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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신여중고 초대교장 애니 J 엘러스
    스크랩된 좋은글들 2024. 12. 22. 20:09

    애니 J. 엘러스 Dr. Annie J. Ellers, 1860-1938)는  조선에 온 첫 여성 의료선교사 이다.  그녀는 1860831, 미국 미시간 주 버오크(BurrOak)에 서 장로교 목사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일리노이주 록포드(Rockford) 대 학을 다닐 때에, 어느 부흥회에 참석하여 선교에 대한 도전을 받고 선교사가 되는 꿈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1881년 보스턴(Boston) 대학에 서 의학을 전공하였다. 1885년 가을 어느 날, 휴가차 들어온 이란 여선교사의 선교보고를 듣게 되었는데, 지금 테헤란에 여성병원을 건립 중인데 여자 의사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보고였다. 엘러스는 자신을 향한 부름으 로 생각하고 이란 선교사로 가기로 다짐했다.

     

    한편 미국 북장로회 선교본부는 이제 막 조선에도 선교병원이 건립되었는데, 여자 의사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남자 의사인 알렌이 제중원을 운영하면서 가장 먼저 당면한 난관 중의 하나는, 당시 조선 풍습 상 서양 남자 의사가 조선 여인을 진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대부 집안의 여인이나, 특히 왕가의 여인들은 엄두 를 낼 수도 없었다. 따라서 알렌 선교사는 본국 선교본부에 여의사를 급히 파송해 줄 것을 간청했다.

     

    총무 엘린우드 박사는 알렌과  선교사의 간청 을 받고  여의사가 아무도 없는 이때에 여의사가 오게 되면, 왕비의 주치의가 될 수 있음으로, 앞으로 교단 선교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말에 설득되었다엘린우드 총무는 여의사인 엘러스가 조선으로 가줄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그녀는 의학공부가 졸업하기에 아직 한 학기가 남아 있었고, 이란에 대한 약속, 또 조선이라는 미지의 땅이 낯설고 위험할 것으로 여겨지고, 이에 대한 부족한 준비 등의 이유로 조용히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어딘가 불편하였다. 조선이란 나라가 이제 막 문호를 열었고, 또 선교병원도 이제 막 건립되었는데, 선교지 상황상 여 자 의사가 꼭 필요하다는 말이 마음에 걸린 것이다. 또 한편 조선으로 가면 왕비의 주치의가 될 수 있다는 제안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딱 2년만 조선에서 봉사하고, 테헤란으로 가리라고 다짐했다.

     

    1886 522, 드디어 조선으로 가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항에서 배에 올랐다. 바로 그날, 샌프란시스코 항에서 5명의 선교사가 함께 조선으로 향하 게 되었는데, 벙커 목사와 헐버트 목사, 길모어 목사 부부, 그리고 여의사 애니 엘러스였다. 이 일행들이 일본을 거쳐 조선에 들어온 때는 18867 4일 아침이었다. 이 일행 중 벙커 목사는 이후에 애니 엘러스 양과 결혼하게 된다

     

     벙커 목사(Rev. Dalzell A. Bunker, [方巨], 1853-1932)

     조선 정부는 그동안에 고수해 온 쇄국정책을 철회하고, 1882년 미국과 한·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 다. 그에 따라 조선의 국왕인 고종은 감사의 표시로, 1883년 미국을 탐방하기 위해 민영익을 단장으로, 홍영식을 부단장으로 한 '견미단'을 꾸려 파견하게 되었다. 이들이 귀국하여 보고한 세계의 현황은 실로 경이로운 것이었다. 이 보고를 들은 고종은 조선이 구미 열강을 알기 위해서는 필히 영어를 알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한 미국공사인 푸드 공사에게 영어 교수를 파송해 줄 것을 제안하게 되었다. 그 결과 뉴욕 유니온 신학교를 졸업한 벙커, 헐버트 그리고 길모어 목사가 미국 국무부의 안내를 받아서, 미국 북장로회 파송 선교사로서 조선에 신설되는 영어교습소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의 교수로 오게 되었다.

     

    벙커(Dalzell A. Bunker1853-1932)목사1853810일 미국 오하이오주 콜브룩(Colbrook)에서 태어났다. 1883년 오하이오 주 오베린 대학 (Oberlin College)을 졸업하고, 유니온 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하여, 1886 6월에 졸업하였다. 그리고 한국 정부에서 최초로 세운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의 교수로 초청을 받고 188674일 내한하였다. 초창기에는 육영공원의 우등생이 관직에 임명될 것이라는 소문 탓에 학구열이 높았다. 벙커는 국립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서 국가 공무원과 고관 자제들 을 교육한 공로로 18922월 한국 정부로부터 통정대부호조참위(3) 의 관직을 받았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향학열이 식어가고 학교 운영도 부실해지자  1894년에 문을 닫고 말았다.

     

    육영공원이 폐교된 후 벙커는 감리회 선교부의 요청에 따라 배재학당 의 교사가 되었다. 배재학당은 18952월부터 정부와 협정을 맺고 정부가 추천한 200명의 학생을 받아 벙커가 책임을 맡아 교수하였고, 이후 제 3대 배재학당장이 되었다(1906.6.-1911.6.). 그는 10년 동안 많은 인재를 길러내었고, 19116월 신흥우 박사에게 학당직을 물려주고, 문서선교와 기독교 연합사업 등에 눈부신 활동을 하였다.

     

    18964, 독립신문 창간되고, 그해 7월에는 독립협회가 조직되었고, 독립문이 건립되었다. 사회 각기 각층에서 자주독립을 위한 사회 개혁을 부르짖게 되니, 정부는 이에 앞장선 지도자들을 투옥시켰다. 그들 중에는 이상재, 이승만, 유성준, 홍재기, 안국선, 이원긍, 김정식, 김린 등 많 은 사회 지도자들이 함께 투옥되었다. 벙커 목사는 매주 한 번씩 감옥에 있는 이들을 방문하여 성서와 기독교 서적을 나누어 주며 열심히 옥중 전도를 하였다. 그 결과 투옥되었던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세례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갈등 속에서의 제중원 여성 진료부 근무

    내한 최초의 여성 의료선교사인 애니 엘러스는 제중원의 여성 진료부 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녀의 내한은 당시 남녀를 철저히 구분하던 조선의 풍습 속에서 여성 환자들에게는 너무나 큰 기쁨이었다. 그러나 엘러스는 제중원에서 사역을 시작하면서부터 초기 사역기간 내내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 있었다. 조선에 오는 동안 품었던 그녀의 기대는 크게 무너져 내렸다. 그녀가 정식 의사가 아니라는 사실이 새삼 부각되었다. 그것은 그녀가 미리 선교본부에 다 알린 내용이었고, 선교본부도, 제중원 원장인 알렌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인데, 이제 다시 그 문제를 새삼 거론하는 것은 그녀의 입장에서 몹시도 괴로운 일이었다.

     

    문제가 된 것은 애니 엘러스의 의학공부가 졸업 한 학기를 마치지 않아, 정식 의사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하여, 의사 헤론은 그녀를 준의사 또는 간호사로 생각했고, 의사 알렌과 선교본부 총무였던 엘린우드 박사는 당시 조선의 상황에서는 의사로서 손색이 없다고 생각했다. 엘러스는 마음 고생을 많이 했다. 제중원 여성병원에서 18개월 근무하는 동안, 그녀의 가슴 속에는 후회와 실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차라리 하루라도 빨리 다시 돌아가 남은 공부를 마치 고 예전의 계획이었던 테헤란의 병원에 가서 마음껏 선교활동을 하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그러나 본인은 스스로를 '의사(doctor)'라고 불렀다. 그리고 무엇보다 엘러스는 자신이 의사가 아니라는 선교사들의 우려를 불식할 만큼 실제로 환자들을 진료하는 과정에서 탁월한 의술을 보여 주었다. 엘러스의 제중원 여성 진료부 근무는 18883월에 여의사 릴리어스 호튼이 들어 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명성황후의 시의(侍醫)가 되다

    1886년 초가을 어느 날, 여의사 엘러스는 대궐로 가게 되었다. 그 며칠 전부터 알렌 박사는 왕후가 탈이 났으니 약을 지어 보내라는 전갈을 받았었다. 알렌이 왕후의 증세를 묻고 수차례 약을 지어 보냈으나 며칠이 지나도록 차도가 없었다. 그리하여 알렌은 여의사 엘러스를 왕후에게 보내 게 된 것이다. 엘러스는 대궐 내실로 안내되었다. 왕후를 처음으로 알현하게 된 것이다. 미리 궁중 예법을 배운 대로 큰 절을 3번 한 후에 내인들이 물러난 자리에 왕후와 독대하게 되었다. 왕후께서는 병환 중이셨지만,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몸매에 품위 있고 매력 있는 자태로 앉아, 희고 갸름한 얼굴에 총명한 눈빛과 온화한 미소로 엘러스를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이 토록 먼 나라에 좋은 일하러 와 있는데 불편함 없이 잘 지내는지요? 더구나 여인네 몸으로."

     

    "나이는 몇 살인고?" "부모님은 다 생존해 계시며, 형제는 몇이나 되는고?" 등등을 물으시고, 담화를 나누었다. 병풍 뒤에서 통 역관이 통역하였다. 왕후께서는 마지막으로 당부하셨다. "고향을 떠나 낯 선 타국에 와 있지만, 이 나라에 정을 붙이고 오래 있어 주기를 바라오." 사실 엘러스 선교사는 조선에 2년만 근무하고 테헤란 여성병원으로 가려 고 계획하고 내한했었다. 그런데 오래오래 조선에 있어 달라는 왕후의 당부에 그만 그녀는 마음을 달리 먹고 조선에 주저앉고 말았던 것이다.

     

    이날 은 여의사 엘러스가 조선의 왕후를 현대 의술로 진단을 시도한 역사적인 날이었다. 왕후로서도 특이한 체험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에는 의사가 왕비를 진찰하려면 손목에 실을 감아 병풍 뒤로 연결하여 진맥을 하던 때에, 엘러스는 왕후의 가슴을 헤치고 청진기를 들이댄 것이다. 그 후 왕후가 회복되자, 엘러스는 왕후의 시의( 侍醫)가 되었다. 그리고 이 후부터 자주 왕후를 치료하게 되었다. 왕후는 다리에 신경통이 있었고 불면증에 눈병 이 심한 편이었다. 감기와 복통에 자주 앓고 빈혈도 있어 건강 상태가 좋 은 편이 아니었다. 엘러스는 이러한 왕후를 정성껏 보살폈다.

     

    엘러스가 볼 때 왕비의 얼굴은 미소를 지을 때 너무 아름다웠다. 왕후 는 지체 높은 여인으로서 풍기는 자애로운 인격을 소유했으며, 강한 의지 와 능력을 가진 인상을 주었다. 엘러스는 언제나 왕비로부터 가장 친절한 말과 대우를 받았다. 이러한 왕비를 엘러스는 크게 존경했다.

     

    왕후는 엘러스보다 아홉 살 위였지만, 그녀를 친딸같이 대하면서 그녀를 가까이 하셨다. 엘러스에게 정3품 벼슬에 해당하는 당상계통정대부인 품계가 내려졌다. 이로 인하여 선교사로서 구중궁궐에 살아가는 조선 왕 가의 부인들이나, 가마를 타고 다니는, 도무지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던 정부 고관들의 부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는 '선교의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1895108,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에 의해 시해될 때까지 8년 동안 명성황후(1851-1895)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는 시의( 侍醫 )로 충성되이 봉직했다. 을미사변은 엘러스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 다. 그녀는 명성황후의 죽음을 그 누구보다도 슬퍼했고, 아파했다.

     

     

    이후에 벙커 · 엘러스 부부, 언더우드 · 릴리어스 부부, 에비슨, 게일 선교사들이 고종황제의 신변 보호를 위하여 숙식을 같이하며 황제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진실로 애니 엘러스 선교사는 격동기 구한말 조선 역사에 있어서 한 사람의 중요한 산 증인이었던 것이다.

     

    서울에서 최초의 외국인 결혼식: 애니 엘러스와 벙커목사의 결혼

     

    애니 엘러스는 육영공원에 영어교수로 온 벙커 목사와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이는 서울에서 열린 외국인 첫 번째 결혼식이었다. 18877월 초순 화요일 저녁, 애니 엘러스는 육영공원에 영어교수로 온 벙커 목사와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이는 서울에서 열린 외국인의 첫 번째 결혼식이라. 세간에 큰 관심거리였다. 50장의 초대장이 당시의 주한 외국인들 과 조선인 귀족들에게 배부되었다. 결혼식은 알렌의 집에서 육영공원의 교수인 길모어 목사가 주례를 섰고, 알렌을 비롯한 여러 선교사들이 예식에 참여했다.

     

    왕실로부터 결혼 선물로 신혼집과 함께 금팔찌, 금반지 세트가 주어졌다. 다른 곳에서도 비단, 식기 등 다양한 선물들이 많이 보내왔다. 1년 전, 그들은 이미 한 배를 타고 조선 땅에 들어온 것이다. 그 때 주님께서는 미리 짝지어 주셨던 것이었을까?

     

    정동여학당을 설립하다 이것이 정신여중고의 모체가 되었다.

    188765, 엘러스 선교사는 제중원에서 여의사로 근무할 뿐만 아니라 '점례'라는 소녀에게 글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해 겨 울이 되자 정동(貞洞)의 신혼집 사택 뜰 기와집 한편에서 주계희, 김갑순 등 여자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학생들이 늘어나게 되자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아, 1888년에 드디어 정동 여 학당을 열게 되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정신여중고등학교의 모체가 되었다.

     

    애니 엘러스와 벙커 선교사의 연합사역

    엘러스 선교사는 1888년 릴리어스 호튼 선교사가 제중원 여성 진료부에 부임함으로써, 남편 벙커 선교사와 함께하는 교육 선교와 복음 전파를 위한 문서 선교 사역에 주력했다. 애니 엘러스와 벙커 부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역 중 하나는 조선의 젊은이를 위한 교육사업이었다. 그리고 한글성서를 출판하고 보급하는 일에 열심히 했다. 특히 한성감옥의 수감자들에게 성경과 신앙서적을 보급해서 읽게 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러므로 많은 애국인사들이 기독교인이 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엘러스는 여성 수감자에게 성경을 보급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또한 그 누구 보다도 한글 찬송가 작성에 주력했다. 이 부부는 특히 미국 찬송가의 가사를 한국어로 번역하고, 또한 한글 가사를 곡조와 결합하는 작업에, 자신들을 드러내지 않고 많은 정성을 쏟았다. 조선셩교회를 통한 문서선교에도 열 심을 다했다. 그리고 벙커 목사가 미북장로회 교육선교사로 육영공원 교수로 내한한 후에 육영공원이 문을 닫자, 미북감리회 교육선교사로 이적 함에 따라, 한국 교회 내의 교회연합 사업에 열심을 냈다.

     

     

     

    양화진에 잠들다

    192674, 엘러스 선교사와 벙커 선교사 부부로서 근 속 40년 표창을 받고 선교사직에서 은퇴했다. 이는 내한 선교사들 가운데 조선 땅에 함께 들어 와서, 함께 남아 공식적으로 은퇴할 때까지, 끝까지 자리를 지킨 최초의 부부 선교사이다.

     

    엘러스, 벙커 선교사 부부는 한국을 떠나,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지역에서 여생을 보냈다. 19321128, 79세로 남편 벙커 목사는 "나의 유골을 한국 땅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소천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부인 엘러스 선교사는 남편의 유골을 안고 한국에 와서 1933 48, 정동제일교회에서 고별 예배를 드리고,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에 안장했다. 미국으로 돌아간 엘러스 선교사는 1937년에 다시 내한하여 황해도 솔내교회에서 지내다가, 그 이듬해인 1938108, 78 세로 서울에서 소천하여, 양화진에 남편 벙커 목사 묘지에 합장되었다.

     

    애니J. 엘러스 선교사를 기리며

    19921020, 정신여고는 개교 105주년 기념사업으로, 엘러스 선교사 추모비를 양화진에 건립하였다. 추모비에는 엘러스 선교사는 의료 선교사였음에도 이 땅에 와서 "근대 문명의 여명기에 남존여비의 전통적 윤리 관념 아래에서도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만유의 주 하나님 의 은총을 받들어 '하나님을 믿자, 바르게 살자, 이웃을 사랑하자'라는 교육 이념으로 정동여학당을 건립하여 초대 교장으로 직임을 맡아 기독교 교육을 구현하는 데에 헌신하시니 이가 곧 한국 여성 신교육의 선구적 요람 인 정신여자중고등학교의 모체가 되다."라고 기리고 있다.

     

    1886년 여름, 여자 선교사로서는 그 누구도 찾지 않았던 미지의 땅을 향해, 처녀의 몸으로 내한했던 애니 J. 엘러스 의료선교사! 주님의 인도하심 믿고, 조용히 한 2년 사역하다 테헤란으로 가리라 작정하고 들어 온 한국 땅에서 왕후를 처음 알현하고 '이 땅에 정붙이고 오래 있어 달라는 당부의 말씀에 마음 바꾸어 먹고 오래 살기로 했다. 이 땅에서 결혼하고, 서로 의지하며 사랑하던 왕후를 비운에 보내고, 오직 이 땅에 병들고 상처 받은 이들을 보듬고, 여성들을 일깨워 교육하며, 주님의 말씀 전하며 살아갔던 40년 세월! 이 나라를 사랑하사 끝내 이 땅에 묻힌 당신은, 한 발자국 앞서간 사랑하는 남편의 비석에 비문을 새겨 넣기를, "날이 개이고 흑암이 물러갈 때까지"라고 썼다.

    서울 송파구에 있는 정신여중고 교정에 설치되어 었는 초대교장 애니  J 엘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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