)시키는 것을 비판했고, 정치의 근대화론은 민주주의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독재체제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문제라고 주장했다. 강력한 추진력과 리더십이 필요한 후진국의 상대적 인 특수성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승만과 박정희 시대에 대해 정치적 민주화를 우선시하는 내용의 근대화 정책을 요구한 미국정부보다 미국학자들의 진단이 보다 현실적이고 유연성 있게 접근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이 이룩한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과는 한민족의 정체성에 새로운 의의를 부여하는 역사적 현상이다. 현대에 들어와 한국인의 공동체 목표의식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이승만이 기여한 역할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동체 목표 의식이 처음발아(發芳)한 것은 3.1 운동 때였으나, 그것을 범국민적으로 구체화한 인물은 이승만이었다. 그가 해방 뒤 귀국해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경구가 한시대의 국론을 결집시키는 구심력의 상징이었다.
후대에게 준 정치적 영향력과 교훈도 크다. 정치 지도자로서의 이승만은 일생동안 원칙과 소신, 자신의 철학을 일관성 있게 밀고 가면서 정치적 목표를 달성한 강력한 의지의 인물이다. 개인적 이익이나 명예를 위해 수치스러운 타협이나 굴종의 길을 가지 않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한 대의(大義에 헌신했다. 사생활은 건전했고 보통 사람들처럼 검소하고 질박했다. 말년에 권력욕을 절제하지 못하고 독재의 길로 들어선 과오만 없었다면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당당한 국부(國父)였다.
위기관리의 관점에서 보아도 여러모로 강한 지도자였다. 그는 위기를 정면 돌파하거나 타개하는 승부사 형이었으나 때로는 위기를 피해가거나 시간을 버는 방법으로 위기를 해소시키는 유연성도 보이고 있었다. 그가 그같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추진력과 결단력, 배짱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준비가 잘돼 있다는 것이 강점이었다.
대기만성 형 (大器晩成型)이었다.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준 (準) 내전상태였던 해방정국에서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넘겨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국했을 때 그는 73세의 노인이었다. 75세 때는 내전이면서 국제전이던 한국전쟁에서 강력한 전쟁지도력을 발휘해 나라를 지키는 구심력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생존을 위해 전쟁 전후를 통해 끊임없이 정치생명을 걸고 미국을 강하게 압박했고, 한 · 미 상호방위조약이 성사되는 단계가 오자 고령의 나이나 대통령의 체면을 벗어던지고 아들 나이의 차관보급 미국특사와 협상테이블에서 격렬하게 다투었다. 미국의 군사 · 안보 지원이 대한민국의 존립에 불가결한 요인이라는 점을 조선왕조 때 경험을 통해 매우 잘 알고 있었던 만큼 전력투구했던 것이다.
한국이 세계 10위권의 선진국 대열에 들어간 현재의 위상에서 볼때도 위에서 지적한 이승만의 역사적 기여는 그 의의가 크다. 그런 의미에서 이승만의 공과(功週에 대한본격적인 재평가작업은 주목할 만하다.
중국의 덩샤오핑 (鄧小平)은 소련 사람들이 스탈린 격하운동을 폈던 것과는 달리 선임자를 깎아내리려 하지 않았다. 그는 마오쩌퉁(毛澤東) 주석에 대한 역사평가에서 공(功) 7, 과(過) 3 이라는 평점을 매겼고, 중국사회가 그 평점을 수용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경우 사후 수십 년이 지났어도 평가가 논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승만에 대한 역사 평가는 정치평론가 신상초(申相楚)가 공 3, 과 7 이라는 평점을 매긴데 대해 정치학자 유영익은 공 7, 과 3 이라고 평가, 상반된 시각을 보였다. 정치학자 진덕규(陳德圭)는 공5, 과5로 균형을 유지했다. 일반 여론은 ‘과’ 쪽이 앞서 있는듯하다.
반면 천관우(千寬宇: 역사가이자 언론인)는 1974년 《한국사의 재발견》에서 “우리나라와 같이 인물이 많지 않은 형편에서 어떤 인물에 대한 극단적 평가를 피했으면 좋겠다 플러스(긍정) 와 마이너스(부정) 를 총결산해서 플러스가 크면 그 테두리 안에서 흠을 말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천관우). 한국사회의 이분법적 흑백논리 (黑白論理), 배타성, 편협성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종합적으로 보면 이승만은 일단 긍정적인 면이 큰 인물이다. 그 테두리 안에서 흠을 말하고자 한다면 먼저 있는 그대로의 실체 (實體)를 균형 있게 파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위글은 "이승만의 삶과 국가(오인환지음)" 라는 책에서 읽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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