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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평화에 속지 말라… 아우슈비츠가 여전히 北에 있다스크랩된 좋은글들 2025. 5. 17. 05:58사람답게 살 권리, 그 최소한을 위해 북한인권시민연합은 발족했다. 1996년 문 연 북한 인권 관련 최초의 시민단체. 노예의 삶을 국제사회에 고발하고, 탈북을 돕고, 인신매매 등 악랄한 범죄를 피할 은신처를 제공해 왔다. 설립 30주년을 앞둔 지금은 그러나 존폐의 기로에 서 있다. 자금 때문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해외 원조를 위한 연방 보조금 지급 일시 중단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세금 낭비라는 것이다. 미국 민주주의기금(NED)이 동결됐다. 운영 자금 대부분을 차지하던 동아줄이 끊겼다.
–이제 어떻게 되나요?
“올해까지는 어떻게든 버텨 봐야죠. 뾰족한 수가 안 나오면 아마 문을 닫게 될 것 같아요.”
선진국 반열의 대한민국에서 해외 원조 없이는 북한 인권을 도모할 수 없는 모순적 현실. 일반 회원이 보내주는 후원금이 매년 600만원 수준, 통일부 등에서 제공하는 개별 행사 지원금을 제외하면 앞이 안 보인다. 직원 7명의 급여는 물론이고, 사무실 임차료조차 감당이 안 된다. 결국 두 달 전 서울 충정로의 인근 건물로 거처를 옮겼다. “문재인 정권 당시에도 정말 힘들었는데…. 기업 후원이 아예 사라졌거든요. 개인 후원자 정보를 요구하기도 했고요. 북한 정권이랑 싸워야 하는데, 몇 년마다 한국 정부와도 싸워야 하죠. 더 심각해질 수 있다는 우려를 하고 있어요.”
◇싸우기 위해 한국에 왔다
폴란드 여인, 요안나 호사냑(Joanna Hosaniak·51) 부국장은 22년째 북한인권시민연합에서 말 그대로 투쟁의 역사를 쓰고 있다. 국제사회에 북한의 실상을 알리고, 국군 포로 등 납북자에 대한 실태 조사 및 송환 운동을 벌이고, 탈북 청소년의 정착을 돕는 교육 사업도 진행한다.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설립에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지난해 10월 국빈 방한한 폴란드 대통령에게 공훈 훈장(기사십자)을 받았다. 안제이 두다 대통령은 “과거 폴란드에서도 다방면에서 자유가 박탈됐지만 오늘날 북한처럼 심각하지는 않았다”며 “북한 주민을 위한 정의 실현 촉구에 감사를 표한다”고 했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무연고의 땅에서.
–왜 한국을 택하셨습니까.
“아버지가 전기 엔지니어였어요. 기술이 발전한 나라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고 하셨어요. 일본 기업이 막 폴란드에 진출하던 때였어요. 더 알아보다가 그 옆에 한국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침략도 당했다고 하고, 절반은 공산주의 치하라고 하니 흥미가 생겼어요. 폴란드랑 비슷해 보였어요.”
–꿈이 뭐였나요?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연기 학교를 다녔어요. 결정을 내려야 했죠. 그쪽 전망이 밝지 않고, 성격도 내심 여린 편이라…. 집안 형편도 어려워졌어요. 아버지가 암 수술을 받으셨고, 여동생이 장애가 있었어요. 제가 장녀거든요.”
1994년 바르샤바대학교 한국어문학과에 진학했다. 원래는 ‘북한어문학과’였다. “제가 입학하던 해에 명칭이 바뀌었어요. 그 전에는 북한 교수가 가르쳤어요.” 학·석사 통합 과정을 마쳤다. 서울 연세대 어학당에서 3개월간 공부하기도 했다. 참고로 석사 논문 주제가 ‘고려청자의 문양’이었다. 외환은행 바르샤바 지점에 입사했다. IMF 사태로 은행이 철수하면서 폴란드 한국 대사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4년이 흘렀다.
–인권 운동은 어쩌다….
“대학 다니면서 이미 북한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어요. 틈틈이 인터넷으로 봤거든요. 그곳의 삶이 어떨지, 저는 알 수 있었어요. 공산주의를 겪어봤으니까요. 부모님께서 늘 ‘남의 고통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어요. 어릴 적에는 모든 게 부족했어요. 음식은 물론이고 연필, 공책이 없어서 글씨도 아껴 썼죠. 그래도 물건이 생기면 꼭 이웃들과 나눴어요. 집안 분위기가 그랬어요. 줄 게 아무것도 없으면 ‘그냥 와서 울다 가라’고 하셨어요. 내 문제에만 몰두하면 세상이 안 보여요.”
유명 인권 단체인 헬싱키인권재단에서 6개월짜리 교육을 수강하며 결심은 단단해졌다. 다만 일자리가 많지 않았다. 대사관을 그만두고, 유학을 겸해 친척이 살고 있던 미국 시카고로 갔다. 두 달 뒤 전화가 걸려왔다. 헬싱키인권재단이었다. “한국 시민단체와 국제회의를 열 건데 혹시 코디네이터 역할을 맡아줄 수 있느냐고 하더군요.”
2004년 3월 바르샤바에서 열린 제5회 북한 인권·난민 문제 국제회의. 관련 자료를 모두 폴란드어로 번역해 책자로 제작하고, 유창한 영어와 한국어로 진행을 도왔다. 마지막 날, 당시 윤현(1929~2019) 북한인권시민연합 이사장이 말을 걸었다. “한국에서 같이 일해 보지 않겠습니까.” 그날 바로 짐을 싸고, 한국행 비자를 신청했다. “운명 같았어요. 드디어 길이 보이는 느낌이었거든요. 모두 ‘힘들면 돌아오라’고 했어요. ‘알겠다’고 했죠. 사실 돌아올 생각 없었어요.”
–너무 성급했던 건 아닌가요?
“부모님은 걱정하셨죠. 당시 월급이 150만원 정도였는데, 혼자서 잘 살 수 있겠냐고…. 대사관에서 비자 받을 때, 영사관도 그랬거든요. 밥 사 먹기도 부족할 거라고요. 그때는 그런 거 생각 안 했어요.” 서른 살, 서울 땅으로 향했다. 6월이었다.
◇겁 없는 도전… 결핵에 테러 위협까지
–낯선 나라, 뭐가 가장 힘들었나요?
“날씨요. 정말 더웠어요. 장마도 처음 겪어봤어요. 그리고 매미 소리가 정말….”
진짜 고통은 이윽고 도착했다. “어느 날부터 살이 굉장히 빠지고 숨이 잘 안 쉬어졌어요.” 결핵이었다. 의사가 “밥 잘 먹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렇지 못했다. “돈이 딱 1000원 남았는데, 900원 내고 지하철 티켓을 살지 먹을 걸 사야 할지 고민하던 시절”이었다. “북한 사람들 고생에 비하면 별거 아니에요.” 몸이 회복되자마자 그해 10월 태국으로 향했다. 탈북자들의 고충을 간접 경험하려 라오스까지 10여㎞를 걸었다. 주요 탈출 경로 중 일부였다. 일사병 증세로 또 병원 신세를 졌다. “저는 체험이지만 탈북자는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위협은 없었나요?
“한국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사무실 바깥에 작은 소포가 놓여있었어요. 칼, 협박 편지, 그리고 비타민 음료수 두 병이 들어있었어요. 경찰 말로는 독극물이었대요. 저희에게 겁을 주려 했던 거겠죠. 2006년쯤에는 폴란드에 계신 엄마한테 ‘평양이 궁금하면 와라, 실제 어떤지 보여주겠다’는 전화가 왔대요. 이상한 전화는 지금도 있어요. 너희가 평화를 방해하고 있다고.”
그러나 평화는 평화롭게 주어지지 않는다. 발버둥 쳐야 한다. 2013년 스위스 제네바로 향했다. 당시 유엔 인권최고대표(나비 필라이)를 만나러. 이미 북한 인권 결의가 채택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크게 바뀐 건 없었다. 그는 눈물로 호소했다. 실제로 울음을 터뜨렸다. “지금 북한은 무덤입니다. 수단이나 미얀마·팔레스타인 같은 나라에서는 무슨 일이 생기면 TV에서 볼 수 있지만 북한은 아닙니다. 그곳은 캄캄합니다. 지금처럼 핵무기와 안전만 얘기하면 인권은 묻힙니다. NGO는 힘이 약합니다. 독립적인 조사 위원회가 필요합니다. 역사적인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반응이 어땠습니까.
“판사 출신이라는데 표정이 딱딱했어요. 미팅이 예정보다 길어져서 1시간쯤 지났는데, 도중에 자리에서 일어나더라고요. 그날 저녁 보좌관이 얘기하길, 눈물이 나올까 봐 더는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고 하더래요.” 그해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 구성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채택됐다.
–그래서… 더 나아졌나요?
“솔직히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이후 많은 연구 자료가 나오고, 시민단체도 늘었지만 한계가 있죠. 북한 정권은 오히려 강해졌어요. 결국 지도자가 선택해야 해요. 개혁하지 않으면 자기 권력을 잃게 될 거라는 공포 없이는 바뀌지 않을 거예요.”
–북한에 가보셨나요?
“한 번요. 개성공단.”
–어땠나요?
“혼자서는 화장실도 못 가게 했어요. 저를 따로 관리하는 북한 사람이 있었어요. 질문을 많이 하더라고요. 2008년 무렵이었는데 광우병 시위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기도 하고요. 공단 바깥은 허허벌판이었죠. 사회에 아무것도 투자하지 않고, 인간에 대해서는 어떤 관심도 없구나….”
◇죽음의 수용소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호사냑 부국장이 대표 조사관으로 참여한 보고서 ‘메이드 인 차이나’가 지난해 말 발표됐다. 함경북도 회령시 전거리(全巨里)에 있는 ‘전거리 12호 교화소’에서 강제 노동으로 생산된 물품이 중국에 들어가 ‘메이드 인 차이나’로 세탁되고, 국제 제재를 피해 전 세계로 팔려 나가고 있다는 폭로다. 교화소(敎化所)지만 교화는 없다. 착취뿐. 하루 최대 20시간의 노동. 수감자의 80%가 중국에서 잡혀 송환된 탈북 여성. 성폭행과 강제 낙태 등 “말로 옮기기 힘든 처참한 폭력”이 반복된다. 이를테면 화장실은 1000명당 하나, 굶어 죽지 않으려 쥐를 잡아먹는다.
–어떻게 알게 되셨습니까.
“지금껏 500명 정도의 탈북자를 인터뷰했어요. 수감자부터 국가보위성 요원까지 다양하죠. 목소리가 쌓이면 그림이 그려져요. 북한 경제는 범죄를 기반으로 움직이고 있어요. 노예 무역, 인건비를 없애는 가장 쉬운 방법이에요.”
주력 상품은 가발과 화장용 속눈썹. 전거리 12호 교화소의 가발반 수익이 2023년에만 16만2000달러(약 2억3000만원)로 추산된다. 이 과정에서 매년 수감자의 약 4분의 1이 사망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할당량을 맞추지 못한 수감자에 대한 구타와 학대, 식량 박탈은 일상적인 일이었으며 이는 높은 사망률에 일조했다.” 이곳 출신 탈북자의 증언이 눈을 찌른다. “그저 옷이고 뭐이고 다 찢어져서는 (시신을) 달구지에다 훌 실어서 내려다보면, 우리가 개보다 못하고 돼지보다 못하구나.” 북한에는 8~9개 정도의 교화소가 있다.
–가장 아팠던 일화라면….
“불망산 이야기. 수감자들이 시체를 모아 불망산이라는 야산에서 태우면, 교화소에 남은 사람들이 그 연기를 보고 ‘여기서는 죽으면 안 된다’고 다짐했다는 이야기. 어릴 적부터 그런 연기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면 인근에 있는 옛 폴란드 수도 크라쿠프에 5월에도 눈이 내렸다는 이야기. 실은 눈이 아니라 재였던 거예요.”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요.
“생산지의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상품을 유통시킬 수 없도록 계속 조사하고 압박해야 해요. 이미 유럽연합(EU)이나 미국에 강제 노동과 결부된 물품의 수입·거래를 금지한 규정이 있어요. 우리 정부도 기업들에 철저한 검증과 법적 책임 가능성을 강조해야 합니다. 인권을 말살해 얻은 돈이 군사 자금과 체제 유지에 쓰이잖아요.” 북한에는 현재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10기가 있으며, 10년 내 50기까지 늘어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가끔 허망해… 그래도 미래에 희망 건다
모국 폴란드에도 그 역사적 트라우마가 유적으로 남아있다. 나치 시절의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다. “학교에서도 워낙 중요하게 가르치고, 영화에도 많이 나오고…. 근데 저는 도저히 못 보겠더라고요. 2017년에야 처음 가 봤어요. 탈북자를 포함한 한국 학생들과 떠난 해외 투어 프로그램이었는데요,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어요. 거의 토할 뻔했어요. 땅이 절규하는 것 같았어요. 원한 때문인가 봐요.”
–북한에서는 현재진행형인데요.
“황당한 일입니다.”
북한 인권 운동에 거의 반평생을 바쳤다. 그는 여전히 미혼이다. 여전히 200만원대 급여를 받으며, 집에서 도시락을 싸서 다닌다. 그리고 여전히 한국은 분단국가로 남아있다. 북한에서는 끔찍한 인권 유린이 자행되고 있다. 작은 사무실에 탈북 화가 선무(線無)가 그린 북녘의 소년·소녀 그림이 놓여 있었다. 어깨동무한 채 웃고 있는 아이들, 자유가 없는 한 그것은 죽지 않으려고 꾸며내는 가짜 활력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통일에 관심이 줄고 있습니다.
“말뿐인 평화에 실망이 누적된 거예요. 특히 진보 정권에서 크게 실패했죠. 한국은 젖소처럼 북한에 계속 우유를 짜줬어요. 그래서 얻은 게 뭐죠? 더 안전해졌나요? 발전했나요? 이런 범죄 집단, 수준 낮은 상대와 통일을 논의할 수 있겠느냐, 이런 걱정이 있는 거예요.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에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 일관된 원칙을 세워야 해요. 공장만 만들어 주는 게 아니라, 돈만 주는 게 아니라, 우리가 관리할 수 있어야 해요. 안 그러면 독재와 노예제만 강화하는 거예요. 이미 어느 정도는 그렇게 됐죠.”
–허무하지는 않으세요?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내가 한 일이 무슨 의미가 있지? 외교 정세는 복잡하게 꼬이고, 정치인마다 ‘한반도’ ‘한민족’ 외쳐대도 실속은 없죠. 그래도 역사에서는 상상하지 못한 일이 생기잖아요. 소비에트도 어느 날 무너졌고요. 그런 기적을 기다리며 일하는 거예요.”
2018년부터 연세대 겸임교수로 국제대학원에서 강의하고 있다. “인권법이나 전쟁법 같은 걸 가르쳐요. 학생들에게 질문을 많이 해요. 국제사회에서 인도적 지원이 이뤄져도 대부분 그 나라 지도자 주머니로 들어가죠.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만약 ‘돈 안 주면 인권 없다’고 배짱부린다면?” 온정만큼 전략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2년 전 자발적으로 인권 동아리를 만들었어요. 저희 단체에서 인턴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고요. 더 똑똑하고 건강한 진보가 필요해요. 젊은 세대에게 희망을 걸고 있어요.”
–인권이란 무엇입니까.
“사람이 태어나 하고 싶은 걸 하고, 뭔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자유와 가장 가까운 단어 같아요.”
더 알리기 위해 그는 6·25전쟁 서울 수복 기념일(9월 28일)을 기해 ‘납북자 알리기’ 시민 투어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서울 마곡동에 내년쯤 들어설 2400㎡ 규모 ‘국립북한인권센터’ 자문에도 참여했다. “바르샤바에 이런 형태의 전시관이 많아요. 주말마다 가족 단위 방문객이 자주 찾죠. 어떻게 더 젊은 세대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지 아이디어를 나눴어요.” 오는 20일에는 유엔총회에서 북한 인권침해 및 위반 문제 해결을 위한 고위급 회의가 처음으로 개최된다. 그러나 정작 우리 측 책임자(외교부 북한인권국제협력대사)는 1년 가까이 공석인 상태.
–상황이 나아질까요?
“알 수 없죠. 끝까지 할 일 하는 수밖에요.”
2025년 5월 17일 조선일보 아무튼 주말 정상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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