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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 근로자 위한 '독일마을' 창설자 정동양씨스크랩된 좋은글들 2017. 11. 13. 07:41
오는 11월 14일이 박정희 탄생 100주년되는 해다. 최보식기자가 만난 독일마을 창설자 정동양씨를 찾아인터뷰를 했다.
파독 근로자 위한 '독일마을' 창설자 정동양씨
정동양씨는 “군(郡)은 독일마을을 ‘동물원’처럼 관광객의 구경거리로만 취급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해 독일마을= 최보식 기자
"난 파독 광부 태운 전세기로 1974년 베를린에 갔다. 25세에 고교 2년 편입해 베를린 공대 박사가 됐다"
"우리 국민이 살아가는 기술을 박정희 대통령이 가르쳐줬다. 과거 누군가의 헌신과 희생에 우리의 현재적 삶은 빚진 셈"
서울에서 다섯 시간 운전해 '남해 독일마을'을 찾아갔다. 이국적 풍경을 보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내일(14일)이 '박정희 탄생 100주년'이고, 이 마을은 박정희 시대(時代)의 기억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얀 외벽에 가파르게 얹힌 붉은 기와지붕의 독일식 주택 41채가 언덕에 들어서 있다. 전체 주택의 절반은 파독(派獨) 근로자와 관계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 부부, 간호사와 결혼한 독일인 남편 등이 살고 있다. 이 중 정동양(68)씨는 파독 간호사 아내와 함께 카페·펜션을 겸하는 '베를린성(城)'의 주인이다.
그는 독일 베를린 기술전문대를 졸업하고 베를린 공대 토목공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공학자다. 귀국해서는 교원대 교수로 재직했다. 바로 그가 맨 처음 독일마을을 구상하고 독일식 건축 기술을 지도했다. 말하자면 독일마을 창설자다.
1964년 함보른 탄광에 방문한 박 대통령 내외.
"독일마을이 조성된 것은 15년 전인 2002년부터입니다. 독일 현지에서 교민 상대로 설명회를 열고 부지를 확보하고 집 짓기 위해 땅을 파기 시작한 것은 모두 김대중 정부 시절에 이뤄졌습니다. 생전에 박정희에게 맞섰던 김대중을 떠올리면 참 아이러니하지요. 물론 독일마을의 주택 건축에는 정부 지원은 단 한 푼도 없었습니다. 순전히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피땀 흘려 저축한 개인 돈으로 지은 겁니다."
이국적 풍광과 독일 맥주, 소시지 등으로 독일마을은 이미 매스컴에 많이 소개됐지만, 그가 왜 독일마을을 구상하고 어떻게 실현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저는 독일에서 학생과 연구원 신분으로 21년 살았습니다. 당시 독일 유학은 학비가 무료였습니다. 독일인들이 낸 세금으로 공부했던 셈입니다. 이 점을 떠올리면 유학생은 내심 독일 사람들에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존재를 알고서 떳떳해졌습니다. 이분들이 독일 정부에 세금을 내고 있었고 제 학비는 이분들 세금에서 나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교포에게 늘 감사했습니다. 귀국하면 이분들에게 감사를 표시할 수 있는 장(場)을 마련해드리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경남 사천군의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독일 유학 꿈을 갖고 있었다. 부친으로부터 "6·25 때 독일 의무감이 우리 마을에서 진료를 해줬는데, 독일 약(藥)이 신통했다" 등의 얘기를 듣고서 그렇게 꿈꿨다고 한다. 그는 중학교를 마치고 공고(工高)로 진학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호남비료공장의 기술 고문으로 온 독일인 호만에움씨(氏)에게 기능공을 양성하는 기술학교를 세워달라고 의뢰했습니다. 전국에 '호만에움' 이름을 딴 기술학교가 몇 곳 생겼습니다. 저는 이 중 마산에 있는 호만에움 학교(창원공고 전신)에 들어갔습니다. 정규 학력으로는 인정 안 돼 졸업 무렵 자격 검정고시를 쳤습니다."
졸업 후 그는 마산에 있는 한일합섬에서 4년간 근무했다. 자신이 꿈꾸던 독일 유학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를 실어나르는 전세기에 자리를 얻기 위해 한국관광공사에 찾아갔습니다. 그 전세기를 이용하면 항공료가 쌌으니까요. 그렇게 해서 1974년 베를린에 갔습니다."
그는 이미 25세였다. 그 나이에 베를린의 건설 전문 고등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요. 저는 배우는 데 나이는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베를린에는 한국인 기능공과 간호사가 많았어요. 가끔 현지 언론 매체를 통해 이들의 사고 소식을 접할 땐 눈시울이 젖기도 했습니다."
그는 1975년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대통령님께서 나라 살림을 잘하셔서, 어리고 가냘픈 여성들이 힘든 간호사로 일하며 외화를 벌지 않아도 되는, 대졸 학력 젊은이들을 타국에 광원(광부)으로 돈 벌기 위해 보내지 않아도 되는, 가난한 젊은이가 기술을 배우기 위해 서러운 유학을 하지 않아도 되는, 제3국 청소년들을 데려다가 우리 문화와 기술을 가르쳐 보내어 수출 시장을 확보하는, 힘차고 통일된 나라를 만들어 주십시오.'
김정렴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 대신 청와대 캘린더, 수첩 선물과 함께 답장을 보내왔다.
'젊은이와 같은 사람이 많으면 우리나라의 앞날이 밝으니 열심히 공부하고 돌아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일하여 주기 바라네.'
그는 1977년 말 파독 간호사 이정희씨와 결혼했고, 2년 뒤 박 대통령 서거 소식을 접했다.
"제가 한일합섬에 근무할 때 박 대통령께서 여러 차례 공장을 방문했습니다. 그분은 우리 국민이 살아가는 방법과 기술을 가르쳐줬습니다. 여전히 박정희에 대한 평가를 두고 논란이 있지만, 오늘날 우리가 굶지 않고 사는 것은 박 대통령 덕분이라고 봅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이 역사적 사실은 더욱 분명해질 겁니다."
그는 하천 안전 설계와 관련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1995년 귀국했다. 독일에 유학 간 지 21년 만의 귀국이었다.
"고국에서 문화(文化)와 하천 살리기 이 두 가지를 꼭 하고 싶었습니다. 교원대 기술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우선 땟국물이 흐르던 개천을 살려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서울의 청계천을 복원하면 전국에 하천 살리는 바람이 불지 않겠느냐고 생각했습니다."
―'청계천 복원'은 이명박 서울시장의 아이디어가 아닙니까?
"그때 누가 그런 아이디어가 있었겠습니까. 저를 '하천 살리기 운동'의 원조(元祖)라고 보면 됩니다. 독일에서 이 분야를 연구했으니까요. 제가 연세대 노수홍 교수와 함께 청계천 복원 연구를 하면서 고건 시장에게 먼저 제안했습니다. 그분은 머뭇거렸습니다. 이 아이디어를 잡아챈 분이 이명박 시장 후보였습니다. 제안은 제가 했지만 치적은 결정권자 것이지요. 청계천 복원 기념석에 제 이름도 들어 있을 겁니다(그는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 건설안전분과위원장을 맡음)."
비슷한 시기에 그는 김두관(현 열린우리당 의원) 남해군수에게 '독일마을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남해군은 그가 개발한 마을 단위 친환경 하수처리장 공법을 제일 먼저 도입한 인연이 있었다.
"김두관 군수는 흔쾌하게 '독일마을'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주한 독일 대사를 찾아가니 '섬 전체를 독일마을로 꾸미면 아시아에 나와 있는 선진국 주재원들이 휴가 때면 여기로 올 것이다'라고 말했지요. 그러나 현실적으로 난관이 많았습니다. 독일 교포 입장에서는 서울이 아닌 남해(南海)의 섬에 들어와 평균 2억원이 넘는 건축비를 대며 집 짓고 살겠다고 하겠습니까."
2000년과 2001년 베를린·함부르크 등 독일 도시를 돌며 입주자 유치 설명회를 열었다. 그는 교포들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여러분이 돌아오셔서 그동안 독일에서 보고 배우고 일하면서 익힌 것을 토대로 고국에서 집을 짓고 정원을 꾸며가며 검소하게 사시는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깨끗한 환경을 지키고 문화와 전통을 가꾸는 민족은 잘살고, 그리고 약속을 잘 지키는 사회는 미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그것이 조국, 대한민국에 마지막 봉사를 하는 뜻깊은 일입니다."
이듬해 독일마을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당시 토지 수용가의 3~5배로 택지를 분양받았다. 그는 독일식으로 3층짜리 집을 짓고 인테리어를 하고 조경을 마쳤다. 카페나 숙박 손님이 아닌 일반 관광객에게도 집 내부를 모두 공개하고 있다. 하지만 독일마을 주민은 요즘 남해군청과 불화를 빚고 있다.
"독일마을은 '동물원'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파독 근로자 주민들은 여기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냥 관광객들의 구경거리로만 살라는 겁니다. 군(郡)에서 주거 전용 지구라며 펜션과 카페 운영 등도 못 하게 합니다. 저를 비롯해 파독 근로자 집 세 곳이 군청에 의해 무허가 영업으로 고발당했습니다. 한 집에서는 이미 벌금을 물었습니다."
―독일마을 안에서 영업은 모두 '무허가'라는 뜻입니까?
"그런데 군청 전직 공무원이나 파독과 상관없는 주민들이 운영하는 카페나 펜션, 수제 소시지 가게, 독일 맥줏집은 문제 삼지 않습니다. 심지어 남해군청에서 직접 관광객들을 상대로 상점과 맥줏집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군요.
"독일마을에는 아직도 인터넷망이 동선(銅線)입니다. 수차례 민원을 하고 쫓아다녀서 내년쯤 교체 작업이 이뤄집니다. 군에서는 독일마을로 공급되는 지하수에 새로운 관정(管井)을 박아 다른 마을에도 물을 공급했습니다. 여름철마다 물 부족 사태를 빚어왔습니다. 군에서 방화수로 물탱크를 채워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군에서는 독일마을을 이용해 자신의 관광 수익 사업만 하고 있습니다. '파독 전시관'의 전시품은 독일마을 주민들이 제공한 사유물입니다. 이 전시관 입장료 수입은 연간 1억6000만원쯤 됩니다. 군에서 모두 챙겨갑니다."
―파독 근로자 주민들이 공무원에게 무엇을 밉보였습니까?
"군에서는 한낱 파독 근로자 주제에 큰 주택을 짓고 사는 것을 아니꼽게 보는 것인지 저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7월 독일을 방문해 '파독 광부·간호사는 애국자'라고 치하했고, 김정숙 여사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런 고충을 해결해달라고 청와대·국회의원·국민권익위원회 등 450여 곳에 편지를 보냈으나 도와주는 데가 없었습니다. '애국자'라고 말로만 하는 것은 다 쇼입니다."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69달러였던 1963년, 그해 말 파독 광부 1진(陣) 123명이 갔다. 이듬해 1964년 12월에는 박 대통령이 서독 정부가 보내준 전용기를 타고 서독을 방문했다. 가장 가난한 나라 대통령이 자기 국민을 팔아 보낸 남의 나라에 돈(借款)을 꾸러 가는 길이었다.
서독 방문 기간에 박 대통령 내외는 함보른 탄광을 찾았다. 박 대통령은 파독 광부와 간호사 앞에서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이라도 닦아놓읍시다'라고 연설했다. 그 뒤로 1970년대 중반까지 2만여 명의 광부와 간호사·간호조무사·기능공이 서독으로 갔다. 이들이 국내로 부쳐온 총송금액은 1억153만달러로 당시 수출액의 2%에 달했다. 경제 부흥을 위한 종잣돈이 됐다. 우리의 현재적 삶은 과거 누군가의 헌신과 희생에 빚지고 있는 셈이다.
2017년 11월 13일 조선일보 최보식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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