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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중궁궐'로 돌아가는 이 대통령스크랩된 좋은글들 2025. 6. 28. 07:31일러스트=유현호
“제가 대통령이 되면 대통령 집무실을 광화문으로 이전하겠습니다.”
2012년 대통령 선거 때 문재인 후보가 한 말이다. 그가 내세운 이유는 ‘소통’. “구중궁궐 같은 청와대를 나와 국민들 속으로 들어가 늘 소통하고 함께하겠다. 국민들은 출퇴근길에 대통령과 마주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해 박근혜 후보에게 패한 문재인은 5년 후 다시 대선에 출마하면서 광화문 이전을 거듭 약속한다. “대통령이 광화문 집무실에 출퇴근하면서 퇴근 때 남대문 시장에 들러 시민들과 소주 한잔하며 세상 얘기를 나누고 시국도 논하고 소통하는 모습은 어떤가? 저는 그런 대통령이 되겠다.”
하지만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이런 소통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남북 분단 상황임을 고려하면 더더욱 말이 안 되는데, 문통이 대구 칠성시장을 방문했을 때 경호원이 기관총을 들고 있던 장면은 그가 꿈꾸는 소통이 실현 불가능한 것임을 말해주는 증거였다.
국민 속으로 뛰어들지 못한다고 슬퍼할 필요는 없다. 비서관들과 내각, 그리고 기자들을 통해 국민과 소통하면 되니 말이다. 그런데 청와대의 문제점은 이런 방식의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대통령 집무실과 비서실이 무려 500m나 떨어져 있다 보니 어지간히 급할 때가 아니면 안 가게 되고, 그 결과 ‘불통의 장벽’이 세워지기 마련이니까. 문통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된 게 “구중궁궐 청와대에 갇혀 최순실 같은 측근만 만나고 국민과 불통해서 그렇게 됐다”고 했지 않은가?
그런데도 문통은 끝내 청와대에만 머문 채 임기를 마친다. 왜 문통은 공약을 지키지 않았을까? 대통령 경호와 비용, 지방선거와 총선 등의 정치 일정이 핑곗거리가 될 수 있겠지만, 진짜 이유는 청와대가 구중궁궐이라는 데 있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소통하는 대통령을 외칠지언정, 막상 대통령이 된 뒤엔 소통이 차단된 구중궁궐만큼 편한 곳은 세상에 또 없지 않을까.
2021년 11월 문재인 대통령의 딸 다혜씨가 지난해 말 태국에서 입국한 뒤 1년 가까이 자녀와 함께 청와대 관저에서 지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남편과 아들을 데리고 태국에 가 있던 다혜씨가 몰래 귀국해 관저에 살았는데, 그걸 아무도 모를 만큼 청와대가 요새 그 자체였다는 것. 당시 청와대는 “딸이 아빠랑 같이 산다는데 무슨 문제냐”고 항변했지만, 정말 떳떳하다면 그 사실을 1년 가까이 쉬쉬한 이유는 대체 뭐란 말인가. 게다가 다혜씨가 독립 생계를 이유로 재산 공개를 거부했던 과거를 떠올리면, 그들도 이게 적절하지 않은 건 아는 모양이다.
문통이 청와대에 남은 대가는 이게 다가 아니다. 자신이 비난했던 박통보다도 소통을 덜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은 것. 문통은 “기자회견 횟수는 적지만 SNS를 통해 활발히 소통했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문통의 ‘의사·간호사 갈라치기' SNS 글이 국민으로부터 비난을 받자 청와대가 “비서관이 쓴 것”이라고 실토한 걸 보면, 그를 역대 손꼽히는 불통 대통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문통의 실패에서 얻은 교훈을 잊지 않았다.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오기 힘든 게 청와대인 만큼, 아예 들어가지 않겠다는 전략을 세운 것이다. 희한한 것은 민주당의 태도. 문통이 대선 때 내건 공약이었고, 자기들이 못다 한 꿈을 대신 이뤄주겠다는 것임에도 민주당은 시종일관 대통령실 이전을 반대했는데, 심지어 예산을 안 주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던 장면은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가 불가능했다.
이런 훼방에도 불구하고 윤통은 흔들림 없이 대통령실 이전을 추진했고, 결국 관철시킨다. 그 열매는 달았다. 집무실과 비서실이 가깝게 위치해 만남이 잦아진 것은 물론, 출근길마다 대통령이 기자들과 일문일답을 하는 ‘도어스테핑(출근길 약식 회견)’이 정착돼 소통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이뤄낸 것이다. 청와대가 국민의 품으로 돌아가 지난 3년간 800만명에 이르는 국민이 청와대를 구경한 것도 긍정적인 면. 이런 기조가 계속됐다면 윤통은 성공한 대통령이 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윤통의 끝은 좋지 못했다. MBC가 촉발한 ‘바이든-날리면’ 논란을 계기로 도어스테핑을 중단해 버린 게 그 시작이었던 것 같다. 그 뒤 윤·한(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갈등과 총선 패배가 이어졌고, 국회를 장악한 민주당이 국정에 사사건건 훼방을 놓는 가운데 윤통은 비상계엄을 선포함으로써 스스로 무덤을 팠다. 결국 정권은 다시 민주당으로 넘어갔다.
이재명 대통령은 8월에 다시 청와대로 돌아갈 것임을 천명했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다. 이 대통령은 소통과 거리가 있는 스타일이라는 인상을 심어준 측면이 있다. 일단 그는 기자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민주당 대표 시절 그가 보여준 상징적인 장면을 떠올려보자. 이 대표가 걸어가고, 기자들이 따라가며 질문을 건네는데, 필요한 얘기는 선택적으로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질문에 이 대표는 답변하지 않는다. 뉴스 자막에 “…”으로 표시되는 장면이 많다 보니 ‘점점점 대표’라는 별칭까지 생겼을 정도다. 답변하기 정말 곤란할 때는 좌우에 포진한 몇몇 민주당 의원들이 기자들을 쫓아버리기도 했다.
2018년 경기도지사 당선 때는 언론과의 인터뷰 도중 “예의가 없어” “다 커트야”라며 인터뷰를 일방적으로 중단하기도 했는데, 보수 정치인이었다면 진작에 ‘언론 탄압’ 딱지가 붙어 정치권에서 퇴출됐을지도 모른다.
이 대통령의 불통은 이게 다가 아니다. 2014년 당선된 남경필 경기도지사는 2016년 수원 장안구에 있는 2층짜리 관사를 게스트하우스 갤러리, 카페 등으로 용도 변경해 주민들에게 개방한 뒤 자신은 수원 자택에서 출퇴근을 했다. 하지만 그다음 경기도지사에 당선된 이 대통령은 2019년 1월 관사를 주민들로부터 회수해 자신이 썼고, 부인은 수내동에 남았다. 그 뒤 일어난 일은 다들 기억할 것이다.
김혜경 여사는 경기도 법인카드를 유용한 혐의로 도마 위에 올랐다. 이 대통령도 경기도지사 시절 법카로 음식을 구입하는 등 경기도 예산을 개인 용도에 쓴 혐의로 기소된 상태다. 공익 제보자 조명현씨의 ‘법카 의혹’ 폭로가 있기 전까지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는데, 이는 전적으로 관사의 폐쇄성 때문이었다. 그랬던 이 대통령이 구중궁궐이라는 청와대로 다시 들어간다니, 우려가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궁금해진다. 이 선택은 그에게 어떤 미래를 선사할까.
2025년 6월 28일 조선일보 서민의 정치 구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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