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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들의 어머니 서서평 선교사스크랩된 좋은글들 2024. 12. 21. 17:57
영원한 한국의 어머니 서서평 선교사의 이야기 입니다.
2017년 봄, 극장가에 잔잔한 감동이 전해지는 영화가 상영되었다.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라는 영화였다. 엘리자베스 J. 쉐핑이라는 미국 간 호사가 1912년 3월에 32세 처녀의 몸으로 한국에 와서 '서서평'이라는 한 국 이름으로 살아갔던 이야기였다. 일제 강점기인 한국 땅, 전라도 광주 지역에 들어와서 '한국 사람처럼'이 아니라, '한국 사람으로 살았던 그녀! 거친 보리밥에 된장국 한 그릇, 낡은 무명 치마저고리에, 남정네 검정 고 무신을 신고, 고아와 과부들과 거지들의 어머니로 22년간을 살다간, 눈이 파란 한 여인의 휴먼 드라마였다.
그녀는 누구시길래, 미국 뉴욕에서 간호사로 살기를 마다하고, 이 가난하고 어두운 한국 땅으로 찾아 들어 왔을까?
엘리자베스 J. 쉐핑(Elizabeth Johanna Shepping)은 1880년 9월 26일, 독일 비스바덴 (Wiesbaden)에서 출생했다. 그녀의 어머니 안나 쉐핑 (Anna Schepping)은 비스바덴의 한 부잣집의 가정부였는데, 그녀는 비스바덴 프 랑켄 거리(Frankenstrase) 정원 막사(Gartenhause)에서 혼외아(婚外兒)로 태어나 그녀의 성(姓)은 어머니의 성(姓)을 따라서 '쉐핑'이되었다. 그녀가 3살 되었을 때에,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외조부모에게 맡겨 두고, 미국 뉴욕으로 이민 가서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
그녀가 9살이 되었을 때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게 되자, 그녀는 어머니를 찾아 미국으로 떠났다.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의 도움으로, 그녀는 가톨릭계 미션 스쿨에서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가톨릭계 성마가 병원 간호전문학교로 진학했다. 뉴욕시립병원 실습 도중에 동료 간호사를 따라 장로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개신교로 개종 하였다.
엘리자베스 J. 쉐핑은 간호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뉴욕의 브루클린 주이시병원(Jewish Hospital)에서 근무하면서 유대인 요양소, 이탈리아 이민 자수용소, 뉴욕 성서교사훈련학교 등에서 봉사활동을 하였다. 1911년, 동료 선교사로부터 한국에는 너무나 열악한 의료 환경 가운데, 환자가 제 대로 치료를 받지도 못하고 길에 버려질 정도라서, 의료선교사가 절실히
요청된다는 말을 듣고, 한국 선교를 지원하게 되었다.
한국 선교사로 와서 한국 사람으로 살다
1912년, 엘리자베스 J. 쉐핑은 미국 남 장로회 해외선교부로부터 한국 의료 선교사로 파송 받고, 그해 3월에 한국으로 들어왔다. 당시 미국 남 장로회 선교부가 주로 활동하던 지역이 전라도 지역인지라, 광주 선교부 제중원(병원장 우월순)의 간호사로서 병원과 주일학교를 돕는 업무를 담당했다.
당시 전라도 광주 지역은 미국 간호사 출신인 쉐핑 선교사가 살아가기엔 너무나 열악한 환경이었다. 선교사들에게 4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이 지만 한국에 들어 온지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한 번도 가지지 못했던 안식년! 쉐핑은 점차 자신의 건강이 악화되자 안식년을 맞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리는 국제간호협의회 총회도 참석하고, 미국에 있는 어머니도 만날 겸, 안식년 휴가에 어머니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는 거지 같이 보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창피하다며 다시 나타나지 말라며 딸을 냉대했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그녀는 결심했다. 내가 살아갈 곳은 오직 이 한국 땅이라는 것을! 나를 받아준 이 땅이 내 조국이요. 이곳의 어머니가 내 어머니요, 이곳의 아이들이 내 아이들이라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선교사로서 처음 가진 안식년 미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쉐핑은 기도를 드렸다. "저는 하나님께서 제게 부르신 방법대로 조선으로 돌아가서 조선의 짐을 기꺼이 덜어주려고 합니다.“
그녀는 한국어로 말하고, 옥양목 저고리와 검정 통치마를 입었으며, 남자 검정 고무신을 신고, 된장국을 좋아했다. 그녀는 온전한 한국인이 되고자 했고, 평생 독신으로 살며, 미국으로 다시는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서평'이라는 한국인이 되었다.
엘리자베스 J. 쉐핑(서서평) 선교사는 32세 1912년부터 1934년 54세로 소천하기까지, 22년 동안 한국에서 간호선교사로 살아갔다. 그녀의 사역은 대략 다음과 같은 4기(期)로 나눠 볼 수 있다.
제1기는 1912년부터 1914년까지로 광주 제중원 나환자진료소에서 근무, 제2기는 1914년부터 1917년까지 군산지부에서 근무, 제3기 사역은 1917년부터 1919년까지 세브란스병원에 파견 그리고 제4기 사역은 1919년부터 1934년까지 광주 제중원에서의 사역 기간이다.
서서평 선교사는 소천하기 한 해 전인 1933년까지 10년 동안 회장직을 맡으면서 조선간호부회의 초석을 든든 히 다져 놓았다. 조선간호부회를 선교 관련 양성소뿐만 아니라, 관립 간호 사양성소 등도 함께 아우르게 지경을 넓혔던 것이다. 그녀는 회장으로 있으면서 조선간호부회의 회의록을 한국어로 기록하게 하였고, 스튜어트가 지은 『간호역사개요를 한국어로 번역, 출판하였다. 또한 서서평 선교사는 조선간호부회를 세계간호협회에 정회원으로 가입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영원한 한국의 어머니
1919년, 서울 세브란스병원 파견을 마치고, 광주 제중원으로 돌아온 서서평 선교사는 병들고 상처 받은 사람들 옆에서 그들과 함께 살아가기를 원했다. 급여의 대부분도 이들을 위해 사용했다. 그녀는 1년에 100일 정도는 나귀를 타고 전라도 전역과, 제주도와 추자도까지 전도 활동을 펼 쳤다. 특히 미혼모, 과부, 고아, 걸인, 나환자 등 가난하고 병들고 버림받은 이들을 보살폈다. 나환자의 아이를 양아들로 삼은 것을 비롯해서, 그녀 가 입양하여 키운 고아가 14명, 오갈 곳 없는 과부를 가족처럼 품고 함께 살아온 사람이 38명이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한국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서서평 선교사는 특히 어렵고 힘든 여성들을 위해 헌신했다. 그녀의 일기 가운데 남긴 글을 보면, "한 달간 500여 명의 여성을 만났는데, 한 사람도 성한 사람이 없이 굶주리거나, 병들어 앓고 있거나, 소박맞아 쫓겨났거나, 다른 고통을 안고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여성들의 인권과 교육을 위해서도 열정을 쏟아, 당시 이름 없이, 그저 '큰이', '작 은년이', '말년', '개똥어멈' 등으로 불리던 이름 없는 여성들에게, 일일 이 이름을 지어 불러 주면서 자존감을 가지게 했다. 광주 양림동에 뽕나무 를 심고 양잠업을 지도함으로써 여성들의 자립을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여성 교육을 위해서 '이일양성학교'를 세워서 여학생들을 배출했고, 이들 과 함께 농촌 여성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입니다(Not Success, but Service)
서서평 선교사는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갔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몸소 보여 주었다. 그녀는 자신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헐벗고 굶주리며, 버림받은 자들을 위해, '산 제물'로 드려지길 원했다.
그녀는 부르짖었다. "내일 나 먹기 위해 오늘 굶는 사람을 그대로 못 본척 할 수 없으며, 옷장에 옷 을 넣어 놓고서 당장 추위에 떠는 사람을 모른 척할 수 없다."
서서평 선교사의 삶은 한 자루 촛불같이 작은 불꽃을 밝히며 쇠잔해 갔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이웃 사랑'을 위해 온전한 헌신의 삶을 살다간 선교사 서서평! 그녀는 당시 시대적 고난 중에, 병들고 상처받은 사람들 가운데 처한, 한 사람의 한국 여인으로서, 그렇게 22년 동안 함께 살아갔 던 것이다. 그녀의 나이 54세가 되던 해인 1934년, 장(腸) 흡수부전증이 라는 만성풍토병(Sprue)으로 인한 영양실조로 그녀는 쓰러지고 말았다.
그 때 그녀가 가진 것이라고는, 다리 밑 거지에게 절반을 주고 남은 담요 반 장, 동전 7전, 강냉이 가루 2홉뿐이었다. 그녀의 시신도 유언에 따라 의학 해부실습용으로 기증되었다. 이 땅에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고 주님 품에 안긴 것이다.
일제 강점기였지만, 그녀의 장례는 광주시 최초로 시민사회장으로 치러졌다. 그녀를 천국으로 보내는 장례식에는 자신이 키운 이일양성학교의 여학생들이 운구했고, 그 뒤로 수많은 여성들이 소복을 입고 뒤따랐고, 수 많은 나환자들과 걸인들이 상여를 따라 "어머니! 어머니!" 부르짖으며 애도했다.
그녀가 거처했던 작은 방 침대 밑에는 그녀가 일상적으로 자신을 지켜 왔던 좌우명이 걸려 있었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입니다(NOT SUCCESS, BUT SERVICE).”
■ 서서평 선교사를 기리며, 천천히 평온하게!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 암울했던 그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녀는 어떻게 그렇게 천천히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녀는 세상의 욕심들을 모두 벗어 버렸기에 그렇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기까지 그녀는 육신의 부모로부터 철저히 버림을 받았고, 세상 재물도, 명예도, 즐거움도, 자랑도, 모두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주 예수로만 만족하고, 부름 받은 곳인 한국 땅을 땅 끝으로 알고, 자신을 어머니라고 부르는 사람들 속에서, 천천히 그리고 평온하게 살아갔던 것이리라! 성공을 위해 서가 아니라 섬김을 위해서!
제자의 삶이란 무엇일까? 이러한 삶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오늘 우리네 삶의 모습은 어떨까?! 왠지 부끄러워진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 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 이니라(마 20:28)!" 성경구절이 상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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