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아직도 노니?" 50만원, "결혼 안 해?" 100만원… 궁금하면 돈 내요
    스크랩된 좋은글들 2025. 1. 25. 09:40
     
     
    불편한 잔소리별 다른 금액으로 모바일 송금 되는 QR코드가 찍힌 명절용 티셔츠. 이달 중순 카카오페이가 추첨으로 50명에게 티셔츠를 무료로 보내주는 이벤트를 열자 수십만명이 신청했다고 한다. /카카오페이
     

    설 연휴가 시작됐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이모, 삼촌은 빳빳한 신권으로 세뱃돈을 준비해 놨다. 사랑과 관심이 담긴 덕담과 함께.  그런데 불경하게도 받는 애들이 덕담에 값을 매긴다. 어떤 덕담은 사생활 침해이자 명예 훼손이기에, 위자료를 받아야겠다는 것이다.

     

    매년 명절마다 ‘명절 잔소리 메뉴판(가격표)’이 돈다. 겉으론 유머 섞인 ‘걱정의 유료화’요, 속내는 이런 말은 듣기 싫으니 꺼내지도 말라는 ‘웃어른 입틀막’이다.

     

    괘씸하지만, 한번 생각해보자. 잔소리 메뉴판은 한국인에게 생애 주기별로 촘촘히 부과된 ‘멀쩡한 삶’과 ‘표준 코스’에 대한 압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조언이랍시고 무심코 꺼낸 말들, 경쟁에서 밀리거나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 누군가의 분노 버튼을 사정없이 누를 수 있다.

    생애 주기별 끝없는 잔소리

    명절 잔소리 메뉴판이 소셜미디어에 처음 등장한 건 7~8년 전이다. 저성장 속 입시 경쟁과 취업난이 심화하고 결혼·출산의 부담이 커진 사회상을 반영했다. 차림표는 매년 업데이트되고 가격 인플레이션까지 일어난다.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이 2019년 투표해 만든 잔소리 가격표에 따르면 “편식하지 말고 골고루 먹어라”는 6만원, “반에서 몇 등 하니?” 7만원, “핸드폰 그만 해라” 11만원, “뭐가 되려고 이래?” 12만원이었다. 요즘엔 “아이돌이 밥 먹여주니?” “어릴 땐 귀엽더니…” “친구 많아?”도 추가됐다. 실컷 참견해 놓고 자신의 이름을 잘못 부른 친척에겐 1억원의 과태료를 부과하겠다는 주장도 있다.

     

    고교생과 대입 수험생에게 “모의고사 몇 등급이야?” “어느 대학 갈 거니?”처럼 대놓고 학업 성취 수준을 물을 경우 5만~20만원이 매겨진다. “우리 딸 전교 1등인데” “누구네 아들은 의대 붙었다던데”처럼 남과 비교하며 떠보는 말에는 ‘분노 할증’이 더 붙는다.

    어른들의 잔소리는 생애 주기별로 계속된다. 표는 인터넷 유머를 활용한 가상의 가격표. 잔소리 듣는 이들은 고민을 해결할 비용에 상응하는 가격을 '위자료'로 매긴다고 주장한다. /그래픽=송윤혜
     

    각종 여론조사상 ‘명절에 듣기 싫은 잔소리’ 1위는 취업·연봉 관련 질문이다. 대학생과 취업준비생들은 성인인데도 경제력이 없어 세뱃돈을 받으며 어린이 취급까지 당하니 울컥하기 쉽다. “취업은 어떻게 돼가니?” “요즘 뭐 하고 지내?”는 그나마 5만~20만원대로 싸다.

     

    사정도 모르면서 “차라리 기술을 배워라” “눈을 좀 낮춰봐”라든가 “살 빼면 면접에 유리할 텐데” 같은 비하·인신공격성 발언을 했다간 20만~50만원쯤 각오해야 한다.

     

    다음엔 만인의 원초적 호기심이 기다린다. 바로 연애와 결혼. 노력한다고 잘되는 분야가 아닌 데다, 평생을 좌우할 예민한 질문인 만큼 수십만~수백만원을 호가한다.

     

    공무원 나모(37)씨는 “재작년부터 ‘결혼 언제 하냐?=100만원’이라고 적은 티셔츠를 주문 제작해 명절마다 입고 앉아 있다”며 “효과가 꽤 좋다. 사촌 동생이 빌려갈 정도”라고 말했다. 최근 카카오페이는 모바일 송금이 가능한 QR 코드를 넣은 잔소리 티셔츠를 선보였다.

     

    외국계 회사원 이모(34)씨는 “지난 추석 ‘결혼할 남자가 있다’고 하니, 친척들이 상대의 학력과 직업, 가족 관계를 꼬치꼬치 묻다가 ‘미혼인 형이 있다’는 부분에서 잔소리가 폭발하더라. 어른들은 만족을 모른다”고 말했다.

    한 유명 어학원은 10년 전부터 명절 연휴마다 전국의 학원 시설을 개방하는 '명절 대피소'를 운영한다. 오랜만에 어색하게 만나는 친척 어른들로부터 진학과 취업, 결혼 관련 잔소리를 듣느니, 익숙한 또래들의 익명성 사이에 숨어 공부나 휴식을 취하는 게 낫다는 것이다. /연합뉴스

    관심인가 간섭인가

    결혼이 끝이 아니다. 2세 계획부터 승진과 이직, 주식·코인·부동산 투자, 노화와 외모·건강 관리에 이르기까지, 먼저 늙어본 어른의 걱정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젊은 부부에겐 출산·육아 질문이 민감하다. 가격은 “아기 안 가지냐”에서 시작, “둘째는?” “딸(혹은 아들)이 있어야지” “아니, 애 셋을 어떻게 감당할래”로 갈수록 치솟는다. 자녀가 크면 이 모든 잔소리가 원점(“공부 잘하니”)으로 회귀한다.

    명절 잔소리 메뉴판은 ‘간호사’ ‘음대생’ ‘며느리’ ‘부동산’ 버전 등으로 분화됐다. 간호사의 경우 “나 수액 좀 놔줘라”(2만원)부터 “‘간호원’ 힘들지?”(10만원) “공부 좀 더 해 의사 하지”(70만원)까지 있다. 아기 부모에게 “이유식 만들어 먹여라” “옷 더 입혀라” “오냐오냐하면 못쓴다(또는 기죽으니 혼내지 마라)”는 5만~30만원대.

     

    서울 마포의 30대 주부 차모씨는 “명절에 시댁 가면 자꾸 ‘왜 이렇게 피곤해 보이니?’ 물으시는데 왠지 불편해 20만원쯤 부르고 싶다”고 했다.

    40대 공기업 직원 정모씨는 “신도시 부동산 청약했다고 하니 친척들이 ‘지금 청약을 왜 하냐’ ‘어떻게든 서울로 왔어야지’ ‘내가 갭투자 하랄 때 사지’ 하더라”고 했다.

    아기 부모들이 불편해하는 각종 육아 관련 명절 잔소리 메뉴판. /인터넷 커뮤니티
    간호사들이 만든 명절 잔소리 가격표. 상대의 직업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함부로 언급하는 데 대한 스트레스를 보여준다. /인터넷 커뮤니티
     

    잔소리 가격은 엿장수 마음이다. 걱정을 해결할 비용에 상응해 매긴다는 이들도 있다. “몇 등 하니” 질문엔 학원비 20만원, “취업됐느냐” 면접 준비비 30만원, “결혼 안 하느냐” 결혼정보회사 등록비 100만원, “둘째 낳아라” 산후조리비 500만원, “머리 휑해졌다?” 모발 이식 비용 600만원, “집 언제 사냐”엔 아파트 계약금 3000만원을 요구한다고.

     

    대체 잔소리는 왜 하는 걸까. 어른들은 “생판 남이면 묻겠느냐. 정말 걱정돼 그러는 것” “그럼 무슨 형이상학적인 대화를 나눠야 하느냐” “중요한 근황을 모르는 척 입 다무는 게 더 나쁘다”고 항변한다.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한국에선 ‘몇 살엔 무엇을 해야 한다’는 편견이 강하다”며 “잔소리는 상대의 진짜 고민을 모르거나, 내 식견을 자랑하려 하는 것”이라고 했다.

     

    신경인류학자인 박한선 서울대 교수는 “명절은 현대화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전통 의례를 치르며 집안 내 무형의 일체감을 확인하는 행사”라며 “나누는 이야기도 옛날처럼 ‘과거에 급제했는가’ ‘혼기 놓치면 되겠는가’로 흘러간다. 그간 소홀했던 어른 노릇을 몰아서 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문제는 명절 후엔 각자 파편화된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점. 그리고 옛 유교적 농경 사회처럼 집안 어른이 해결해줄 수 있는 인생사는 이제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한 지자체 평생학습관에서 온라인으로 차례상 차리는 법 등 '전통 세시풍속 체험교실'이 열린 모습. 설과 추석 같은 명절은 현대화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집안 내 무형의 일체감을 확인하는 행사다. /조선일보DB

    올해 설의 화약고는 정치?

    충고는 강자의 특권이다. 미국 중학생들을 ‘초등학생에게 공부 조언을 하게 한 A그룹’과 ‘선생님 조언을 듣게 한 B그룹’으로 나눠 실험했더니, A의 자발적 학습량이 더 늘었다는 연구가 있다. 조언하는 행위 자체가 권력감과 자기 효능감을 높인다는 얘기다.

     

    그래서 일부 전문가는 어른 잔소리에 끌려다니지 말고 아랫사람이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가 보라고 한다. “이혼 안 하세요?” “검버섯 제거술 받아보시죠” “노후 준비는 어떻게?” “자식들은 자주 찾아와요?”처럼. ‘돈으로 도와줄 수 있어요?’란 도발이 담긴 명절 잔소리 메뉴판도 이 범주에 속한다.

     

    하지만 이런 날 선 질문은 매우 위험하다. 대통령 탄핵 사태로 정치적 갈등이 첨예해진 요즘 특히 그렇다. 이번 설엔 집집마다 “아직도 극우 유튜브 보세요?” “그럼 넌 △△△이 대통령 돼야 한다는 거냐?” 같은 험악한 대화가 오갈 가능성이 농후하다.

    통상 설·추석 연휴엔 가정 폭력 신고가 50~60% 증가한다. 복잡한 가정사에 돈 이야기, 정치 이슈, 여기에 술까지 들어가면 급발진 예약이다.

    설을 앞두고 광주북구청직장어린이집 원생들이 구청을 찾아 민원실 직원들과 세배와 덕담을 나누고 있다. 명절에는 세대 간 수직적 상하 관계를 떠나 공감과 존중을 기반으로 한 대화법이 요구된다. /광주=김영근 기자
     

    잔소리에 대처하는 덜 건방진 방법이 있다. 우선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네, 제가 알아서 할게요”라며 완곡하게 대화를 피하는 것이다. 상대에 대한 기대를 낮추고 나의 반응도 최소화한다.

     

    선제적 ‘긍정 가스라이팅’은 더 좋다. 경기도 파주의 회사원 박모(39)씨는 “부모님께 먼저 ‘자식들이 제때 결혼 못 해 속상하시죠? 그래도 우리끼리 명절 보내는 거 몇 년 안 남았어요’ ‘엄마 아빠의 지난날을 존경해요’ 하니 잔소리가 쑥 들어가더라”고 했다.

     

    어른들도 명절은 남의 문제를 고쳐주는 시간이 아니란 점을 인식해야 한다. 박한선 교수는 “진학·취업·결혼 관련 좋은 소식이 있다면 자연스레 알게 되니 굳이 물어보지 말라”며 “정말 도움 주고 싶다면 따로 만나 밥이라도 사주면서 얘기해야 한다”고 했다.

     

    또는 “그 핸드폰 신형이지?” “점점 멋있어지네? 방법 좀 가르쳐주라”처럼 사소한 호기심과 칭찬으로 시작하면 중요한 이야기도 거북하지 않게 나눌 수 있을지 모른다.

    2025년 1월 25일 조선일보 정시행기자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